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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tomato08051005

Muse

Muse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9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러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


‌언제나 큰 금액이 걸린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다들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샤오잔 역시 그 예민해지는 직원들 중 하나였고, 특히나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 예민함은 사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서로가 예민한 것을 알기에 당시엔 거친 말을 쏟아내도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호호 하기 때문에 이 시기만 잘 넘기자고 말한다. 다행히 다들 뒤끝은 없었다.

"땅 꺼지겠다."

머리를 잡아 뜯으며 한숨 쉬는 샤오잔에게 동료 직원이 말을 걸었다.

"이게 아닌데...... 영 맘에 안 드는데...... 진짜 안 풀리네......"
"머리 좀 식히고 와 너 때문에 다들 따라서 한숨 쉬잖아."

샤오잔은 제일 예민해진 직원이라는 이유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져 사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바로 퇴근해도 되니까 머리 좀 식혀."
"야! 마감이 코앞인데 퇴근은 무슨 퇴근..... 이냐...... 사람 말이나 좀 다 듣고 닫지 너무하네."

바로 다시 들어갈 순 없고, 그렇다고 퇴근하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던 샤오잔은 옥상이나 갈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졌다. 사람이 없는 곳이 필요한 샤오잔은 비상계단으로 갔다. 계단 난간에 기대서 사무실에서 쉬던 한숨을 이어 쉬면서 아무것도 없는 하얀 빈 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 벽을 보고 있으면 머리도 하얗게 돼서 새로 리셋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10분 만 멍 좀 때리다 가야지."

얼마나 가만히 있었을까 둥둥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지고, 웬 남자가 샤오잔의 공간을 침범했다. 공용 공간이니 자신만의 공간이라 할 순 없었지만, 리셋이 끝나가기 직전 강제로 재부팅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오잔은 자신의 공간에 침범한 남자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러 나온 듯 입엔 담배를 물고 한 손엔 라이터를 켠 채로 있었다.

"학생, 담배 피울 거면 옥상 가서 피워."

자신이 없을 때는 피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샤오잔은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그리고 계단에서 담배 피우려고 나왔던 왕이보는 반 층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추쳤고, 지금 자신이 뭘 하러 이 계단에 온 거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깐 눈이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예민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 눈코입 따로 놓고 봐도 잘생겼는데, 얼굴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그동안 왕이보가 갖고 있던 미의 기준을 모두 무너뜨렸다. 잘생겼다. 예쁘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너무 한정적이었다. 무슨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샤오잔은 이제 다 쉬었다는 듯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툭 치고는 시계를 봤다. 10분만 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30분이나 지나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다 여전히 반 층 밑에서 입에는 여전히 담배를 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다행히 라이터의 불은 꺼져있었다.

"학생 담배는 옥상이야. 나 없다고 여기서 피면 안 돼?"
"네......"

샤오잔은 학생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귀엽다는 듯 한번 웃어주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계단에 남겨진 왕이보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꾼 건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아픈 걸로 봐서는 꿈은 아니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품에 집어넣으면서 방금 봤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고, 내내 찡그리고 있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웃어준 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샤오잔은 자리에 앉아 방금 계단에서 만난 학생을 떠올렸다. 학생이라고 하기엔 머리 스타일이 학생 같지 않았지만 얼굴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것이 아직 성인은 아닌 듯했다. 꽤나 준수하게 잘생긴 얼굴에 입고 있던 옷 센스도 나쁘지 않고, 딱 한 가지 걸리는 건 머리 스타일인데 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면 뭘 해도 잘생겨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꽉 막혀있던 작업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으면서 손 가는 데로 작업을 시작했다. 술술 풀리는 느낌이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오랜만이라 샤오잔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오늘도 없네......"

며칠 전 비상계단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왕이보는 시간 날 때마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봤지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는 그 계단에서 몇 시간을 앉아있어 보기도 했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왕이보는 위층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한번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저기 첫눈에 반했습니다. 만나주세요! 할 순 없잖아......"

호기롭게 찾아가? 하다가 뭐라고 해...... 하다가 미친 척하고 찾아가? 했다가 미친놈 꺼지라고 하면 어떻게 해 하면서 왕이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기다 자긴 아직 학생이고, 그 남자는 직장인인데, 과연 자신 같은 연하한테 관심이나 있겠어? 하면서 다시 한번 실망했다. 동성이어서 안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랑 고백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 그냥 그 아름다운 남자를 딱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왕이보!! 안 들어올 거야?"

