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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툰

@chaoshouu

자정 100초 전의 사랑

자정 100초 전의 사랑
w. 훈툰

 
어둑한 사무실 끄트머리. 해묵은 체크셔츠를 입은 남자가 거북이처럼 앉아있다. 벌써 새벽 2시였다. 왕이보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기지개를 켰다. 이 주 전 짧게 깎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대며 다음번에는 조금 더 짧게 깎겠다는 다짐을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적막 뿐이다. 왕이보는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입을 푸르르 털었다. 둥글게 만 주먹에 눈두덩이를 대고 뻑뻑한 눈을 마사지하며 한숨을 푹 내쉰다. 그냥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스타트업이라는 거친 세계에 뛰어든 건 본인이거늘 별 수 없이 서럽다. 나이 먹고는 절대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젊어서도 안 하는게 맞았다.
부릉. 부르릉.
고요한 새벽을 요란히 울리는 소음에 왕이보는 멀찍한 창 밖을 쳐다봤다. 차가 멈추고, 문이 닫히고, 삐빅 잠기는 것까지 듣고 나서야 비척비척 탕비실로 향했다. 출근하는 사람인지 퇴근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외로움은 좀 가셨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노란 커피믹스 봉지 세 개를 거침없이 뜯는다. 벽에 머리를 박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찰나, 별안간 굉음이 울렸다. 얼마나 요란한지 땅이 다 울려 얌전히 놓여 있던 머그컵이 덜그럭 거릴 정도였다. 왕이보는 순간 그 짧은 새에 자신이 꿈을 꿨나 싶어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나 이 순간은 현실이 맞다는 걸 친절히 일러주려는 지 거대한 팝콘 터지는 소리는 한 번 더 온몸을 때렸다.
놀란 왕이보는 어지러이 놓인 의자들을 아무렇게나 밀어 제치고 서둘렀다. 전면이 유리인 통창 앞에 서자 깜깜한 거리에서 유일하게 환한 빛을 밝히고 있는 건 꽃가게 였다.
 
