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mrk_____
“부품 결함입니다. 소모품이라 교체하셔야 하는데 저희에게 없는 거라 오늘 주문하면, 음…수리까지 5일쯤 걸릴 것 같네요. 진행하시겠어요?”
예상대로였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쓰시던 걸 물려받아 지금까지 용케 잘 버텨냈다. 가벼운 충돌 사고 같은 것도 전혀 없지는 않았고 성격 상 신주 단지 모시 듯이 써온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이렇게 큰 수리 한 번 없었던 게 기특했다. 어지간하면 이제 슬슬 놔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하필이면 한참 의뢰가 진행 중이라서 어떻게든 이 기체를 살려내야만 했다. 착수금만으로는 기체 구입은 고사하고 소모품 구입도 빠듯할 뿐더러, 금요일까지 지구로 돌아가려면…아니, 이미 무리겠지. 5일이라고 하지만 워낙 구형이라 또 무슨 예기치 못한 일로 수리가 더 걸릴지 모르고, 운이 좋아서 제 시간에 끝난다고 해도 여기 화성에서 지구까지 하루 만에 날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의뢰자에게 별도 청구할 수 없는 비용이기도 하니, 아무튼 당장은 지출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그래서 가게에서 임시 기체를 빌리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여러모로 내키지가 않아 그만뒀다. 지금으로써는 기체 수리를 맡기고 의뢰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조금이나마 기한 연장을 부탁하는 것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품 구입비, 교체비, 당분간 못 받거나 액수가 변경될 의뢰비를 생각하니 입이 썼지만…작년에 못 챙긴 휴가라도 온 셈 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불시착
※ 동명의 작품과 조금도 관련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네…. 좋아요, 수리 진행할게요.”
“여기, 접수증에 성함, 연락처 써주시고요-”
다른 곳에 가봐도 마찬가지겠지…? 혼자 중얼거린다는 게 목소리가 컸다. 말간 얼굴의 정비사가 삼백안을 치켜뜨면서 “다른 곳에 가시면 한 주 넘게 걸려요. 저희는 오늘 마침 부품을 주문하는 날이라 그나마 빨리 받아서 진행하실 수 있는 거라고요.” 하길래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사과했다. 제가 일 때문에 속이 좀 시끄러워서, 실수했어요.
“일이라고 하시면…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요.”
“아, 이번 일은 배달 같은 거에요. 고객이 주문한 화성 특산주를 구해가면 되는 거였는데 뭐,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받으실 고객님 주소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네…?”
“아시다시피 여긴 다른 행성으로 나가는 화물이 워낙 많으니까, 운이 좋다면 화물선을 구할 수 있어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오! 역시 큰 행성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여기는 나처럼 가니메데에서 지구로 가는 길에 연료 보충 겸 들러 쉬었다 가는 화물선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의뢰 받으신 화성 특산주는 구해두셨나요?”
“아뇨, 이제 막 온 참이라…기체가 말을 안 들어서 여기까지도 간신히 왔어요. 술 파는 가게를 찾아보니 몇 군데 있으니까 술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길은 좀 헤맬 수 있겠지만….”
“그건 저랑 같이 돌면서 구하시면 되겠네요.”
“네…?”
여긴 구도심 경계 지역이라 사는 사람들도 길 잃으면 잘 못 찾는데, 저는 눈이 좋은 편이라 같이 있으면 도움이 되실 거에요.
“아니, 그래도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는 건 너무 죄송한 일이….”
그보다 이 사람, 정비 담당자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다른 정비사가 (당장은 주위에는 안 보이지만) 또 있는 거겠지? 내 기체 5일 안에는 고쳐지는 거겠지…? 솔직히 수리 일정에 문제만 없다면 혼자 다니는 것보다 현지인이랑 다니는 게 백 배쯤 좋을 것 같았다. 흔한 정보야 찾아보면 다 나오겠지만 아무래도 현지인만 알고 가는 그런 게 있지 않겠냐고. 짐작해보건데 동행에 대한 보수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 접수증….”
“네. 그럼 샤오…잔 씨, 요금은 부품 구입비 805WX, 교체 서비스 비용 무료고, 인도일은 5일 후인 이번 금요일입니다. 모두 확인되셨을까요?”
“네…네, 감사합니다. 좋은 정비소라 잘 해결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제 저는 숙소만 찾으면 되겠네요. 하하…수리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
“숙소라면 저희 정비소에서 정비 끝날 때까지 제공해드리는 방이 하나 있는데 어떠세요?”
“네…?”
“욕실도 지금 정비소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 쓰실 수 있어요. 그리고 숙박 요금은 정비 서비스에 포함이라 무료에요.”