쉬겠다며 비상계단만 가면 함흥차사인 왕이보를 잡으러 왔다.

"갈게요."

아쉽다는 듯 위층 사무실로 통하는 문을 힐긋 보고는 연습실로 돌아갔다. 연습실로 통하는 철문이 닫히고 위층 사무실로 통하는 철문이 열렸다.
마감에 이리저리 치이던 샤오잔은 또다시 동료에게 쫓겨났다.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바빴지만 사무실 공기가 너무 무거워져 내려진 조치였다. 어차피 손이 딱 멈춰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있어 봤자 의미는 없었다.
샤오잔은 건물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고는 디자인 좀 내놓으라고 말하면서 천장 모서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장 모서리는 답이 없었고, 그러다 지난번에 만났던 남학생이 생각났다.

"밑에 층이 댄스학원이라고 했지? 몇 시까지 하려나......"

며칠 전 만났던 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학생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본다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둥둥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비상계단으로 들어온 직장인을 보고 왜 저기서 나오지? 했지만 이내 직원의 미소를 보이며 "댄스 수업 들으시게요?"라고 물었다.
샤오잔은 말을 걸어오는 직원에게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고 "견학 좀 해볼 수 있을까요?" 라 말했다.
웬만한 아이돌만큼 잘생긴 샤오잔을 보며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속으로는 몇 살이지? 직장인? 근데 진짜 잘생겼다 생각하며 학원 내부를 안내했다. 뒤에서 잘 따라오며 대답하던 남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돌아보니 유리창 너머로 연습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샤오잔은 직원의 안내를 건성으로 들으며 연습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다 그때 그 학생이 춤 주고 있는 연습실을 찾았고, 저절로 발이 멈췄다.
왕이보는 춤출 때에도 집중력이 뛰어났다. 오롯이 귀를 파고드는 음악과 머릿속에 떠다니는 춤만 느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샤오잔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돌 연습생이에요. 춤으로는 탑이어서 왕이보보고 이 학원 등록하는 학생도 많아요."
"연습생이요? 데뷔는 언제 한데요?"

이미 데뷔한 웬만한 아이돌보다 마스크도 좋고 춤도 잘 추고 해서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보이는데 연습생이라는 말에 되물었다. 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레벨이 다르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어를 총동원해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빨리 옮기고 싶었다.

"그룹 결성 중인데 아직 멤버가 다 안 모였다나 뭐라나......"
"그런데 이런 걸 외부인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예요?"
"넷에서 이미 유명해서 조금만 검색해 보면 다 나와요."

직원은 잘생긴 샤오잔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샤오잔은 왕이보의 모습을 모두 머릿속에 담고는 다음엔 무슨 핑계로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 곡 하나를 끝낸 왕이보는 거울에 비친 샤오잔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잘못 봤을 수도 있지만 며칠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인데, 잘못 봤을 리가 없다며 어디 가냐고 묻는 안내데스크 직원의 말도 듣지 못한 채 한달음에 뛰어나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있는 샤오잔에게 다가갔고, 이대로 놓치면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손부터 잡았다.
갑자기 손에 닿은 다른 사람의 체온에 놀란 샤오잔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왕이보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고, 설마 춤추는 걸 봤다고 따라온 건가 싶어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왕이보는 그저 손만 잡고 있을 뿐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학생? 왕이보 학생??"

먼저 말을 걸 거라 생각했던 샤오잔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왕이보에게 먼저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왕이보는 이 잘생긴 남자는 목소리도 잘생겼다는 생각만 할 뿐 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냥 이 목소리를 계속 듣고, 이 얼굴을 계속 보고 있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돌아왔고, 갑자기 붙잡은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제 이름......"
"아! 저기 직원이 알려줬어요. 이름 막 불러서 미안해요."
"그 쪽... 아니 형 이름은 뭐예요?"
"샤오잔. 서로 이름 알았으니까 비긴 걸로??"

왕이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뭐라고 더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나 생각하다 "춤 배울거예요?" 하며 학원에 온 이유를 물었다.

"아마 일이 바빠서 어려울 것 같긴 한데......"
"그럼 왜 왔어요?"

샤오잔은 왕이보의 물음에 차마 '너 보러 왔어'라는 말은 할 수 없었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하게 하려면 어떤 답변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혹시 나 보러 왔어요?"

샤오잔이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왕이보가 먼저 물어봤다. 물어봐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샤오잔이 자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했다.