 
[Magical Flower]
길쭉한 빌딩들 틈에 퍼즐을 끼워 넣은 듯 몸을 구기고 자리잡은 1층짜리 꽃집. 고동색의 낮은 지붕 위로 사시사철 푸른 덩굴잎이 둘러져 있어 가게 이름처럼 정말 마법같은 곳이었다. 한겨울에는 함박눈이 사흘을 펑펑 내려 온 도시가 눈에 뒤덮여도 지붕 위 덩굴 만큼은 물 먹은 듯 영롱한 초록빛을 발했다.
왕이보는 이 꽃가게에 일주일에 두번씩 꼭 방문해 작은 화분을 사는 습관이 생겼다. 덕분에 화분이 쌓이고 쌓인 네모난 사무실은 금세 초록으로 얼룩졌다. 유독 그 꽃집에서 왕이보가 사오는 녀석들만 지나치게 쑥쑥 자라는 탓에 그의 자리는 늘어진 식물들로 문전성시였다. 처음에는 신기하다 웃던 직원들도 이제는 사무실을 정글로 만들 셈이냐며 질타를 했다. 식물에 관심 많은 몇은 자기가 키우면 물을 주든 안 주든 죽던데 비결이 뭐냐고 넌지시 묻기도 했지만, 왕이보도 딱히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쪽은 오히려 물을 주든 안 주든 마치 식물들이 양분을 찾아 먹는 것처럼 알아서 자랐으니까.
아무튼 왕이보가 그 꽃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린 이유는 꽃이 아니라 사장님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려 출근하던 어느 아침, 병아리 같은 샛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길가에 놓인 작은 화단에 물을 주는 남자의 모습에 눈길이 닿았다. 사람 두명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길목인지라 브레이크를 잡아야 하는데 순간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도 까먹었다. 하마터면 자전거로 그 사람을 들이박을 뻔 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등 뒤에서 와장창 볼 성 사납게 넘어지자 놀란 남자는 물뿌리개를 든 채로 왕이보를 돌아봤다. 널부러진 왕이보의 둥근 머리 꼭지 위로 졸졸졸 차가운 물이 가랑비처럼 쏟아졌다. 아연실색한 남자가 서둘러 주저 앉으며 왕이보의 머리며 어깨를 툭툭 털어주고 연신 사과를 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왕이보는 코 앞의 단정한 이목구비를 훑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꽃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라 그런가 나비나 벌이 좋아할 것 같은 달큰한 향기가 났다. 괜찮다고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는 마음에 지진이 난 걸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지 벌벌 떨렸다.
'정말 괜찮아요?'
'네, 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물끄러미 왕이보를 응시하던 남자는 빙긋 웃었다.
'어디 가던 길이에요? 옷이 다 젖었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출근길 이었습니다.'
'아, 출근. 잠깐 들어올래요? 내 옷이라도 줄게요.'
왕이보는 고개를 가로 젓고 손 끝으로 꽃가게 맞은 편의 빌딩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여기 코 앞이 회사니까. 회사에 샤워실도 있고…, 따뜻한 물도 콸콸….
눈 앞에 불쑥 내밀어진 남자의 가느다란 손을 잡고 일어나자 무릎 한 쪽은 천이 북 찢어져 있다. 그 틈으로 피가 줄줄 샜다.
'회사에 샤워시설이 있어요?'
'네….'
'나쁜 회사네.'
뒷짐을 진 채 얄궃게 웃는 남자를 보며 왕이보는 고개만 끄덕였다. 나쁜, 회사. 그 나쁜 회사의 대표가 저라는 건 구태여 말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조금 후회했다. 로맨스로 시작했으면 좋을 걸, 첫 인상을 코미디로 남겼다는 생각에.
그 남자가 꽃집 사장님이고, 이름이 '샤오잔'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세 번째 화분을 샀을 때였다. 매번 묵묵히 화분만 사가는 왕이보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 날을 기점으로 왕이보는 종종 새로운 화분을 구경하는 척 하며 조금씩 더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이따금 유난하게 자라 도무지 사무실에서 처치가 어려워진 놈들을 꽃가게에 다시 들고 가면 샤오잔은 더없이 기쁜 얼굴로 화분을 받아 미닫이 문 뒷편의 방으로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서는 뜻 모를 말을 했다.
'이보씨는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인가 봐요.'
연애도 한 번 해본 적 없건만, 도무지 자신의 어느 부분에서 사랑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샤오잔이 그리 말해주니 모르던 사랑이 많았나 싶어 왕이보는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지는 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 꽃가게의 아담한 창 위로 너울대는 주홍빛은 영 심상치 않다. 두 번의 폭발음과 고요한 새벽 거리. 불이 켜진 게 아니라 불이 난 것 같았다. 은은한 주홍빛이 아니라 시벌건 화마처럼 보인다. 왕이보는 설마하는 마음에 핸드폰만 손에 쥐고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짧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인데도 아주 멀게 느껴진다. 입술 새로 뚝뚝 끊기는 불안이 새어나왔다.
노크를 할 생각도 못하고 왕이보는 꽃가게의 문을 벌컥 밀었다. 회색 연기가 와글와글 시야를 덮친다. 기침을 하며 남자의 이름을 크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다급해진 왕이보는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소매에 코와 입을 묻고 밀도 높은 회색 구름의 틈을 헤치고 나아갔다. 몇 평 되지도 않는 공간인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안달이 난다. 쿵. 허리춤이 부딪혔으니 카운터에 다다른 게 분명했고 이 뒷편은 샤오잔이 매번 쏘옥 사라지던 미닫이 방이었다.
왕이보는 팔을 길게 뻗어 더듬거렸다. 손잡이를 찾아 왼쪽으로 밀어 내려니 얄팍한 천조가리 문인 주제에 꽤나 힘을 쓰며 버틴다. 결국 악다구니로 손잡이를 쥐어 뜯자 와락 열린 문 틈으로 하얀 빛이 번쩍였다. 실명될 것 같은 따가운 빛에 왕이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위로 찬란한 빛이 내내 쏟아지는데 뜨겁지는 않았다. 눈을 떠도 되는지 머뭇거리고 서 있자 몸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 처럼 순식간에 앞으로 튕겨 나가 억소리도 못 냈다.
붕 떠오른 몸은 바닥으로 사뿐히 내팽겨 쳐졌다. 놀라 눈을 크게 뜨면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가지런한 발이 보였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휙휙 주변을 돌아보면 미닫이 뒷편의 공간이라기에는 아주 크고 따스한 방이었다. 멋들어진 벽난로는 연신 나무를 태우고 있다. 기다란 나무 책상 위로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 플라스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창 밖은 빌딩의 측면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어야 하는데 전혀 다른 세상인 것 처럼 짙은 밤하늘 가득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기이한 적막 속에 고개를 들자 여느때처럼 말간 낯의 꽃집 사장님이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든 채 왕이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언제나 자리하고 있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 처음 보는 굳은 표정에 왕이보는 움칠거리며 일어났다. 어두운 밤색의 눈동자는 벽난로의 불 때문인지 얼핏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날선 무심함에 왕이보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는, 불이 난 줄 알고."
"어떻게 알았어요?"
"갑자기 폭발음이…."
"아? 그게 들렸어요?"
의아하게 묻는 목소리에 왕이보는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히 들리지요? 바로 앞이 저희 사무실인데, 그정도의 폭발음이라면 당연히 들리겠지요? 이제 보니 샤오잔의 뺨과 이마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에 반해 이 공간만큼은 깨끗하고 포근했다. 그게 들렸을리가 없는데……. 칫, 결계가 허술해졌나? 샤오잔이 중얼거리는 말을 죄 들었지만 왕이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별 일이 없었다면 다행이고, 그보다는 혼비백산 해 들이닥친 자신의 모습을 그가 다 봤을 거라 생각하니 뒤늦게 뺨이 뜨거웠다. 기실 누구라도 꽃가게를 살피러 왔을 테지만 왕이보에게는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웅덩이가 있어 괜시리 찔렸다. 무엇보다 급한 마음에 가장 중요한 신고조차 하지 않고 무턱대고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왕이보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샤오잔이 더 캐묻기 전에 돌아가는 게 나을 성 싶었다.
그러나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샤오잔은 왕이보가 물러나자 번뜩이며 달려 들었다. 두 사람이 우당탕 요란하게 넘어짐과 동시에 한번 더 폭발이 일었고, 얼결에 남자의 품에 안긴 왕이보도 다급히 그의 허리를 세게 껴안으며 몸을 굴렸다. 번쩍번쩍. 발광하는 빛 속에서 왕이보는 샤오잔이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그를 자신의 품 안으로 숨겼다.
여파 탓인지 천장에서는 부슬부슬 흙먼지가 비처럼 내렸다. 샤오잔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진동이 잦아들고 빛은 사그라 들었음에도 왕이보는 여전히 덩굴처럼 샤오잔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차피 천장이 무너졌으면 이리 가려줘도 나란히 비명횡사 할 건데 뭘. 샤오잔은 낑낑대며 남자의 등허리를 툭툭 쳤다.
"나 숨 막혀요."
"……우리 살았어요?"
응? 당연히 살아 있지 그럼. 이건 진짜 폭발이 아니고 따지자면 마법 실험의 실패로 일어난 가짜 폭발이었다. 그러니까 실험을 직접 행하는 마법사에게는 약간의 타격이 있어도 마력이 전혀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샤오잔은 결국 작게 웃었다. 희한한 남자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뒤집어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니. 조금 떨고 있는 왕이보의 어깨를 다독일수록 억센 힘이 풀리고 거칠었던 숨소리도 차분해졌다. 그제야 멋쩍게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따라 샤오잔도 반만 일어나 앉았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허공에 손짓하자 부옇게 산재하던 먼지들은 부름을 받은 것처럼 샤오잔의 손 끝으로 모여 작은 공이 된다.
본 적 없는 광경에 왕이보의 입술은 공처럼 둥그렇게 벌어졌다. 남자의 순수한 감탄에 샤오잔은 간만에 즐거워졌다. 마법사라는 걸 들킨 건 그다지 큰 문제도 아니었다. 기억을 지우면 그만이니까.
멍하니 앉아 있는 왕이보를 두고 샤오잔이 휘파람을 불자 커텐으로 가려져 있던 너머의 공간에서 무언가 폴짝 폴짝 뛰어 나왔다. 족히 1m가 넘는 높이를 겅중겅중 튀어 오르며 다가오는 것 조차 왕이보는 난생 처음 보는 작은 털짐승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녀석은 샤오잔의 손가락 하나를 가득 끌어안고 매달렸다. 체구는 쥐 만한 데 생긴 건 꼭 원숭이와 닮았다. 오동통한 꼬리는 너구리의 혼종인가 싶고 얼굴의 반만한 커다란 눈망울은 툭 치면 울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왕이보가 홀린 듯 손을 뻗자 녀석은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했다.
"부시!"
샤오잔이 작게 호통을 치자 '부시'라 불린 작은 동물은 금세 입을 다물고도 기분이 나쁘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샤오잔의 손바닥 위에서 발을 쿵쿵 구르고 앉아 왕이보를 빤히 노려본다.
싫다는 데 억지로 만지고 싶지는 않았다. 작고 보드라워 보이는 동물이 아니라도 왕이보의 머릿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질문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는 사이 부시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샤오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뭘요?"
"기억을 지울 지 아니면 내 밑으로 들어올지."
그걸 왜 선택해야 하느냐고 되물으려는 데 벼락같이 낯선 목소리가 틈을 파고 들었다.
"샤오잔 너 얘한테 들켰어?!"
으악! 왕이보는 이번에야 말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오잔과 부시는 서로만 노려보며 대치한다.
"결계가 허술해졌나 봐. 폭발음을 듣고 달려왔다는 데 어떡해 그럼?"
샤오잔이 툴툴대자 부시는 그 짧은 다리로 벌떡 일어나 삿대질까지 했다.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실험 전에는 항상 결계부터 살펴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네가 애야? 너도 이제는 엄연한 마법사야!"
마법사야! 법사야…! 마, 법사? 잠깐만요. 마법사요? 지금 마법사가 있을 수 있나? 2022년이라면 차라리 우주에서 지구를 침공하러 온 외계인이 더 그럴 듯 하지 않나? 왕이보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바보같은 얼굴로 연신 투닥거리는 샤오잔과 부시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서로가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해 날이 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탓에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남자의 손목을 조심스레 붙들었고, 그는 왕이보를 돌아봤다. 핏기가 가신 샤오잔의 하얀 얼굴은 척 보기에도 피곤해보여 두툼한 이불 속에 파묻어주고 싶었다.
"사장님 그러니까…."
"……."
"……."
"호그와트에서 온 건가요?"
"뭐라고요?"
"우핫!"
우하핫. 부시는 샤오잔의 손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끼룩끼룩 웃었다.
아닌가? 그치만 당장 왕이보가 이 모든 현실을 이해하려면 끼워 맞출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다. 10년 간 학창시절을 꼬박 갈아 바친 마법영화. 광적으로 좋아했던 건 아닌데 나이를 먹고도 고된 날에는 이따금 생각나기도 했다. 마법이라는 건 현실을 잊게 해줄만큼 낭만적이니까. 작금의 영화나 드라마는 마법사와의 사랑 보다는 우주 외계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삼았지만 왕이보는 외계인이 무섭고 깨름칙했다. 하지만 마법은 다르지. 당장 눈 앞의 마법사를 보라. 마법처럼 낭만적인 얼굴이었다.
"이보씨."
"네."
"안타깝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화가 그 영화거든요."
"왜요…?"
"글쎄. 경찰은 추리물 안 보고 의사는 메디컬물 안 보고. 마법사도 마법물 안 본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아주 명료한 설명이었다. 왕이보 역시 스타트업을 꿈 꿀 때는 그와 관련된 모든 컨텐츠를 빠짐없이 들여다 봤으면서 막상 회사를 차린 뒤로는 거들떠도 안 보니까.  
왕이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샤오잔은 아직도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 본다. 속눈썹의 그림자가 기다랗게 그늘졌다. 샤오잔은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나긋히 물었고, 왕이보는 못 들은 척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다시 한번 꾹 잡았다.
땀이 벤 손바닥은 축축하지만 뿌리칠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샤오잔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남자를 쳐다봤다.
"아무튼 이보씨는 기억을 지우는 게 좋겠어요."
"다른 선택지도 있잖아요."
"마법에 대한 기억을 갖고 사는 게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오늘 밤의 기억만 사라지는 건가요?"
"어……."
"샤오잔은 그렇게 섬세한 마법은 못 걸어."
부시가 말을 툭 뱉으며 끼어들었다. 얘는 좀 미숙한 마법사라 네 기억을 지운다고 하면…. 흠. 아마 근 일주일의 기억은 통으로 날아갈걸?
그 말에 왕이보는 완전 흙빛이 되었다. 일주일이나? 안되는데요. 계약사와의 프레젠테이션이 당장 다음주였다. 자료를 만들고 이제야 발표 스크립트를 달달달 외웠는데 그 기억까지 몽땅 지워진다고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왕이보가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샤오잔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 남자, 아까 마법을 부릴 때도 저런 식으로 손짓을 했었다. 왕이보는 다급히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면서 틈마다 단단히 엮어 깎지를 꼈다. 그리고 외쳤다.
밑으로 들어갈게요!
아니, 이보씨.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아니…, 진짜? 시키는 거 다 할거예요?
심드렁하던 샤오잔은 반짝 눈을 빛냈다. 왕이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을 가늠하려는 지 샤오잔은 눈을 갸름히 접었다가 이내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럼 우리 잠깐 나갈까요?
"어디를요?"
"마법사가 뭘 하는지 알아야 이보씨도 조금 수월하지 않겠어요?"
부시는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샤오잔은 빗자루를 챙겨 들고 멀뚱히 앉아있는 왕이보에게 턱짓을 했다. 뭐해? 일어나요. 나가게.
샤오잔은 뒷문으로 향했다. 삐걱대는 나무문을 밀어내자 역시나 기시감이 느껴졌던 창 밖의 밤하늘 처럼 이 도시에서는 단연코 볼 수 없는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나부낀다. 왕이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로소 앞서 걸어가는 사근한 남자가 마법사라는 걸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샤오잔은 오솔길 끝 유일하게 꽃이 피어있지 않은 둥근 자리에 섰다.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툭 놓자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얌전히 누워 둥실거린다. 그 위에 앉은 샤오잔은 꽃구경을 하느라 한참 뒤처진 왕이보를 기다렸다.
이상하다. 꽃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네.
"쟤 말이야."
"엉."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꽃을 유독 좋아하는 건가?"
마법사의 속삭임에 부시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콱 그냥 이 재수없는 마법사의 귀를 깨물고 싶다. 낯 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 딱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샤오잔은 어깨에 앉은 부시에게 뺨을 부비며 채근했다. 내가 그동안 착각한거야? 어?
"하아…. 너를 좋아해서 꽃을 좋아하게 된 걸 수도 있지."
역시 그렇지? 마법사는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금세 뛰어온 왕이보는 빗자루에 탄 남자를 어색하게 보기만 했다. 그는 무심한 어조로 앞에 탈 건지 뒤에 탈 건지 고르란다.
"고소공포증은 없죠? 있어도 어쩔 수 없고."
고소공포증은 없는데 앞에 타도 이상하고 뒤에 타도 그림이 이상했다. 앞에 타면 샤오잔이 뒤에서 끌어 안을거고 뒤에 타면 왕이보가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아야 했는데 어느 쪽이 덜 떨릴지 고민 했더니 마법사는 그의 침묵을 오해한 듯 했다.
"아, 혹시 불편할까봐?"
"뭐가요?"
"그거."
그의 눈길이 스윽 내려가 닿은 곳은 왕이보의 하반신이었다. 왜 남의 가랑이 사이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거지? 왕이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살그머니 양 손을 모아 가리자 샤오잔은 눈을 찡긋 거린다.
"불편한거 아니면 얼른 타요. 해 뜨면 날아가기 곤란하거든요."
왕이보는 그의 뒤로 다가가 가랑이 사이에 빗자루를 끼워 넣었고, 곧장 마법사의 알 수 없는 말과 시선을 이해했다. 진짜 더럽게 불편했다. 마법사… 그러니까 꽃집 사장님. 이 사람도 남자인 게 분명한데 빗자루 이거 안 불편한가? 왕이보는 낑낑대며 요리조리 자리를 잡아보려 했지만 어떻게 앉아도 거기가 눌리는 느낌은 생경했다.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자 마법사가 휙 뒤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묻는다.
"떼줄까요?"
"설마."
"어. 그거 잠깐 빗자루 탈 때만 떼줄까요? 이따 다시 붙여줄게요."
그치만 사장님… 섬세한 마법은 못 건다고 했잖아요. 떼는 것만 가능하고 붙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왕이보는 차마 묻지도 못하고 그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샤오잔을 째려봤다. 믿어도 되나 싶어 흘긋 부시의 눈치를 살피자 녀석은 짧디 짧은 양 팔로 매우 강력하게 엑스를 그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덜컥 마법사의 제안을 받아 들였으면 함께 나고 자란 분신을 영영 잃을 뻔 했다.
"…괜찮아요. 익숙해지겠죠."
"그래요. 그럼."
아 생각보다 작은가보네. 흠. 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마법사인지라 왕이보는 재빨리 작지 않다고 반박하려 했지만 그 순간 빗자루는 로켓처럼 하늘로 날아 올랐다. 허둥지둥 샤오잔의 허리를 양껏 끌어안고 그의 등 위로 얼굴을 묻었다. 높이 올라갈 수록 머리칼은 이리 저리 부는 바람에 멋대로 날뛰었다. 먹먹한 습기가 뺨을 간질여 살풋 눈을 뜨자 세상은 온통 새하얗기만 하다. 우뚝 멈춰 선 빗자루는 뱅글 돌며 방향을 잡더니 이번엔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순식간에 머리 위로는 짙은 밤하늘이, 발 아래는 불꺼진 도시가 나타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폭신해보이는 구름 하나가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멀미도 안 난다. 환한 달처럼 고아하게 생긴 마법사는 하늘 위 폭주족이나 다름 없었다. 자꾸만 저 너머로 흩어지려는 의식을 끈질기게 부여 잡으며 왕이보는 샤오잔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바짝 붙어 앉았다.
빗자루가 크게 출렁인다. 생경한 온기에 당황한 샤오잔은 빗자루를 다시 한번 고쳐 잡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거의 다 왔어요. 저 앞에."
마법사의 손 끝은 복작복작. 하늘에서 보니 노루궁뎅이 버섯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고. 겨울이 지나간 자리마다 하이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나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공원이었다.
땅에 발을 딛고서야 왕이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은 온통 어두컴컴하다. 사각사각 풀벌레의 기척이나 잠들지 않는 새의 울음이 들려왔다. 겹겹이 자란 웅대한 나무들은 스산하기 까지 해 왕이보는 곁에 선 마법사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샤오잔은 손가락으로 딱소리를 냈다. 그러자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의 머리 틈에서 영롱한 빛들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꼬마전구를 달아둔 것 처럼. 봄밤의 선물처럼.
갑자기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 눈을 뜨면 사무실 책상 위에 침을 흘리며 엎드려 있을 수도 있다. 꿈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건 참 고약했다. 마음 둔 이와 가까워 질 방법 따위야 모르니 조악한 상상으로 겨우 만들어낸 게 그 사람은 마법사고 오직 나만이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왕이보는 홀로 헛헛하게 웃었다.
아득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와 꽃나무 아래 떨어져 있던 희고 발그레한 꽃잎들이 춤을 추며 날아 든다. 왕이보의 시선은 꽃잎을 따라 이동했고 그 끝에 닿은 건 눈을 감은 채 말갛게 웃고 있는 마법사의 얼굴이었다.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이토록 행복해 보이는 건 처음이다. 숨을 크게 들이쉰 샤오잔이 천천히 눈을 뜬다. 느릿하게 올라간 눈꺼풀 속의 눈동자는 충만한 금빛으로 넘실거렸다.
이제 왕이보는 그가 사실은 외계인이라 해도 좋으니 그저 이 순간만큼은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사장님 눈이…."
"응?"
왕이보를 돌아본 샤오잔이 두어번 눈을 깜빡인다. 그는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짧은 탄성을 냈다.
"아. 내 눈 때문에 그래요?"
"……."
"별 건 아니고. 마력 때문에, 마력이 넘치면 금빛으로 변해요. 뭐… 이상해요?"
"아니…, 예뻐요."
"응?"
예뻐요……. 저도 모르게 진심이 줄줄 샌다. 당황한 왕이보는 손등으로 거칠게 코를 문대며 딴청을 피웠다. 보통의 사람보다 조금 더 청력이 발달한 마법사는 그의 말을 전부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체를 하며 장난스럽게 재차 물으려 했고, 가만히 이 요상한 기류를 지켜보던 부시는 날 새겠다며 고함을 질렀다.
와하하 소리 내어 웃은 샤오잔은 작은 복주머니 세 개를 만들어 하나를 왕이보에게 건넸다.
"이보씨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요. 빛이 보이는 꽃나무 아래서 복주머니 입구를 살짝 열기만 하세요. 그럼 작은 유리병들이 주머니 속으로 알아서 모일 거예요. 주의할 점은 주머니를 너무 활짝 열면 안돼요. 이해했나요? "
조곤한 그의 설명은 알아 들었는데 마지막 한마디가 걸린다. 왕이보는 왼쪽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주머니를 활짝 열면 안되는데요?
"재수없으면 유리병 대신 네가 들어갈 수도 있어."
어느새 주머니를 가방처럼 등에 매고 앉은 부시가 대답을 가로챘다. 뒷 발로 자신의 귓가를 탈탈탈 긁더니 왕이보의 어깨 위로 단번에 올라 앉아 속삭였다.
"근데 샤오잔이 꺼내주지 못 할 수도 있으니까…. 하여튼 처신 잘 해."
부시는 진심어린 충고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샤오잔 역시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하면 다시 이 곳에서 만나자며 왕이보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혼자 남은 왕이보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끝이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짙게 드리우기는 했으나 나무에 걸린 비현실적인 오색빛 때문인지 두렵지는 않았다.
정말 주머니의 입구를 열기만 하면 병이 모여들까, 그런 의심이 무색하게도 복주머니는 그 입구를 아주 조금만 열어도 진공청소기처럼 위융위융 무서운 소리를 내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들었다. 그제야 이걸 활짝 열면 사람이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식은땀이 흐른다.
열매처럼 똑 떨어져 허공으로 흔들흔들 내려오는 유리병 속에는 찰랑이는 액체들이 담겨 있었다. 색은 제각기 달랐는데 어떤 건 그저 투명하고 어떤 건 탐이 날 정도로 반짝이는 보랏빛이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남쪽의 하늘빛, 마법사의 눈처럼 황홀한 금빛, 짐승의 보드라운 털과 같은 회빛, 머지않은 여름의 짙은 초록빛. 고운 빛깔에 감탄하느라 왕이보는 피곤도 느끼지 못했다.
새들이 지저귀고 아침은 지난한 밤 따위 모두 잊어버린 듯 빠르게 다가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오자 흔들거리며 빛나던 나무들은 하나 둘 빛을 꺼트리고 깊은 잠에 빠진 척을 했다. 빛이 꺼진 나무 아래서는 주머니를 열어도 고요하기만 하다. 왕이보는 주머니 입구를 꽉 묶고 걸어온 만큼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마법사와 부시는 진작에 모든 유리병을 모은건지 풀 위에 반쯤 누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박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본 샤오잔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민다. 수백개의 유리병이 모였음에도 작고 가벼운 마법의 복주머니를 건네주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뻐했다.
"이보씨, 굉장히 성실하네요."
칭찬에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왕이보는 어깨를 으쓱이고 애써 입술을 앙 물었다.
"사실 이보씨가 일을 제대로 못하면 기억을 지우려고 했거든요."
"네?"
"근데 괜한 걱정이었네. 어때? 괜찮지?"
복주머니 속을 들여다 보던 부시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니, 처음부터 왕이보의 의견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약간의 허탈함과 괜한 서러움이 밀려 들었다. 왕이보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입술은 누군가 자크를 꼭꼭 채운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법사를 쳐다보자 그는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열렬히 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럼 이보씨, 이 세계의 착한 직장인은 이만 자야 할 시간이네요.
잘 자요.
마법의 인사, 까무룩 눈이 감긴다.
 
