@Melly85_
"사진 찍어드릴까요."
쭈그리고 앉아 흐드러지게 핀 노란 유채꽃들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던 샤오잔은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푹 눌러쓴 남자가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사진이요. 본인 사진은 안 찍으시길래."
샤오잔이 멍하게 그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샤오잔은 제 카메라에 자신을 담아본 적이 없었다. 샤오잔이 담아내는 피사체는 담장 위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라던가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이름 모를 풀, 그리고 네 달을 꽉 채워 만났던 전 애인이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던 전 애인의 말에 혹해 구매한 카메라였다. 우리 추억도 사라지지 않는 사진으로 남겨보자느니 뭐라느니. 아무튼, sd 카드 하나를 전 애인 사진으로만 꽉 채웠을 때쯤 전 애인은 샤오잔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 괜찮아요."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사진 한 장 찍어드려도 될까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보고 샤오잔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남자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모자를 벗고 샤오잔이 그랬던 것처럼 유채꽃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샤오잔은 어색하게 브이를 하고 포즈를 취하는 남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피사체
네 달을 꽉 채워 만났던 전 애인은 4주가 채 되기도 전에 연락이 왔다. 미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짧은 연애였지만 매일을 붙어있었던 터라 추억도 많았다. 특히, 그 사람으로 인해 샤오잔은 새로운 취미도 갖게 되었다. 매주 주말이면 샤오잔은 풍경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그날도 샤오잔은 사진을 찍으러 타 지역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 샤오, 잘 지내? ]
잘 지내면 어떻고, 잘 못 지내면 어떤가. 샤오잔은 전애인과 서로의 안부를 물을 만큼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 알아서 뭐하게. ]
샤오잔은 다음 문자를 받자마자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 나 결혼해. 린이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 결혼식에 네가 와줬으면 해. ]
자신과 연애하기 전 만나던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결혼이라니. 심지어 와줬으면 좋겠다니. 자신의 예비 신부에게 남자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가 빤히 눈에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여전히 미련이 있던 제가 멍청했다. 샤오잔은 그대로 전 애인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남아있던 그의 흔적마저 다 치워버리기 시작했다. 같이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커플 옷, 그에게 받았던 선물들까지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처박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것은 카메라였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은 죄다 제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카메라는 그러질 못했다. 샤오잔은 사진을 찍을 때 행복했다. 렌즈에 담기는 모든 피사체를 사랑했다.
카메라에서 sd 카드를 분리한 샤오잔은 노트북을 켜고 사진 파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파일 속 전 애인의 사진들을 지우며 스크롤을 내리던 샤오잔은 유채꽃밭 사진을 발견했다. 유채꽃 향기가 솔솔 풍겨오는 것 같았다. 전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받고 며칠을 내리 폐인같이 살다가 바람도 쐴 겸 홧김에 보러 간 유채꽃밭이었다. 노랗게 물든 들판과 한 올 한 올 핀 유채꽃을 담아낸 사진들 사이로 웬 남자 사진이 한 장 들어앉아 있었다.
어색하게 브이를 하며 렌즈가 아닌 렌즈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에 샤오잔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랑 사진 다시 한번 찍어보고 싶다.
당시 샤오잔은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남자의 연락처를 받아뒀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렸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찍었던 사진들이라 굳이 사진을 보정할 필요가 없었다. 찍었던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옮길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sd 카드 속에 묻어져 있던 사진들이었다.
이제와서 사진을 보내면 뭘 어쩌겠는가. 이미 4주나 지난 일이었다. 마저 스크롤을 내리던 샤오잔은 결국 사진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는 건 사진 뿐이라.
[ 4주 전쯤에 유채꽃밭에서 찍어드렸던 사진입니다. ]
[ 늦게 보내드려서 죄송해요. ]
답장은 바라지도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저였기에 아무런 기대조차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 기다렸어요. 사진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 연락을 기다렸다는 남자의 말에 샤오잔은 더욱 미안해졌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연락을 하려던 찰나에 남자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 죄송하면 저 사진 한 번만 더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
[ 당연히 되죠! 언제가 편하신가요? ]
이틀 후, 남자가 일한다는 카페에서 만난 둘은 그제서야 통성명을 했다. 남자의 이름은 왕이보. 나이는 25살. 샤오잔은 자신의 25살을 곱씹어보다 관뒀다. 그 남자, 그러니까 왕이보가 샤오잔이 자신보다 어린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탓이었다.
“이보씨. 사회생활 잘 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25살보다 어려보여요?”
“진짜예요. 저 거짓말 못해요.”
샤오잔은 진지한 왕이보의 표정에 한바탕 또 웃고 말았다. 왕이보는 붉어진 제 볼을 머쓱하게 긁었다.
“원래 혼자 사진 찍으러 많이 다니세요?”
왕이보 딴에는 쑥스러워서 화제를 돌리고자 한 말이었겠지만, 샤오잔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샤오잔은 항상 전 애인과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녔으니까. 봄이 오면 함께 유채꽃을 보러 가자던 애인은 유채꽃이 피기도 전에 제게 이별을 고하고 저를 농락하듯 옛 애인과 결혼을 한다고 했다. 기껏 덮어뒀던 상처에 다시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진 샤오잔을 보고 왕이보는 급하게 사과를 했다.
“제가 또 무례했던 거죠. 죄송해요.”