"뭐?"
"아닌가?"

아니면 말고 하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샤오잔이 갑자기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왕이보는 뭐가 미안한지 몰라서 뭐가 미안한지 되물었다.

"학원 몇 시에 끝나? 여기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밥 사줄 테니까 잠깐 얘기 좀 할래요? 아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얘기 해서 당황했겠다."
"좋아요! 뭔진 모르겠지만, 밥 사주세요. 얘기 들어줄게요."

왕이보는 지난번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는 이대로 샤오잔을 못 만날 것 같아서 횡설수설 이야기하는 샤오잔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학원은?"
"괜찮아요. 형 회사는요?"
"어? 나도 괜찮아요."

샤오잔은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머릿속에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빨리 옮기고 싶었지만, 우선 왕이보에게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형, 말 놓으세요. 제가 더 어린것 같은데......"
"초면인데 어떻게 그래요."
"지난번엔 초면에 반말했으면서......"

지금도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던 샤오잔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지난번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지난번에 잠깐 본 것 같은데 어떻게...? 아! 내가 초면에 무례했었지 미안!"
"괜찮아요." 그런 얼굴이면 반말 좀 해도 돼요.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하는 왕이보였다.

그럼 1층 로비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샤오잔은 위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샤오잔을 본 동료 직원이 한참 인상 팍 구기고 나가길래 그대로 집에 갔나 했더니 무슨 이 세상 모든 보물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들어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음...... 일이 잘 풀리게 해주는 행운의 부적을 만났다고 해야 하나?" 하면서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샤오잔은 "나 퇴근한다." 하고는 훌쩍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마감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저런 표정이라면 업계 탑인 샤오잔이 알아서 잘하겠지 하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왕이보는 1층에서 샤오잔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지 않고 90도 정도 돌아서서 나오는 사람들을 옆눈으로 주시했다.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기다리는 티가 날 것 같아서였다. 샤오잔은 내리면서부터 한눈에 왕이보를 발견하고는 가볍고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샤오잔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히 혀로 입술만 축이며 그가 오는 방향을 보진 않았다.

"미안, 내가 만나달라 해놓고 먼저 와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기다렸지? 빨리 내려온다고 했는데, 아까 마무리를 안 했던 게 있어서 그것만 마무리하느라......"

샤오잔은 눈을 접고 환하게 웃으며 5분 밖에 안 기다렸다 말하는 왕이보를 데리고 회사 근처에 조용한 식당으로 갔다. 조용한 데다가 개별 룸이 있어 평소에 귀한 손님 대접할 때나 가는 식당이었다. 예약했냐는 직원의 물음에 예약 없이 왔다 했으나 다행히 저녁시간은 아니어서 비는 룸이 있었다.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내 맘대로 골랐는데 혹시 못 먹는 거 있어?"
"아뇨. 다 잘 먹어요."

왕이보는 샤오잔의 목소리가 좋았고, 사람 많은 왁자지껄한 곳이 아닌 단둘만 있는 조용한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 저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혹시 나이 물어보면 실례려나?"
"아뇨. 내년에 성인 돼요. 샤오잔은 몇 살이에요?"
"아~ 난 24살"

회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대 중반쯤이라고 예상하긴 했었지만, 막상 나이를 들으니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괜히 작게 느껴졌다. 얼굴이 맘에 들어서 계속 찾아봤고, 어느샌가 아 나 그 사람한테 첫눈에 반했구나 하면서 오늘 만나지 못했다면 조만간 회사로 찾아갔을 왕이보였다.
주문한 음식들이 다 나오고, 샤오잔은 왕이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춤 잘 추던데부터 시작해서 아까 견학 시켜준 직원이 아이돌 연습생이라던데까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꺼낼 수 있는 말은 다 꺼낸 것 같았다.
막상 본론을 이야기하려고 하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샤오잔이었다.

"그런데 왜 나 밥 사준다고 한거예요?"

결국 주변만 맴도는 샤오잔을 위해 왕이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나 절대 이상한 사람 아니고, 절대 너한테 다른 맘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 하는데 왕이보는 다른 맘 가져도 된다는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널 처음 봤을 때 영감이 막 떠오르더라고, 아, 내가 하는 일이 디자인이야. 한참 아무 생각도 안 나서 머리라도 좀 식히려고 계단에서 생각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때 네가 들어온 거야. 그러고 나서 막혀있던 디자인이 참 잘 풀리더라...... 그러다가 또 다른 작업하는데 뭔가 탁! 하고 떠오르지가 않아서 혹시 널 다시 보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몰래 학원으로 간 건데 마침 또 춤을 추는 걸 보니까 내 심장이 두근거리지 뭐야? 아무래도 영감을 준 상대에게 비밀로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밥 사준다고 한 거야."