 
……나.
…어나.
"일어나! 왕이보!"
아? 어깨를 마구 흔들어 대는 통에 눈을 안 뜰 수가 없다. 왕이보는 뻑뻑한 눈을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입이 찢어져라 전방에 긴 하품을 내뿜었다. 곁에는 만만치않게 피곤한 몰골의 황위안이 삐딱하게 서있다.
"너 또 회사에서 잤어?"
"어……."
"건강 좀 챙겨. 대표가 골로 가면 직원들은 어쩌라고?"
"…나를 걱정하는 거야 너를 걱정하는 거야?"
당연히 네 밑에서 일하는 나를 걱정하는 거지. 황위안은 책상을 탕 내리쳤다. 진짜 매몰차기 짝이 없다. 알았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보는 팔을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간밤에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면 온 몸이 뻐근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상쾌하고 개운했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 위에서 아무 걱정 없이 푹 잠을 청한 것 처럼.
조금 까끌해진 턱을 훑으며 생각한다. 뭔가 잊은 것 같아. 꿈을 꿨나? 왕이보는 하나 둘 출근하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리가 훤하게 내다 보이는 통창 앞으로 다가갔다. 건너편에는 고즈넉한 꽃가게가 활짝 문을 열고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꽃집 사장님은 개나리처럼 노란 셔츠에 남색의 슬렉스를 입고 여느 때와 같이 작은 화단 앞을 서성이며 물을 주고 있었다. 아, 뭔가 떠오르려고 한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데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춤추듯 움직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왕이보의 손 끝이 악보를 그리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창에 이마를 쿵 기대고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고 있자 등 뒤에서 황위안이 말을 걸어왔다.
"아 맞다. 왕대표."
"어."
"꽃집 사장님이 너한테 전해 주라고 하던데."
뭘?! 왕이보는 황급히 돌아봤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뛴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건 흐드러지게 핀 샛노란색의 꽃다발이었다. 화분이 아니라 꽃다발? 건네주는 황위안도 어색함에 쭈뼛거리고 왕이보도 적잖이 당황스럽다. 다른 말은 없었냐니까 그냥 이보씨에게 전달만 해달라고 했단다. 왕이보는 가뿐 마음을 애써 다잡고 한아름 꽃다발을 끌어 안았다.
샛노란 꽃, 샛노란 셔츠를 입은 꽃집 사장님, 그리고 샛노란 보름달처럼 커다란 금빛의 눈동자…….
해일처럼 밀려드는 밤의 기억.
왕이보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건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모두 현실이야. 이제 왕이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비밀스러운 존재를 아는 이가 된 것이다.
 
‌

***


꽃다발을 보내고 부시와 내기를 했었다. 오늘 밤에 이보씨가 올까 안올까? 부시는 녀석이 오지 않을거라 했다. 일꾼으로 부려 먹겠다는 데 지 발로 오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고. 샤오잔은 부시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그가 올거라고 했다. 엥? 부시는 왜냐고 반문하려던 걸 꾹 삼켰다. 올려다 본 마법사의 낯짝이 아주 반짝 빛이 나는걸 보아하니 또 속 긁는 소리를 할 게 분명했으니까.
샤오잔은 확신에 차 묻는다. 뭐 걸래? 내기를 하려면 역시 상품을 걸어야지. 부시와 마법사는 자신이 이기면 서로에게 뭘 요구할지 골똘히 생각하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기는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물거품이 되었다. 짤랑이며 열린 입구에 왕이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밤'에 온다 안 온다로 시작된 내기였는데 남자는 그걸 못 참고 해가 환히 뜬 대낮부터 샤오잔에게 달려왔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듯 상기된 뺨을 감추지 않고, 길목마다 노란 꽃잎을 흩날리며. 샤오잔은 답지 않게 말을 잃었다.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르는 남자의 둥그런 정수리와 너른 어깨, 그 위에 살포시 자리잡고 앉은 꽃잎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마법을 건 것 처럼.
호흡을 가다듬고 왕이보는 풀린 얼굴로 말갛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노란꽃이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샤오잔의 노란 셔츠를 뚫어져라 보면서 노란색이 참 예쁘다고 했다. 아, 네. 샤오잔은 그 시선 닿은 가슴팍이 홧홧해 흠흠 헛기침을 하며 할 일이 있는 척 미닫이 문 뒤로 사라졌다.
거리의 소음만이 비집고 들어오는 공간에 부시와 단 둘이 남은 왕이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그러자 어쩐지 심통이 잔뜩 난 부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너는 밸도 없냐?!
 