왕이보의 잘못은 없다. 샤오잔도 그 사실을 알고 왕이보도 그 사실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무지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샤오잔은 잡생각을 떨치고 왕이보의 눈을 바라봤다. 둘은 잠시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내일 뭐 해요.”
“내일이요?”
“오늘은 사진 찍기 그른 것 같고, 편의점에서 맥주나 한 잔 해요.”
술이 들어가야 말문이 트일 것 같았다. 샤오잔은 왕이보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정말 친한 형 동생 사이든, 애인이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오늘은 제가 한 컷 찍어드리면 안 될까요?”
“절요?”
“네, 카메라 무거운데 들고오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왕이보는 샤오잔이 들고 온 카메라백을 가리켰다. 남이 찍어주는 것은 익숙치 않았던 터라 거절할까 싶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자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 부탁 좀 해도 될까요?”
왕이보는 싱긋 웃으며 카페 매대에 진열된 쿠키들을 몇 개 내왔다.
“소품이에요. 드셔도 돼요.”
“소품을 먹으면 어떡해요.”
“샤오잔씨 오신다고 해서 만든 거라 괜찮아요. 오늘은 카페 문도 닫았구요.”
왕이보는 쿠키를 먹어보라며 직접 입 앞에 대주기까지 했다. 샤오잔은 예쁘게 구워진 쿠키를 한 입 베어먹었다. 달달한 마시멜로가 들어간 스모어 쿠키였다.
“쿠키도 직접 구우시는 줄은 몰랐어요.”
왕이보는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샤오잔은 멀뚱하게 그 손을 바라보다 제 손을 뻗어 왕이보의 손을 맞잡았다.
“제 손이 잡고 싶으셨어요? 전 카메라 달라고 한 건데.”
샤오잔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왕이보는 샤오잔의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쓸어주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샤오잔은 카메라백에서 카메라를 꺼내 왕이보의 손에 쥐여주었다.
“쿠키 더 드세요. 이제 사진 찍을게요.”
부끄러워서 눈을 쿠키에 박고 있던 샤오잔은 왕이보에게 사진 찍는 방법을 설명해주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이미 샤오잔을 담아내고 있었다.
렌즈 너머의 왕이보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지만 눈 앞에 왕이보의 표정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저 보지말고 자연스럽게 쿠키 들고 포즈 취해주세요. 샤오.”
전 애인이 샤오잔을 부를 때와 같은 애칭이었지만, 전 애인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웃음기 가득 섞인 왕이보의 목소리와 카메라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 왕이보의 표정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왕이보는 샤오잔을 편안하게 했다. 샤오잔은 왕이보를 통해 편안함을 느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왕이보에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고 굵게 만난 전 애인에게 헤어짐을 통보받고 생각을 정리할겸 찾아갔던 곳이 유채꽃밭이라고. 그리고 그 전 애인이 저와 연애하기 전 만나던 오래된 옛 연인과 다시 만나 결혼을 한다고.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서 힘들다고.
왕이보는 카메라를 가만히 내려놓고 샤오잔의 눈가를 문질렀다.
“형. 많이 힘들었겠네요.”
샤오잔은 왕이보의 말 한 마디에 막아둔 댐이 와르르 무너지듯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헤어지자는 연락을 받고도 울지 않았던 샤오잔이었다. 다 견딜 수 있었다. 미련은 정말 미련일 뿐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무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련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온 연락이 결혼 소식이라니.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러나 샤오잔은 그 소식 덕분에 남아있던 미련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었다. 원래 그럴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 사람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왕이보는 휴지로 샤오잔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냈다.
“그 날 있잖아요. 유채꽃밭. 형 너무 잘생겨서 번호 물어보고 싶었어요. ”
“거짓말.”
“진짜예요. 근데 멍청하게 제가 번호를 물어본다는게 심장이 너무 떨려서 나온 말이 ‘사진 찍어드릴까요’ 였다구요.”
샤오잔은 왕이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왕이보 덕분에 또 다시 웃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 울었어요? 예쁜 얼굴 퉁퉁 부었네.”
“어른 놀리면 못 쓴다.”
“저는 형 나이 많다고 생각 안 한다니까요?”
“지금 나 유치하다고 욕하는 거지.”
왕이보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그런게 아니라며 중얼댔다. 샤오잔은 오리같이 튀어나온 왕이보의 부리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너 귀엽다, 이보야.”
“전 쿨하거든요.”
왕이보는 샤오잔의 손에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형이 보기에는 어때요? 저 사진 잘 찍어요?”
왕이보가 담은 샤오잔은 행복해 보였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 사진을 찍어준 적은 오랜만이라 너무 어색했다. 왕이보는 사진을 옆으로 넘기며 형 이거 예뻐요, 이 사진은 귀엽게 나왔어요, 이 사진은 흔들려서 별로네요, 라며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이보야 너 사진 잘 찍는다.”
“진짜요?”
“응. 내일도 나 찍어줘.”
“모레도 만나요. 매일 형 사진 찍어주고 싶어요.”
“지금 고백하는 거야?”
샤오잔은 웃으며 왕이보를 바라봤다. 왕이보의 볼은 이미 붉어져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말했잖아요. 전 유채꽃밭에서부터 형 좋아했다니까요.”
유채꽃은 이미 져버렸지만, 샤오잔의 봄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안녕하세요! 존잘님들 사이에서 꾸깃꾸깃 자리 하나를 차지한 멜리라고 합니다... 합작은 처음이라 너무 떨리네요! 많이 부족하고 짧은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