왕이보는 샤오잔이 하는 이야기보다 샤오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좋아서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큰 이빨 두 개가 꼭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밥 한 끼 가지고 안 될 것 같은데요?"

사실 왕이보도 샤오잔을 만난 뒤로 춤출 때마다 새로운 안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샤오잔이 자신에게서 느낀 것과 같았지만,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겠지? 나 돈 많아... 어떻게 아르바이트하는 샘 치고 알바비를 줄까?"
"그냥 제 얼굴 좀 보고 저 춤추는 거 보시는 건데...... 돈은 좀 그렇고...... 종종 밥 사주시면 안 돼요?"
"근데, 기분 나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널 보고 작품을 만든다는 게......"

그런 얼굴을 하고 그런 말을 해봤자, 기분 나빠할 사람은 세상 천지에 없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샤오잔, 나 잘생겼어요?"
"응 잘생겼어."
"그럼 나 춤 잘 춰요?"
"춤은 내가 잘 몰라서...... 춤추는 거 멋있더라......"
"근데, 샤오잔도 잘생긴 거 알아요?"

샤오잔은 농담하지 말라며 하하 웃고는 잘생긴 사람은 이보 같은 사람이니까 거울 좀 보라고 했다. 평소에도 잘생겼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지만 샤오잔의 입에서 듣는 잘생겼다는 말이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샤오잔을 만날 수 있는 구실을 만들 수 있게 되어서 어쩐지 오늘 운이 좋은 것 같았다.
샤오잔도 일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왕이보를 만나게 되었고, 흔쾌히 자신을 영감의 재료로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줘서 운이 좋은 것 같았다.
두 번째 만남으로 저녁까지 함께한 두 사람은 메신저 아이디도 교환했다. 먼저 접근한 건 샤오잔이었지만 항상 먼저 말을 거는 건 왕이보였다.
하지만 마감에 치이는 샤오잔은 답변이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고, 왕이보는 초반엔 답이 바로 오지 않았지만 늦게라도 답을 주는 샤오잔이었기에 샤오잔과 이어진 끈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 * *

첫 만남 이후로 매일같이 연습실을 찾아올 것 같았던 샤오잔이었지만,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감이 코앞이라 바쁘기도 했고, 왕이보의 춤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허락을 받긴 했지만, 무작정 찾아가기엔 무례하다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덕분에 왕이보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제 올 거냐 물어보자니 자신이 기다리고 있으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안 오는 샤오잔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만든 춤이 있는데 봐줄래요?] 하면서 무작정 영상을 샤오잔에게 보냈다. 샤오잔은 춤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이보의 춤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좋았다. 하지만 액정으로 보는 느낌과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러다 춤 잠깐 보는 데 뭐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니까 한번 보러 가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 연습실도 아니고 일반 학원이고, 수업도 하고 있다 보니 무작정 찾아갈 순 없었다.

[영상 잘 봤어, 춤 멋있다. 너만 괜찮으면 직접 보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아?]
"아자!!!!"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영상을 보내길 잘했다 생각하며 크게 파이팅 넘치게 소리 질렀다. 아무 때나 오라고 바로 답하려다가 혹시라도 수업시간 겹치면 대화하기 힘들 수 있으니 스케줄을 보내줄까 하다가 그러면 또 대화의 접점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지금은 수업 없으니까 지금 오시거나 아니면 오늘은 6시 이후로는 괜찮아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럼 지금 내려갈게.] 하고 답장을 보낸 샤오잔은 "나 잠깐 쉬고 올게." 하는 말을 남긴 채 답도 듣기 전에 훌쩍 사무실을 나가버렸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처음엔 가볍게 빈손으로 와서 왕이보의 모습을 눈으로만 담고 가던 샤오잔은 어느 날부터 아예 패드를 들고 와서 연습실 구석에 앉아 춤추는 이보를 보면서 빠르게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왕이보도 자신의 춤을 보는 사람을 의식하고 더 멋있어 보이려고 평소보다 힘줘서 춤을 추다가 갸웃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샤오잔의 시선을 느꼈다. 의식하고 추는 춤은 미묘하게 달랐고, 일반인이 본다면 느끼지 못했을 부분이었지만, 춤이 담고 있는 생동감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샤오잔에게는 좋은 영감을 주지 못했다.