 
마법사를 도와 하는 일이라곤 별 게 아니었다. 이따금 빗자루를 타고 새벽 하늘을 날아 흐드러지게 개화한 꽃 틈에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모으고 공병을 다시 틈마다 심고. 마법사의 방으로 돌아와 그가 늦은 야식을 만드는 사이 왕이보와 부시는 부지런히 유리병을 색 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샤오잔이 두 사람 몫의 야식을 준비하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보글보글. 스튜가 아주 맛깔나게 끓고 있다. 꽃이 만개하는 봄이래도 동이 트기 전에는 쌀쌀하니 칼칼하고 뜨끈한 걸 먹어줘야 했다. 샤오잔은 흘긋 뒤를 돌아봤다. 왕이보는 어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앳된 얼굴이었다. 부시와 투닥거린다 싶더니 아무래도 졌나 보다. 눈꼬리는 휙 치켜 올라갔는데 꾹 다문 입술이 비죽 나왔다. 직원을 몇이나 둔 작은 회사의 대표라고 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면 영 미덥지 않다.  
식탁 위 뜨거운 스튜는 김이 다 식기도 전에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남자의 하얀 뺨이 햄스터처럼 빵빵하게 늘어나는 걸 보자니 웃음이 난다.
마법사의 눈길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 그냥 눈 앞에 보이니까 보는 거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분명 그러했고. 그런데 근래에는 유독 왕이보의 얼굴을 뭉그러니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집중하면 새의 부리처럼 꾸물꾸물 앞으로 마중 나오는 남자의 입술을 샤오잔은 괜히 집게 손가락으로 콱 잡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충동이 손 끝을 간지럽힐 때마다 마법사는 눈을 꾹 감았다. 모르겠다. 쟤는 나를 좋아해서 시선을 떼지 못 하는 거고, 그럼 나도 쟤를 좋아하나? 흠. 한없이 생각의 골이 깊어질 때면 부시가 귀신같이 훼방을 놓는 탓에 아직도 그럴싸한 결론은 내지 못했다.
샤오잔은 말린 꽃잎 위에 뜨거운 물을 졸졸졸 부었다. 투명한 물이 둥근 찻잔에 고이고 고이면서 서서히 다정한 분홍빛으로 물든다. 피곤한지 왕이보는 눈이 반쯤 감겼다. 그 앞에 찻잔을 밀어주고 식탁을 툭툭 두번 두들기자 언제 졸았냐는 듯 눈을 최대한 크게 떠본다.
"마셔요. 좀 덜 피곤할 테니까."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며 마른 세수를 한 왕이보는 후루룩 뜨거운 차를 한모금 마셨다. 그가 직접 우려주는 차를 마시고 나면 피곤이 싹 날아간 듯 몸이 개운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마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왕이보는 시선을 비스듬히 틀어 창 밖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둥근 보석처럼 커다란 별들이 밤하늘 가득 총총히 박혀있었다. 하얀 구름은 밤하늘 가득 우유를 뿌려둔 것처럼 기다랗게 그려져 있다. 마법사의 방에서 보는 밤하늘은 마치 누군가 물감을 곱게 개어 그려둔 것 같았다. 왕이보는 찻잔에 입술을 대고 나지막히 물었다.
"밤하늘, 마법으로 만든거예요?"
"아."
짙은 밤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든다. 드디어 왕이보에게서 시선을 거둔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보는 마치 그림 같다고 했고, 샤오잔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림이 맞다고 답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고흐?"
"응. 내가 고흐를 좋아하거든요."
샤오잔은 고흐의 다정한 색채에서 세계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정작 당신에게는 다정하지 않았던 이 세상을 사랑하며 얼마나 깊은 괴로움을 견뎌야 했을까,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과거로 타임슬립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샤오잔은 가장 먼저 고흐를 만나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임슬립 같은 건 과학이 할 일이지 마법의 몫이 아니었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후로 샤오잔이 최초로 만든 것은 1889년의 밤하늘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아로새긴 별이 빛나는 밤하늘. 그렇게 고흐의 별은 마법사의 별이 되었다.
그가 들려주는 마법의 이야기는 매번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왕이보는 여지없이 감탄했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마법사는 어떻게 탄생하는 걸까? 모든 존재에 반드시 대단한 의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비현실적인 존재가 현실을 살고 있다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 테다. 언젠가 왜 꽃가게를 열었냐는 질문에 그는 본인이 선택한 것이 꽃이라고 답했다. 마법사도 생계 걱정을 하느냐고 묻자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거하게 웃으며 생계 걱정을 하는 마법사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했다. '당장 손짓 몇 번이면 이보씨 머리 위로 돈벼락을 내려줄 수도 있는 걸요.'
달 뜬 밤만으로는 부족했다. 마법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와 조금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면 금빛으로 넘실거리던 황홀한 눈동자가 떠올라 몇 번이고 그 앞에서 넋을 잃었다. 그런 때마다 마법사는 왕이보의 둥근 코 끝을 살짝 잡으며 정신 차리라고 장난스레 웃었다.
그런 당신의 웃음이 다시 한번 나를 높디 높은 밤하늘에 올려두는 줄도 모르고.
늦은 새벽의 정각을 알리는 시계가 울리자 샤오잔이 먼저 일어났다. 왕이보의 찻잔에는 아직도 차가 반이나 남아있었다. 피곤을 덜어주기 위해 특별한 마법의 잎으로 우려낸 거라 꼭 다 마셔야 효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뭐, 내일은 주말이고 출근을 안 한다고 했으니 괜찮으려나. 가만 뒀다가는 내내 망부석처럼 앉아 있을 남자인지라 샤오잔은 그의 찻잔을 치우려 했다. 그런데 찻잔에 닿기도 전에 한 뼘이나 커다란 손에 덥썩 잡혔다. 식탁에 몸을 반쯤 기울인 어정쩡한 자세로 왕이보와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당황한 샤오잔은 슬쩍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왕이보는 되려 잡은 손을 힘주어 잡아 당겼다. 벽난로의 불은 꺼진지 오래인데 뺨이 뜨겁다.
샤오잔은 고개를 푹 숙였고 왕이보는 입술을 달싹였다. 막상 그를 잡아 채고나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탓이다. 마법사의 귀는 정적이 길어질 수록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코 앞에서 보는 왕이보 역시 목이 바짝 탔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데 강렬한 시선 하나가 느껴진다. 이글이글 따가운 시선은 장식품같은 털짐승이었다. 부시는 왕이보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젤리같은 손으로 마법사의 뺨과 왕이보의 뺨을 꾹꾹 밀어내며 끼어들었다.  
흠흠. 겨우 벗어난 샤오잔은 팔짱을 끼고 돌아선다. 부시가 끼어 들었으니 이제 곧 미닫이 문이 열리고 축객령이 내려질 테다. 왕이보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매만지는 하얀 손가락을 아쉽게 바라봤다.
그러나 미적거리며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불퉁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부시는 꽃집의 입구가 아니라 오솔길로 이어지는 뒷문으로 향했다. 별안간 스르륵 열리는 뒷문에 샤오잔은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째려봤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눈을 부라려도 부시는 어깨만 으쓱이고 코웃음만 쳤다. 허 참, 웃긴다. 쟤랑 손 좀 잡았다고 발그레하게 물들었던 놈은 어디갔대?
마법사와 부시가 허공에서 소리없는 다툼을 하는 사이,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는 왕이보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화살처럼 열린 문 밖으로 달음박질을 한다. 어? 어어. 혼자 가면 안되는데. 마법세계에서 길잡이 없이 걸었다가는 영영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놀란 샤오잔이 왕이보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다급하게 쫓아 나갔다.
부시는 벽에 걸린 고리에 꼬리를 감고 감아 지붕까지 올라갔다.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들녘 위로 찬란한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고, 아닌 밤중에 술래잡기 하는 두 남자가 점점이 멀어졌다.
쯧. 홀로 남은 부시는 혀를 끌끌 차면서 샤오잔 이전의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마법사란 참 재미없는 족속들이다. 보통의 인간들이 수차례 사랑에 빠지고 수차례 이별을 겪는 동안에도 마법사는 오직 단 한번의 사랑, 영원을 바칠만큼 가치 있는 사랑을 바랐다. 말 그대로 그들은 사랑에 영원을 바친다. 영원을 사는 마법사가 하나뿐인 연인에게 약속하는 맹세란 그런 것이었다. 그대 떠나는 날, 그대 손을 잡으리.
유한한 삶을 사는 제 사랑의 손을 잡고 마법사는 마지막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빛으로 물든다. 억겁의 생을 살아온 부시는 아직도 그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두 개의 그림자는 달빛 아래 하나로 겹쳐진다.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보며 부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법사에게 사랑은 아주 고결한 낭만, 영원의 약속.
 