“정비하는 동안 숙소를…역시 큰 행성은 규모가 다르네요, 와-”
하긴…여기는 온갖 행성 사람들과 기체가 머물거나 거쳐가는 곳이었다. 초행인 사람들이나 목적지가 먼 사람들도 많이 들를 텐데 갑자기 기체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위해 잠시 지낼 곳을 마련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금 내역에는 부품 구입비만 있고 교체 서비스는 무료인데…숙소도 무료 제공이라니, 이런 식으로 운영해서 남는 게 있나…? 설마 부품에 마진을 80% 정도 붙였나?? 일단은 무료라고 했고, 정비소니까 지금부터 모르는 곳을 찾아 헤메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즉시 가방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정말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화성에 자주 들르시나요? 아주 처음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전 일 때문에 자주 오가긴 하지만 처음이나 마찬가지에요, 정말…매번 경유만 하니까요.”
“그래요? 생각해보니 저도 그러네요, 경유만 하거든요. 샤오 씨는 어느 행성에서 왔어요?”
“BJYX라고…….”
“가본 적 없어요.”
“여기처럼 큰 행성은 아니에요, 작은 편이죠. 여기서 지구로 가는 방향으로 빠지기 전에 터미널로 들어가시면 바로 보여요.”
“아, 방은 여기에요. 물건은 편하게 쓰세요. 욕실은 여기, 욕조 필요하시면 구해드릴게요.”
“아니, 뭘 욕조까지…충분해요, 충분해요. 너무 좋은데요, 여기?”
모르긴 모르겠지만 내 예산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직 의미가 있다면) 내에서 이렇게 다 갖춰진 숙소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정비 요금에 포함이긴 하겠지만 공짜로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니…화성 출신들이 거기만 큰 게 아니라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다 경험이었네. 시동이 영원히 꺼지기 직전의 기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이 화성에 정말 간신히, 거의 기적적으로 비상 착륙 성공하기까지 며칠이나 기체에 앉아서 자고 일어났으니 뜨거운 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욕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의뢰 받은 술을 찾으러 같이 돌아준다는 이에게 그런 개인적인 수고까지 끼칠 순 없었다.
🛰️
본의 아니게 생계와 바꿔버린 휴가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본의 아니게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내친 김에 빨리 나가보자는 (아마도) 젊은 정비소 사장님 덕분에 저녁에 바로 번화가와 그 주변을 돌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의뢰 건은 맥이 빠질 정도로 잘 풀려버렸는데, 그에게 안내 받은 첫 번째 가게에서 의뢰 받은 술을 충분히 살 수 있었고 마침 자정 즈음 화성에서 출발할 예정이라는 사설 화물선까지 섭외하는 것에 성공했다. 사설 화물선이라고 하면 요금이 저렴한 대신 운송의 질이랄까…서비스가 다소 복불복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한데 어째서인지 그…컨테이너 전면으로 온갖 그래피티가 난무하는…흑표범과 토끼를 좋아하시고…아무튼 취향의 범위가 다소 지나치게 넓으신 게 아닌가 싶은 기사분께서 (아마도) 젊은 정비소 사장님과 막역한 사이인지 고향 오가시는 길에 날짜 맞춰 지구에도 들러주신다고 하셨다! 엄청 좋은 분이셨어!
아무튼 의뢰 건은 그렇게 손을 떠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관광지 구경이었다. 이 정도로 크지 않은 행성 출신이라 그런지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기분 전환이 되고 있었다. 아직 기온이 낮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사진으로 담기에 좋은 풍경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도시답게 다소 버석한 느낌도 분위기가 있었다. 요즘 시대에 화성 특산물이야 어느 행성을 가도 팔고 있지만, 현지인이 추천하는 본고장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3일째 되던 날,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같이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어서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며 적당한 가게를 찾아냈다. (왜 남자 손님들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의뢰자로부터 물건 잘 받았다는 소식도 있었고, 요청했던 액수보다 좀 더 들어온 의뢰비에 상당히 기분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은인이나 다름 없어진 (아마도) 젊은 정비소 사장님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었다. 주량을 애저녁에 들킨 탓에 저를 말리려는 손을 물리며 바텐더에게 까다롭게 추천을 부탁했고, 아직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북동부 끝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지역에 있는 큰 강은 신기하게도 물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이 나고 이 지역 피트가 또 훌륭한데 극소량만 채취할 수 있어 어딜 가나 최고급으로 취급되는데 아무튼 뭐 그런 것들로 만든 화성의 뭔가를 두 잔 받아서 마신 기억까지는 있어, 있는데…….
🛰️
“아아, 머리야….”