 
잡았다! 낭랑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뒷덜미를 잡힌 왕이보는 켁켁거리며 멈췄다. 헉헉. 샤오잔은 거친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법사가 된 이래로 두 다리로 뛰어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달렸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까마득했다. 갑자기 뛰쳐 나가면 어떡하냐고, 버럭 화를 내려고 했는데 호흡을 가다듬고 마주한 남자가 세상 환하게 웃고 있어서 샤오잔은 더 이상 타박할 수 없었다. 왕이보는 아주 즐거워 보였고, 웃는 낯짝에 침 못 뱉는다고 마법사는 별 수 없이 그에게 조금 걷자고 했다. 등 뒤의 오두막은 까마득했지만 돌아갈 때야 빗자루를 타면 그만이었다.
둥근 달과 둥근 별이 가득한 하늘은 어둡지 않다. 아름다운 쪽빛의 밤하늘 아래 사박사박 걷는 소리만 맴돌았다. 고요의 틈을 비집고 먼저 입을 연 건 왕이보였다. 사실은 궁금한 게 아주 많다고.
샤오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일이나 시켰지 정작 그에게 정확히 설명해 준 적은 없었다.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는 아니었지만 묻지 않는데 먼저 요란하게 떠들 주제도 아니었으니까.
뒷짐을 진 채 걷던 샤오잔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분명한 말을 듣고도 왕이보는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순수한 궁금증과 불순한 기대를 담아 마법사의 눈치를 살핀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내 손을 잡아야 보여서 그래요."
대답은 들었는데 묘하게 실망스럽다. 다른 뜻이 있어도 괜찮은데….
마법사의 손을 잡고 정면을 보자 들녘 끝에 높디 높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탑이 나타났다. 그건 여지껏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절경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거대한 기둥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따스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이 세계의 모든 빛.
샤오잔은 마주 잡은 남자의 손을 앞으로 이끌며 나아갔다.
"더 가까이 가서 봐요."
"그래도 돼요?"
"그럼. 여차하면 기억 지우지 뭐."
아 진짜. 내 기억은 내거예요. 투덜거렸지만 왕이보는 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을 것임을 안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살랑이는 바람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날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아주 깊은 곳까지 청명한 봄 밤의 공기가 마음 어딘가를 간지럽힌다. 왕이보는 샤오잔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봤다.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낮은 노랫소리가 흘러 나온다. 파랑새 같아. 손을 놓으면 언제든 저 너머로 사라질 파랑새. 성급히 마음을 고백하면 이 남자는 언제든 빗자루를 타고 다시는 닿지도 못 할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 테다. 환하던 왕이보의 얼굴 위로 금세 그늘이 죽죽 드리웠다.
"이보씨."
"……네."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얼까."
딱히. 왕이보는 본래 그런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남자였다. 먼 미래보다는 당장 내일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조금 더 즐거울지 고민하는 게 좋았다. 친구 녀석이 이런 걸 물었다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했을 건데, 좋아하는 사람이 물어오니 고심할 수 밖에 없다. 기왕이면 그의 정답을 맞추고 싶다.
"글쎄요…. 자본?"
"와, 재미없다."
이보씨 진짜 재미 없어요. 자본이라니. 이보씨가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물 여덟? 서른도 안됐는데 벌써 꿈도 희망도 없네. 샤오잔은 탄식하며 조곤조곤 가볍게 비난했다.
"자본이 아니라, 사랑이에요."
"사랑이요?"
"응."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마음이 덜컹인다. 왕이보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떨궜다. 사랑이라니, 지나치게 낭만적인 정답이었다. 정작 그 사랑에 빠진 왕이보는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는 말. 이런건 불공평하지 않나. 사랑에 깊게 빠진 이는 사랑에 대해 논할 수도 없다.
샤오잔은 눈에 띄게 침울해진 남자를 알았다. 그러나 키가 저만하고 어깨는 그보다 넓은 왕이보를 어린 애처럼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종말시계, 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있다. 그런 걸 딱히 믿지는 않아도 재작년에는 전세계가 떠들썩하게 종말시계에 주목했으니까. 처음으로 인류의 종말이 자정 100초 전에 진입했다면서. 이제 종말은 '분'단위가 아니라 '초'단위로 우리 앞에 바싹 다가왔다고 했다.
"사랑이 쌓일 수록 종말은 멀어지고, 반대로 사랑이 소멸되면 종말은 가까워져요. 마법사는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사람들 틈에서 바쁘게 사랑을 수집하는 거고요. 사랑의 소멸 지수를 매년 측정해서 공개하는 게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말시계'예요."
그런데 참, 쉽지 않네요. 샤오잔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3년 째 자정 100초 전에 머무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마법사는 정말 괴로워 보였다. 천지의 사랑을 박박 긁어 모아도 사랑이 생성되는 속도보다 소멸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작금의 시대는 사랑이 소멸되는 속도를 늦출 수 없다.
"병 속에 든 액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샤오잔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로 작은 유리병 하나가 생겨났다. 그는 다홍빛이 찰랑이는 병을 왕이보에게 살포시 건네며 말한다. 이건 꽃 틈에서 추출된 사랑이에요. 그리고 저 멀리, 샤오잔의 손 끝이 오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탑을 가리켰다. 왕이보는 그제야 그 눈부신 색채가 전부 사랑임을 알았다.
탑과 가까워 질 수록 불어오는 바람에는 고운 빛들이 반딧불이 처럼 섞였다. 사랑이 모이는 곳, 그렇다면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자리는 세상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왕이보는 하얀 밀빵처럼 부드러운 마법사의 손을 느끼며 설핏 웃었다.  
"이보씨. 무슨 생각해요? 안 믿겨요?"
"…꿀벌 같다는 생각."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멸종한다고 했으니 얼추 비슷하지 않나. 꿀벌은 꿀을 모으고, 마법사는 사랑을 모으고. 날아다니는 모양새도……. 그러나 샤오잔이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는지 그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손을 뻗은 마법사가 유리병을 빼앗으려 해 왕이보는 얼른 옆으로 빼돌렸다. 그와중에도 입꼬리는 기쁘게 올라갔다.
"전부 얘기해줘요. 더 알고 싶어."
"……길어질텐데."
"괜찮아요."
그게 당신의 이야기라면 이 밤이 지나고 몇 번의 밤이 지나는 동안 들어도 질리지 않을 테니까. 마디가 굵은 남자의 손가락은 틈 없이 가느다란 마법사의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었다. 실타래를 땋는 것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마법사와 남자의 손이 얽혀든다.
고백 같은 그의 말에 샤오잔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사락사락 내는 소음이 아주 크게 들려왔다. 결국 마법사는 이 밤이 새도록 세계의 종말과 마법,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사람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마법사가 사랑을 모으는 수단 또한 조금씩 다르다고. 어떤 이는 동물을, 어떤 이는 책을, 어떤 이는 보석을, 어떤 이는 꽃을. 사랑이 맺힐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도 상관없지만 그 중 샤오잔이 선택한 건 꽃이란다.
사랑. 그의 붉은 입술에서 쉼없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흘러 나온다. 사랑을 수집하는 마법사, 당신도 사랑을 해 본적 있을까. 열심히 종알거리다가도 아니 그런데 정말 꿀벌 같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며 뾰족해지는 남자의 눈매가 적잖이 사랑스러웠다.
왕이보는 언젠가 자신의 고백을 들은 마법사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감히 바라건대, 내 사랑만으로 당신의 눈동자가 고흐의 별보다 빛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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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가면 뭐하러 왔냐고 타박하던 샤오잔은 이제 점심은 먹었냐고 먼저 물어줬고, 이따금 주말에 꽃집을 방문하면 너무 자주 오는거 아니냐고 타박하면서도 그 곁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줬다. 마법이 궁금하다는 핑계를 대며 몇 번이나 그의 손을 잡았고, 빗자루를 타야 하니 어쩔 수 없다며 몇 번이나 그의 허리를 가득 끌어 안았다. 차를 마시면 졸음이 싹 달아나는 데도 일부러 졸려 죽겠는 척을 하며 마법사의 침대에서 잠든 적도 있다. 샤오잔의 표정은 어딘가 알쏭달쏭 했지만 왕이보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등 뒤에서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각자의 베개를 베고 털 끝도 닿지 않은 채 잠들었는데, 어느 샌가 마법사는 작은 머리통을 남자의 베개에 올려두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벽에 딱 붙은 왕이보는 감격하여 코 끝이 다 시큰거렸다. 샤오잔이 깨지 않도록 은밀하게 몸을 돌려 마주보고 눕는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덮고 있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벅차올라 괴롭기까지 했다. 한숨을 삼켜내며 문득 바라본 천장에는 꼬리를 걸고 대롱대롱 매달린 부시가 있었다. 녀석의 둥근 눈동자가 뱀처럼 가늘어진다. 얼핏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왕이보는 이대로 마법사의 시간 속에 천천히 스며들 요량이었다. 매 순간 완벽히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랫말 하나가 머릿 속을 맴맴 맴돌았다. 모두 끝나 버렸다 난 시작도 안해 봤는데…. 마법사는 불쑥 다음 주말에 무얼 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먼저 왕이보의 주말 일정을 확인한 건 처음인지라 들떴다. 망설이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다고 팽팽 논다고 답했더니 마법사는 만면에 미소를 틔우며 그럼 같이 유채꽃 축제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왕이보는 힘이 풀리는 무릎을 부여 잡으며 성급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뭘 입고 가지, 뭘 먹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아예 사방 천지가 노오랗게 물든 꽃밭에서 그에게 고백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실실 웃음이 샜다. 그러나 달콤한 꿈은 채 3분을 가지 못하고 와장창 깨졌다. 마법사가 여상하게 뱉은 말 때문에. 그는 어쩜 그리 무심한지 이보씨가 좋아하는 사람도 데려오라고 했다.
"유채꽃 예쁘잖아요. 아마 그 날은 날씨도 쾌청할 거예요. 데이트 하기 딱 좋은 날."
킥킥.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왕이보는 꽃이 핀 행운목에 매달려 있는 부시를 쳐다봤다.
킥킥. 이번에야 말로 부시는 진심으로 녀석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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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의 아이콘 오셨군. 황위안은 근래의 왕이보가 영 못마땅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좀비처럼 걸어다니는 데 정말 꼴사나웠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직원들이 걱정스레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불쌍한 눈으로 황위안을 멀거니 쳐다보는 게 아주 부담스러웠다. 그러니까 직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고 오직 황위안만이 도와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며칠 간 왕이보를 무시하고 잘 피했는데 결국 주말을 하루 앞두고 팔뚝이 잡혔다. 아침부터 등 뒤를 작정하고 따라 다니기에 단 둘이 남겨지는 상황만은 피하려고 했건만, 고작 믹스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어서 탕비실에 왔다가 덜컥. 팔뚝을 터질 듯이 잡고 있는 손등을 찰싹 내리쳐도 꿈쩍도 안한다. 그대로 종이컵을 들고 나가려는데 문이 쾅 닫히고 졸지에 왕대표 품에 갇힌 꼴이 되었다. 어 잠깐, 야 이보야. 이거 그림이 이상하다. 좀 비켜봐, 잠깐. 사색이 된 황위안은 횡설수설 회사에서는 절대 부르지 않는 그의 이름까지 친근하게 부르며 어르고 달랬다. 이새끼 가만 보니 눈이 살짝 맛이 갔다.
"도와줘."
"뭘."
"일단 도와주겠다고 해봐."
"……."
황위안은 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도와주겠다는 단호한 결의였다. 그러자 왕이보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손을 갈퀴처럼 만들고는 황위안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인다. 간지러움에 황위안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보도 만만치 않아 결국 먼저 지친 쪽은 황위안이었다. 뭔데, 아, 도와줄게, 그만, 그만, 아하하.
으흣…. 허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풀썩 쓰러진 황위안의 머리 맡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린다.
"나는 내일 너를 좋아, 아니 사랑하는 거야."
"…미쳤어? 아니 진짜 돌았냐?"
"미치고 돌기 직전이기는 해."
그를 내려다 보는 왕이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황위안은 머리 꼭지가 다 서늘해 제 손바닥으로 얼른 정수리를 가렸다. 도와줄거야 말거야? 왕이보는 기어코 쐐기를 박아야 겠는지 재촉했고, 황위안은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레이저에 대머리가 될까 걱정하며 힘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사실 아무도 안 데려갈 수도 있다. 왜 혼자 왔느냐고 물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샤오잔씨 당신이니까요, 밀어 붙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할까 고민을 안 한 것도 아닌데 겁이 났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상상은 언제나 최악으로 끝이 났다. 꿈에서는 고백을 들은 마법사가 하루 아침에 꽃집을 싹 정리하고 사라지기 까지 했다. 그리고 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한겨울에도 푸른 덩굴잎을 늘어트리던 꽃가게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심하고 친절한 마법사는 왕이보의 기억까지 말끔히 지워주고 사라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왕이보는 황위안에게 거지꼴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꽃집 사장님을 좋아하고 있음을 이실직고 했다. 화분을 사며 그 남자를 알게 됐는데 혼자 짝사랑하는 중이라고. 황위안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럼 축제에 그 사람과 가야지 왜 저를 괴롭히느냐고 성을 냈다. 왕이보는 중얼거렸고 황위안은 누가 들어도 썸을 타고 있는 게 분명한 상황에 자신의 이마만 퍽퍽 쳤다. 야 이 등신새끼야. 그쪽도 너한테 마음이 있네. 근데 나를 데려간다고? 사단이 날 게 분명한데 왕이보는 아니란다. 확신할 수 없는 마음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다고. 그 냉철한 왕대표가 이리 겁이 많은지는 또 처음 알았다. 아이고 두야. 황위안은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이 거친 스타트업의 세계에 뛰어 들기로 결정했던 날처럼 왕이보의 어깨를 다독였다.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꽃구경을 온 인파는 북적북적 했다. 어린 아이들은 꺄르르 웃으며 망아지처럼 뛰어 다니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를 끌어 안은 채 한 몸처럼 거닌다.
왕이보는 사람들 틈에서도 단번에 샤오잔을 알아봤다. 잘 다려진 연하늘색의 셔츠, 어둔색의 단정한 바지, 그리고 아슬하게 드러난 발목 아래의 하얀 스니커즈. 그 또한 먼 곳에서 왕이보를 알아봤는지 머리 위로 높이 높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큼. 샤오잔에게 다가가기 전 목을 가다듬은 왕이보는 멀뚱히 서있는 황위안의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런데 천근 같은 발걸음을 내딛으며 거리가 좁혀질수록 마법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는 했지만 왕이보는 일단 그에게 황위안을 친구라고 소개시켰다. 그러면 인사성 밝은 마법사가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았는데, 그는 부쩍 말이 없었고 탁한 눈동자로 왕이보와 황위안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의아해진 왕이보가 분위기를 살피며 이름을 부르자 눈에 띄게 시선을 피한다. 어색하게 웃으며 황위안과 인사를 하더니 조심스레 왕이보만 이끌어 복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사용하는 방법은 알죠? 주머니 입구를 조금만 열 것. 유난히 낮게 가라앉은 샤오잔의 음성이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톡톡톡. 샤오잔은 곧게 펼쳐진 남자의 손바닥 위를 세 번 두드리고 속삭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마치 마지막 같은 건조한 인사에 왕이보는 돌아서는 그를 다급히 붙잡았지만, 샤오잔은 바쁘다며 그대로 멀어졌다. 멀리 멀리, 아득하게 멀어지는 푸른 셔츠를 왕이보는 쫓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따라가 봐야 하는거 아니냐?"
황위안은 돌처럼 굳은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왕이보는 고개를 흘레 젓고 우선은 그가 맡긴 일을 해야 한단다. 이 꽃밭에서 수백개, 아니 수천개의 병을 모아가면 웃어줄거라고. 도통 황위안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꽃집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멋쩍게 마주 잡은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순간 황위안은 이 등신이 아무리 떼를 써도 오늘만큼은 따라 왔으면 안됐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동그란 왕이보의 뒷통수를 보며 녀석이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직감이 밀려 들었다.
 
 
샤오잔은 부지런히 꽃밭을 구석구석 거닐었다. 그러다 왕이보와 그 친구를 발견할 때면 얼른 주저 앉아 숨었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통에 그의 품에 매달려 있던 부시는 어지럽다며 헛구역질을 했다. 희게 질린 샤오잔은 미안하다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반쯤 넋이 나간게 영 상태가 안 좋아 부시는 더 짜증을 내지도 못하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마법사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샤오잔은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처럼 매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시는 눈을 데록 굴려 그를 올려다 봤다. 하여간에, 재미도 없는데 겁까지 많은 마법사 놈들. 참 손이 많이 간다. 아이스크림이 땡기는 것도 있었지만 그를 쉬게 하려면 이만한 핑계도 없다.
사람이 드문 자리를 찾은 샤오잔은 가만히 앉아 아이스크림의 비닐을 벗기고 막대를 꼿꼿이 들었다. 주위를 살피며 주머니 속에서 살금 기어나온 부시는 그의 손에 매달려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기 시작했다.
그가 누구를 데려온다고 한들, 딱히 믿지는 않는다. 왕이보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샤오잔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마법사의 곁을 행성처럼 맴돌았고, 날이 갈수록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감출 수 없는 감정이 넘실거렸다. 그걸 모른다고 하면 되려 사랑에 대한 기만일 테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붙잡고 걸어 오는 왕이보를 보며 발 끝까지 내려 앉은 이 마음이었다.
어으. 샤오잔은 심란함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부시는 황망함에 화도 안났다.
"너희 마법사들은 언제나 그게 문제지."
"……."
"마법에 길들여져서 마법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
 뭇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랑에 빠지는 묘약, 그딴 건 없다. 마법사들이 유일하게 어쩌지 못하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그런 진실한 감정은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것이다. 욕심을 부렸던 자들은 호되게 댓가를 돌려 받기도 했다. 만약 '사랑' 조차 마구잡이로 만들 수 있다면 세계의 종말은 자정 100초 전이 아니라 자정 100분 전이었을 테다.
"알아, 나도 아는데……."
샤오잔이 말 끝을 흐리자 부시는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넌 뭘 알고 있는데?
"이보씨가 날 좋아한다는 거."
"그럼 너는?"
"……."
"걔가 널 좋아하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아. 심지어 널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넘치게 드러내잖아. 근데 너는? 샤오잔 너는 걔랑 뭘 하고 싶은거야? 네가 알아야 할 건 그것 뿐이야. 다른 게 아니라고."
단호한 말 몇 마디에 크게 혼이 난 기분이다. 샤오잔은 흙바닥으로 눈길을 떨궜다. 왕이보는 이미 모든 선택권을 넘겼고, 이제 선택은 오롯이 마법사의 몫이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노란 꽃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념에 잠긴 마법사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세계에 남겨진 노랫말, 그러나 사랑은 제 몫이 아니라 여기며 단 한번도 따라 불러본 적 없는 그 가사를 마침내 마음으로 읊었다.
마법사에게 사랑은 아주 고결한 낭만, 영원의 약속.
 