일어나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그러려고 그런 건 결코, 맹세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전신 근육통 때문에 어제는 하루 종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 왔던 날—그러니까 불과 5일 전—에도 정비소 건물 어딘가에 붙어 있는 숙소 같지 않게 창이 제법 크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창으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희뿌연 대기에 난반사 되는 빛이 아니라, 진짜 햇살! 침대 위로 얼마나 강하게 내리쬐는지 등이 따끈따끈했다. 좀 더 뒹굴며 게으름 피우고 싶었지만, 슬슬 되살아난 기체가 나올 시간이었다. 통상적으로 숙박업에서 정해둔 시간에 맞춰 방을 비울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며칠이고 이런 식으로 지낼 명분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재깍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며칠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굉장한 일탈의 기억이 될 터였다.
“오오…내려오셨군요, 손님. 수리된 기체는 저기, 왼쪽에 있습니다. 한 번 타보시겠어요?”
“네? 아…저기, 그…아닙니다. 일단 기체에 타볼게요, 잠시만요.”
“어떠세요? 결함 부품 교체 외에도 여기저기 손을 봐뒀거든요. 아마 훨씬 편하실 겁니다.”
“좋아요, 정말 좋아요- 느낌이 달라졌네요…직접 봐주신 거죠?”
“제가 아니라 저희 손자가 했지요. 저는 볼 줄만 알고, 이제 손 놀리는 게 영 시원찮거든요. 제 손자라 하는 말은 아닌데 진짜 실력이 좋은 녀석이니 아마 앞으로도 손 많이 안 보실 수 있도록 말끔하게 해놨을 겁니다.”
“…손자요? 그…혹시 사장님 아니세요? 저기, 키가 이 정도에-”
“이 녀석이, 저를 여기 사장이라고 하던가요?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만 좀 지키라 했더니 별 소리를 다 했나보네요, 하여간.”
그러고보니, 당연히 정비소에 먼저 내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는 아직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가볍게 혀를 차는 백발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며칠 내내 붙어 지냈던 사람과 눈매며 코며 전체 분위기까지 아주 판박이었다. 마치, 정말 말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시계가 순식간에 돌아서 현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제로 멈춘 시간을 제대로 돌려주는 약이 화성에서 개발되었다고 들었는데…의약품이고 처방 받아야 구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어딘가 좀 홀린 기분이 들어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 차리니 계산대 앞이었다. 미친 척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 어제 일 기억 안 나요…?
“아무튼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손님 요금은…음? 잠시만 이게 왜 이렇게 되어 있지?”
“…아, 요금- 805WX 맞죠? 접수증이랑 카드 드릴게요, 여기-”
“…이거 제 손자가 뭘 모르고 접수해드린 거 같은데, 음…이거 원, 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교체 진행하셨던 부품은 공장 사입 비용이 1,005WX이고 교체 서비스 비용은 시간 당 85WX인데…아마 더 잘 아시겠지만, 이 기체는 워낙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해서…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겠지요. 문제는 그, 교체 부품이 저희 창고에 재고가 있으니까, 교체 서비스만 진행하셔서 하루나 이틀 정도면 기체를 받아보실 수 있으셨을텐데…혹시 불편하셨다면 이 일을 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녀석이 재고 검색도 안 해봤을 리가 없을텐데 대체…아무튼 그때 자리를 비웠던 제 불찰입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보상해드리면 좋을런지 모르겠네요….
“그…뭐, 일단…알겠습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숙박도 해결해주셨고….”
“숙박이요? 근처에서 숙박까지 하셨나요? 이렇게 죄송할 데가-”
“아니, 그게 아니라…여기, 정비소에 있는 숙소요. 저기 위에…?”
“……숙소요? 저 위에요……?”
“...네?”
아침에 혼자 덩그러니 눈 떴던 것 이상으로 황당한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아쉽긴 했지만, 뭐랄까…다 잘 풀려서 돌아가게 된 거 같기도 했고, 언젠가 일이 있을 때 오면 그만 아닌가 싶기도 했고, 며칠 내내 그렇게나 붙어 있었던 것 치고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건 어울리지 않게 꽤 매정한 일이었지만, 설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 정비소 사장님은 아닐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전신 근육통이 이렇게나 생생한데…뭐가 어찌 되었든 이제 돌아가 또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누구처럼 뒤늦게 수습이 안될 거 같다고 내뺄 수가 없는 어른이었다. 돌아가자마자 이 삐걱이는 몸부터 뜨거운 물에 담궈둬야겠다…생각하며 햇살에 반짝이는 기체에 올라탔다. 덕분에 여러가지로 즐겁고 짜릿했어, see you little rascal.
제목 짓느라 기한에 못 맞출 뻔 했네요! 자꾸만 손가락이 어른의 이야기로 만들려는 걸 붙들고 2번이나 엎어 전체 연령가로 돌렸더니 분량이…언젠가 빠진 분량을 다 밀어 넣어볼 기회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