 
저물녘의 꽃이 지평선에서부터 천천히 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가히 황홀경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였다면 평생 잊지 못 할 광경이었으리라.
축제는 끝이 났는데 마법사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없다. 황위안은 꽃을 질릴만큼 본 것 같다며 먼저 가버렸다. 저녁도 안 먹고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충 손을 휘적거리고 멀어진다. 왕이보는 고심 끝에 샤오잔에게 문자를 남겼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며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는다. 손을 잡고 왔던 사람들, 손을 잡고 싶어했던 사람들 모두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오로지 왕이보만 그 자리에 뿌리 내린 꽃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섰다. 엇갈리지 않으려면 기다려야 한다고, 애써 불안을 지웠다.
수천개의 작은 유리병이 들어있을 복주머니에서는 어떤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왕이보는 손 안의 까슬한 감촉을 느끼며 오래도록 구름 속 그림자를 찾았다. 홑겹의 천 같은 구름은 시간을 따라 유유히 흘러간다. 어디에도 마법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요. 버석하던 그의 인사는 정말 마지막이 되었다.
늦은 밤 정신없이 샤오잔을 찾아갔지만 꽃가게는 따뜻한 주홍빛 대신 어둠에 푹 젖어있었다. 요란하게 두들기며 그의 이름을 불러도 싸늘한 정적만 감돌았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안감이 엄습해 손이 떨렸다. 요동치는 감정을 다잡으며 왕이보가 할 수 있는 건 하얗게 칠해진 문에 이마를 쿵 기대고 닿지도 않을 밤인사를 하는 것 뿐이었다.
'……내일 봐요.'
당연히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마법사의 꽃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악보다 나은 건 적어도 그의 꽃가게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던 것처럼 증발하지 않았다는 것. 일을 하다가도 이따금 통창 밖의 흔적을 확인하며 왕이보는 그렇게 안도했다.
나흘이 지났을 무렵에는 돌려주지 못한 붉은 복주머니를 종이봉투에 담아 꽃가게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편지는 부담스러워 할까 기껏 남긴 건 손바닥보다 작은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었다. 물을 수 있는 말도 고작해야 별 일 없냐는 걱정이 전부였다. 문고리에 걸려 있던 종이봉투는 며칠 뒤에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꽃가게 앞을 지나는 왕이보의 눈 앞으로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살랑살랑 꽃잎처럼 떨어졌다. 급하게 멈춰 서 주운 포스트잇에는 마법사의 유려한 필체가 담겨 있었다. 별 일은 없고 조금 바쁘네요.
식물은 시들고 왕이보도 물 한모금 먹지 못한 사람처럼 메말라갔다. 푸릇한 잎과 환한 꽃이 그득하던 사무실은 실연의 그림자가 드리워 거무죽죽 해졌다. [살려야 한다.] 온 직원이 당번까지 정해 물을 주고 영양제를 꼽아봤지만 그럴수록 화분들은 되려 죽여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예 소생이 불가한 것은 버려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왕대표는 고집을 부리며 하나 둘 자신의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꼬라지가 하도 답답해 황위안은 몇 번이나 화분을 빼앗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장사인 놈인데 양 팔로 가득 끌어안고 버티기에 들어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기약없는 마법사를 기다리는 사이 봄 비가 몇 번이나 내렸다. 그리고 이 봄의 끝을 알리는 비는 사흘을 내리 내리고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왕이보는 더이상 마법사의 연락에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품 안의 식물은 전부 시들었지만 지붕 위 덩굴은 계속 푸르렀으니까.
왕이보를 정말 괴롭게 하는 건 비 온 뒤 저녁의 풀내음 같은 것이었다. 고소한 흙냄새와 물을 흠뻑 머금어 요요해진 꽃향기, 그리고 발 아래 짓이겨진 들풀의 냄새는 자비도 없이 둥근 코 끝에 매달렸다. 왕이보는 손등으로 코를 거칠게 문댔다. 달큰한 향과 연두빛 틈에서 웃고 있던 샤오잔을 떠올리지 않으려 부던히도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가 생생했다. 평소에는 살짝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웃으면서, 드물게 꽃망울 터트리 듯 소리내어 웃던 그 남자…….
투둑투둑. 잔잔하게 창가를 울리던 빗소리가 멎었다. 화분을 사던 습관이 사라지자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일이 없는 날에도 내도록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정이 되기 직전에야 퇴근하는 습관. 연락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마법사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비가 그쳐 우산은 필요 없었다. 왕이보는 가벼운 몸으로 빌딩 입구를 빠져 나와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 캄캄한 꽃가게로 다가갔다. 언젠가 좁은 골목을 거쳐 가게의 뒷편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울퉁불퉁하고 물자국이 남은 벽 뿐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 55분. 왕이보는 비어있는 가게 앞을 어슬렁 거리며 열두시가 땡하면 집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야속한 하늘은 조금씩 가랑비를 뿌리기 시작했고, 부디 세차게 쏟아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냥 비를 맞고 섰다.
고요한 밤의 끝자락,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는 빗자루를 타고 다니니 절대 그 사람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신경도 안썼다. 그런데 자동차는 눈부신 헤드라이트를 뽐내며 멈춰선다. 웅웅. 계속 시끄럽게 웅웅거리는 통에 왕이보는 설핏 미간을 구기고 돌아봤다. 시동도 끄지 않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오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나 낯설지 않고 꼭 익숙했다. 아득하게 그리웠고, 먹먹하도록 보고 싶었다.
'…가 자정을 알려드립니다. 띵.'
열린 문 틈새로 자정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경쾌하게 새어나온다. 샤오잔의 차림새는 퍽 후줄근했다. 하얀 티셔츠에 잠옷처럼 보이는 면바지, 그리고 무릎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가디건만 툭 걸친 모습은 누가봐도 집에 머물다 나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마법사에게는 차도 있고 집도 있다는 셈이었다. 왕이보는 여태 빗자루가 차 대용이고, 미닫이 문 너머의 방이 집 대신인 줄 알았다. 마법사의 방에는 좁은 침대가 있었고 왕이보가 꼼수를 부려 자고 가겠다고 하는 날에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으니까. 나와는 조금 다른 그의 세계를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이 사람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왕이보는 눈 앞의 남자를 그리워했던 만큼 서러웠고, 불안했던 만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샤오잔은 저를 보고도 오도카니 서있는 왕이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기에는 말 없는 남자의 작태가 영 안녕해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미소지어도 왕이보는 입술을 앙 물고 노려보기만 한다. 어두워서 못 봤나? 멋쩍어진 샤오잔은 장난스레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 보이죠?"
그 말에 왕이보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얼굴에 샤오잔은 황급히 두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감쌌다. 고개를 틀며 씨근덕대던 왕이보는 이내 마법사의 손등 위를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가득 덮었다.
어두운 길거리에서 샤오잔은 더듬더듬 손 끝으로 그의 이목구비를 덧그렸다. 내리는 빗줄기는 차가운데 뺨에서 묻어 나오는 물기는 뜨겁다. 남자의 서러운 마음이 곧이 곧대로 전해져 와 샤오잔은 탄식했다. 왜 울어. 내가 뭐라고 밤 늦도록 기다리고 눈물을 쏟고 그래…. 낮게 들려오는 말에도 왕이보는 말없이 그 작은 손바닥 위로 뺨을 부볐다. 행동은 이리 애틋하면서 올려다 보는 눈빛은 뾰족했다. 웃으면 안되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샤오잔은 기어코 샐쭉 웃어버렸다. 눈빛만으로 남자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좋은데 미워 죽겠어, 그런 마음.
샤오잔이 손을 떼어내려 하자 손등 위로 겹쳐진 힘이 억세게 붙들었다. 잠깐의 힘겨루기 끝에, 샤오잔은 빗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선명하게 속삭였다.
우리 집에 가요. 봄 비는 차가워.
 
 
부시는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시큰둥하게 보고만 있자 왕이보가 살짝 손짓을 했다. 참 밸도 없다. 눈시울이 붉고 뺨이 퉁퉁 부은 남자애는 얼굴에 물길이 죽죽 나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와중에 인사를 한다. 에휴. 부시는 별 수 없이 녀석의 팔 위로 슬쩍 꼬리를 감아 다독였다.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단독주택이었는데, 들어와보니 역시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마법사가 사랑하는 밤하늘, 그리고 우람한 나무들과 만개한 색색의 꽃이 창을 두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샤오잔은 따뜻한 차를 내어와 왕이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부시에게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 한알을 건넸다. 품을 버겁게 채우는 알맹이를 끌어안은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창 밖으로 사라졌다.
음음 몇번이나 말을 고르던 샤오잔은 조심스레 물꼬를 텄다.  
"…내가 일찍 가려고 했는데."
"내가 기다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 네. 말을 전해줘서."
"누가요?"
하하…. 어색하게 웃은 샤오잔은 검지 손가락으로 허공을 살짝 가리켰다. 그 지붕 위에 있잖아요. 푸른 덩굴 친구….
"그럼 내가 계속, 계속. 매일 매일 사장님 기다리는 것도 다 알고 있었어요?"
"……."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모두가 잠 든 새벽녘에도 나는 잠들지도 못하고 서성이는거…, 알고 있었어?"
둥근 찻잔만 내려다 보던 왕이보는 샤오잔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정말 알고 있었어? 근데 어떻게 한번을, 연락도 안해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화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언성이 높아지려 해 입 안의 여린살을 씹고 입술을 짓이기다 기어코 피를 봤다.
"이보씨, 피나요."
놀란 샤오잔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왕이보는 뒤로 물러나며 셔츠 소매에 제 입술을 벅벅 문대고 다시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죠. 닿지 못한 손을 여전히 허공에 띄운 채로 샤오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였다.
"나는, 사장님 좋아해요."
왕이보는 찻잔을 내려두고 낮게 중얼거렸다.
"……."
"근데 사장님 마음은 도무지 모르겠으니까, 솔직히 힘들어요."
"……."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너무 좋아해서 화가 나요."
"이보씨."
"…마법사는 이런 감정 모르겠죠. 나도 내가 낯선데."
 창 밖에 내려야 할 가랑비가 허벅지 위로 내리기 시작했다. 왕이보는 한참 숨을 골랐다. 곯은 감정을 폭죽처럼 터트렸으면 멋지게 자리를 털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또 싫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데. 그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보씨, 나 좀 봐요."
비장한 목소리. 왕이보는 마법사의 말이 주문인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축축히 젖은 속눈썹은 마음처럼 무거웠다. 망설이던 샤오잔은 선글라스를 벗었으나 그 눈은 감은 채였다. 엇갈리지 않으려면 기다려야 해. 왕이보는 마음으로 외며 마법사의 눈이 뜨이기를 기다렸다.
살풋 미간을 찌푸리고 제 손 끝으로 눈썹을 더듬던 샤오잔은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열리는 틈으로 비추는 마법사의 눈동자는 언젠가 보았던 금빛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이보는 순간 숨이 멎은 듯 했다. 이걸 보여주지 않으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구나. 가슴이 시리게 아려왔다. 그의 눈동자를 빛나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게 그의 대답인걸까.
"내가, 조금 아팠어요."
"……."
"뒤늦은 열병에 시달려서 아팠어요."
"…무슨 열병이요?"
물으면서도 왕이보는 차마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어지럽다. 머리가 띵하게 울리는 듯 했다. 이제 더는 바라지 않겠다는 마음과 아마도 내 것이 아닐 사랑을 탐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이 나이에 조금 멋쩍기는 한데. 첫사랑."
주저하던 샤오잔은 왕이보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내가, 연애는 많이 해봤는데…."
"근데요."
"…아니 연애도 그렇게 많이는 안해봤는데, 아무튼. 이런, 이렇게 아팠던 건 처음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랑은 처음인거죠."
"……."
"마법사들은, 일생에 단 한번. 사랑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 넘치는 마력 때문에 아프기도 해요."
당신 좋아한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마법사는 일생에 단 한번인 사랑을 만났다는 말을 잘도 했다. 끓던 속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의 입에서 '첫사랑' 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받아들이려 했다. 첫사랑이라는 이름에 영원까지 약속된 건 아니니까. 그럼 이 다음의 사랑이 또 있을 거고, 두번째로서 마법사의 마지막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번의 사랑'이라니, 왕이보는 차분하게 눈이 반쯤 돌았다. 막을 새도 없이 입이 열렸다.
"나라고 해요."
당돌한 남자의 요구에 샤오잔은 아무 말도 못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분명한 말과는 달리 눈길을 피하는 모습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묘하게 땅굴을 파는 것 같더니만, 아무래도 왕이보는 이미 지구의 내핵까지 다다라 돗자리를 펼친 듯 했다.
샤오잔이 침묵하자 왕이보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애원했다.
"그쪽이 좋아하는 사람, 나라고 하라고요."
"……."
"제발."
제발요…. 응?
절절한 남자의 음성에 발 끝이 저릿했다. 샤오잔은 양손을 얌전히 내어준 채 왕이보의 둥근 정수리를 내려다 봤다. 참, 내가 그렇게 좋은가.
그러나 유채꽃 틈에서 짧은 노랫말을 외자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마력에 짓눌려 그대로 혼절한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샤오잔이 눈을 떴을 때는 집이었고, 너를 이고 지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부시에게 종일 야단을 맞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사랑을 얼마나 차곡차곡 쌓은 걸까, 넘치는 마력은 쉬이 갈무리 되지 않았다. 내뿜는 숨, 걷는 발걸음 마다 별가루의 향연이라 아주 골칫거리였다. 사실 샤오잔은 사랑의 흔적을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신기해 내내 집 안을 거닐었다. 흡사 달팽이가 된 것 같았다. 머무르고 거니는 자리마다 반짝이는 길이 새겨졌다. 그것들은 진액처럼 마르지 않고 마법사가 이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마다 차곡차곡 밤색의 눈동자 속으로 쌓였다.
그렇게 영원히 저물지 않을 두 개의 별이 만들어졌다.
"이보씨."
"……."
"좋아한다는 말 정도로 만족하겠어요?"
"충분해요."
"근데 어떡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좋아해요, 가 아닌데."
"……."
"사랑해."
고백을 듣고도 왕이보는 굳은 채 가만 있었다.
샤오잔이 그에게 붙잡힌 손을 살살 흔들어 빼내도 더는 붙잡지 않는다. 빼낸 한 손으로 왕이보의 동그란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몸을 숙여 남자의 머리 맡에 이마를 콩 맞대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쉴 새 업이 사랑한다고 속삭이자 왕이보는 붙들고 있던 마법사의 나머지 손마저 놓아주고 슬금슬금 쇼파의 끝으로 멀어졌다. 샤오잔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금세 동백이 피어날 듯 붉게 물든 남자의 귓가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만에 들려오는 말이란 참 생각도 못 한 답인지라.  
"…거짓말."
"뭐라고요?"
허 참. 그렇게 사랑해 달라 조를 때는 언제고 사랑 고백은 다 거짓말이란다. 샤오잔은 기가 찼다. 한편으로는 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누굴 탓하겠어. 벌떡 일어난 샤오잔은 왕이보가 벌린 거리를 다시 좁히고 딱 붙어 앉았다. 단단한 그 허리에 손을 감고 네모난 어깨에 턱을 사뿐히 올리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요?"
왕이보는 밀어내는 시늉만 하고 얌전히 마법사에게 안겼다. 간지럼을 타지도 않는데 옆구리가 간질거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아냈다. 흘긋 시선을 내리면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달음박질 하는 감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뽀뽀 할 수 있어요?"
"응?"
"나한테, 입 맞출 수 있어요?"
미친놈. 왕이보는 순간 주먹으로 허벅지를 쾅 내리칠 뻔했다. 할 수만 있다면 뱉은 말을 허겁지겁 주워 담고 싶다. 그런데 샤오잔은 여상하게 되묻는다. 어디에? 마치 우리가 입을 맞추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다만, 당신이 지금 당장 내 입맞춤을 받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장난스러운 시선과 애정어린 목소리에 왕이보는 되려 심각해졌다. 그러게요. 입과 입을 맞추고 싶은데 그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왕이보가 가장 무난한 지점을 찾아 눈을 굴리는 사이, 쪽. 샤오잔은 당장 코 앞에 있는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도톰한 귓불에 쪽, 세필로 그은 턱선에 쪽, 크게 당황하며 돌아보는 남자의 뺨에 쪽.
샤오잔은 물막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쇼파 위로 무릎을 딛고 반쯤 일어났다. 덩달아 따라붙는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배싯 웃어 보였다. 저를 올려다 보는 왕이보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그의 이마와 다부진 눈썹뼈에도 차례로 입 맞추었다.
느릿한 손은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샤오잔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뜨겁게 붙들었다.
쉼없이 촉촉하게 닿아오는 입맞춤이 기꺼워 서럽고, 기꺼워 행복했다. 떨리는 손이 샤오잔의 뺨에 닿았다. 그러자 그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뺨을 눌러 붙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뜬다. 찬란한 두 개의 별은 밤하늘이 아니라 마법사의 눈 속에서 몇 번이고 사라졌다 뜨기를 반복했다. 왕이보가 그 어여쁜 눈꼬리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지르자 샤오잔은 기쁘게 눈을 휘며 속삭였다.
"이게 내 사랑의 증거예요."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두 개의 별.
오직 당신 앞에서만 영원히 빛날 두 개의 별.
어느 날 이 세계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리하여 모든 별들이 사라진다 해도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서 저물지 않을 별.
사랑을 속삭일 수록 이채가 깃들었다. 환희에 젖은 눈동자는 물빛으로 얼룩져 왕이보가 깜빡이는 순간마다 빛이 났다. 왕이보는 마법사의 황금빛 눈동자가 예쁘다고 했으나, 기실 샤오잔이 보기에 그보다 아름다운 건 남자의 검은 눈동자였다. 그 검은 호수는 오직 별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

***

드디어 마법사가 자리를 비웠다. 며칠간 샤오잔을 만날 수 없다는 건 조금 불만이었지만, 어쨌든 왕이보는 부시와 단 둘이 남게 될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기도 했다. 근방의 편의점을 싹 털어 빵빵하게 채운 가방을 메고 샤오잔이 없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제 집처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작게 손인사를 해도 녀석은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으며 왕이보를 노려봤다.
쫓겨나기 전에 얼른 거실에 자리를 잡고 가방 속에 담아온 것들을 와르르 러그 위에 쏟아냈다. 세모꼴이던 부시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녀석은 기분 좋은 골골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금박에 감싸인 동그랗고 묵직한 것을 하나 품에 안으며 묻는다.
"아몬드?"
"응."
"초콜릿?"
"응."
부시는 말랑한 손으로 허겁지겁 금박지를 파헤쳤다. 탐스러운 초콜릿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혓바닥을 내어 낼름 핥고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끼룩끼룩 웃는다. 왕이보는 어쩐지 뿌듯해 처음으로 녀석의 꼬리를 살살 만져봤다. 까득.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문 부시는 순한 눈망울로 왕이보를 빤히 쳐다봤다.
"뭘 원해?"
"…그런거 아냐."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이정도는 알아. 뇌물이잖아."
왕이보가 머뭇거리자 부시는 새침하게 못을 박았다. 빨리 말해. 내가 이 초콜릿을 다 먹고 나면 너는 국물도 없어.
"너…,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했지?"
아항. 부시는 콧소리를 내며 끄덕였다. 이 남자애가 마법으로 무얼 하고 싶어하는지 얼추 알 것 같기도 했다. 샤오잔에게 프로포즈라도 하려고? 놀란 왕이보는 헛숨을 들이키며 주위를 살폈다. 독심술도 할 줄 알아? 누가 들을 새라 나지막히 묻는 음성에 부시는 뒤로 벌러덩 누워 배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 건 몰라. 그래도 나한테 너는 어제 태어난 애와 다름 없으니까. 척보면 척이지.
"그래서, 구상은 해왔어?"
왕이보는 녀석의 마음이 바뀔 새라 재빨리 가방에서 하얀 도화지와 색연필을 꺼내 들었다. 샤오잔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 있었다. 그러려면 꼭 마법이 필요한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왕이보는 서툴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그리는데 솜씨는 영 꽝이었다. 이게 뭐람? 부시는 뒷짐을 지고 넓다란 도화지 위를 거닐며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진지하게 설명하는 남자애를 보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무한한 삶에서도 싫증나지 않는 건,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다정해지는 얼굴이었다.  
 
 
커다란 남자와 작은 털짐승이 마법사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아니 왜 이래요? 너까지 왜 이래? 미는대로 뒷문을 벗어나 꽃이 피지 않은 둥근 자리에 다다르니 허공에는 빗자루가 둥실 떠있고 그 아래 푸른빛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샤오잔은 보자마자 알았다. 이건 부시가 직접 그린 마법진이었다. 힘들다고 도통 마법을 부리지 않는 녀석인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왕이보는 냅다 빗자루에 올라탔다. 부시는 남자애의 셔츠 주머니에 쏙 들어가 마법사를 얄밉게 쳐다봤다. 대체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샤오잔은 눈을 크게 뜨고 녀석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부시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왕이보는 여전히 멀뚱히 서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샤오잔이 그 손바닥을 가만히 보기만 하자 금세 눈꼬리를 축 내리고 불쌍한 강아지처럼 낑낑댄다. 저게 먹힐거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우스워야 하는데, 실제로 너무 잘 먹히는 탓에 샤오잔은 웃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빗자루에 앉았다.  
"꽉 잡아."
부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빗자루는 순식간에 하늘 높이 올라갔다. 몇 번이나 구름을 뚫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법사보다도 더 한 거침없는 운전에 왕이보는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 빠를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 마법사에 그 털짐승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익숙한 듯 했고 왕이보만 허둥지둥 또 다시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바람이 분다. 선선한 밤바람에 왕이보는 슬며시 눈을 떴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흐르는 강 위였다. 큰 강줄기의 양 옆으로는 빼곡한 나무들이 푸른 숲을 이루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은 서로의 몸을 맞대며 부드럽게 노래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새카만 강 위로 달빛이 선연했다. 마치 검은 도화지 위에 하얗고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밤하늘에 가득한 별은 강물 위에서도 일렁이고 있었다.
단정한 샤오잔의 뒷목에 살짝 입 맞추고 왕이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가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 속 밤하늘.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마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진짜의 '별이 빛나는 밤'. 그러나 1889년과 지금의 하늘은 너무도 다른 탓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어릴 적에나 손에 쥐어 본 색연필로 고흐의 그림을 서툴게 따라 그리며 마침내 마법사에게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왕이보는 말 없는 샤오잔의 등에 이마를 기대고 부시를 향해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약속된 신호였다. 마찬가지로 콧잔등을 찡긋한 부시는 서서히 하늘 위로 떠올랐다. 녀석은 허공을 몇 발자욱 거닐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발 아래 강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고 강바닥에 오래도록 깔려 있었을 작은 몽돌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샤오잔은 그 순간에도 왕이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리송해 그저 멍하니 굽이치는 강물과 물빛에 반짝이는 몽돌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광경이 무엇인지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순간, 몽돌들은 천천히 강물 위 별이 새겨진 자리로 옮겨져 다시 퐁당퐁당 빠졌다. 잔잔한 파동은 둥글게 번졌다. 점처럼 작았던 별들은 파동을 따라 둥글게 번지며 마법사가 동경했던 밤하늘을 만들어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검은 강 위로 아로새겨진 별은 감히 말하건데 화가의 그림보다도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견딜 수 없는 다정함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샤오잔은 빗자루를 꽉 붙들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뒤에 앉은 남자를 와락 끌어 안았다. 빗자루가 크게 휘청거렸다. 왕이보는 안겨오는 이를 가득 품고 그의 드러난 살갗에 코를 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사랑한다는 말을 더했다.
……빗자루는 집념으로 버텼다. 마법사의 마력 없이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려니 긴 막대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털은 다 빠질 것 같은데 눈치는 있어서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어 허공에 나부끼는 종잇장처럼 나풀나풀 서서히 아래로 가라 앉았다.
코가 서로의 뺨을 푹 누르도록 깊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은 강물에 닿은 발 끝이 젖어가는 데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어코 넘실대는 물결에 발목까지 젖고 나서야 샤오잔은 틈없이 따라 붙는 입술을 가쁘게 받아내며 빗자루를 단단히 붙들었다. 추진력을 얻은 빗자루는 다시 한번 드높이 날아 올랐다.
마법사와 남자는 이마를 맞대며 아이처럼 웃고, 무수히 많은 별은 샛노란 유채꽃처럼 밤하늘 가득 피어났다.
 
 
자정 100초 전.
단 한번의 포옹과 단 한번의 입맞춤을 당신께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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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를 찍으면서 행복했어요. 읽어주시는 분들도 제가 벅차게 행복했던 만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합작을 열어 좋은 기회를 주신 주최분들께도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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