이후로 왕이보도 춤추는 동안만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았고, 오롯이 본인의 춤에 집중했다. 한 곡이 끝나고 물을 마시면서 거울 너머로 작업 중인 샤오잔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패드 위에 펜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에 가볍게 웃고 있는 모습도 잘생겼는데,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또 잘생겼다 생각했다. 그러다 집중하고 있는 샤오잔의 입술이 오리 입처럼 뾰족하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중하면 저런 표정이구나......' 하면서 잠깐 쉴까 하고 샤오잔에게 다가갔다. 꽤나 집중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바로 앞에 앉았는데도 정면에 앉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고, 쭉 나와 있는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그 예쁜 사람을 다시 한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 빌었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그 이상을 하고 싶어진 이보였다.
닿고 싶고, 손잡고 싶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만남을 거듭할수록 샤오잔을 향한 왕이보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샤오잔에게 있어 왕이보는 그저 춤 잘 추는 학생이고, 본인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샤오잔은 집중하면 입술 나오는 거 알아?" 하면서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갑자기 눈앞으로 쑥 들어온 손에 놀란 샤오잔이 "아 미안! 뭐라고 했어?" 하면서 그제서야 땀에 젖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왕이보를 바라보았다.

"봐도 돼?" 하는 말과 함께 좀 더 다가온 왕이보의 더운 체온이 닿지도 않았는데 느껴졌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왕이보의 땀 냄새. 샤오잔은 그 냄새가 싫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직 스케치만 이어서 괜찮으면 봐"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보여주었다. 디자인 같진 않았고, 그냥 느낌 가는 데로 그린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낙서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샤오잔 나름의 패턴이 있었고, 샤오잔만 알아볼 수 있는 아이디어 저장 방법이었다.
하지만 왕이보의 눈에는 그 선들이 하나같이 다 역동적으로 보였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춤이 샤오잔에게 이렇게 보이는구나 싶어서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 보여?"
"음...... 널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하지......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은데, 어렵네."

이미 왕이보를 보고받은 영감으로 만든 디자인으로 따낸 계약들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갑자기 디자인 기계라도 된 것처럼 누가 봐도 멋진 작품을 뽑아내는 샤오잔에게 이유를 들은 동료 직원은 절대 그 뮤즈를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샤오잔도 왕이보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필요할 때 사주는 밥이 아닌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싶어졌다.

"이보야. 우리 그냥 계약서 하나 쓸까???"
"무슨 계약서?"
"네 덕분에 내가 지금 엄청 잘나가고 있거든? 그냥 밥 사주는 걸로는 내가 너무 미안해서......"

왕이보는 샤오잔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사적인 만남을 공적인 만남으로 바꾸려는 샤오잔의 말에 조금 서운했다. 아니 많이 서운했다. 그런 왕이보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오잔은 "소득에 몇 퍼센트 뭐 이런 식으로 계약서 쓸래?" 하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샤오잔의 스케치를 보고 기분이 좋았던 왕이보는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고, 왜 기분이 나쁜지 본인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샤오잔에게 "나 샤오잔 좋아해!"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러 담았다.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고백하고 싶진 않았다.

"나 오늘 좀 힘들다. 나 들어가도 돼?"
"어? 미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 배는 안고파? 저녁 먹고 갈래?"
"아니,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 형은 다시 회사 올라가야 되지?"
"아니, 괜찮은데? 집에 데려다줄까?"
"됐어, 혼자 갈 수 있어."

어쩐지 자신을 밀어내는 왕이보의 기운을 느낀 샤오잔이었지만, 힘들다는 왕이보의 이유를 그냥 믿기로 했다. 두 번이나 더 이야기했는데도 싫다 하는 왕이보를 더 이상 잡을 수 없었고,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힘들어서 그래." 샤오잔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 왕이보가 먼저 표정을 풀며 이야기했다.

"어, 그래. 그럼 난 사무실 들어갈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

이보는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어차피 바로 답장도 안 줄 거면서......'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기운 없이 연습실을 나가는 샤오잔을 붙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잡으면 그대로 고백이라도 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본 샤오잔은 할 말 많아 보이는 왕이보를 향해 더 이상 이유는 묻지 않고, 눈을 마주친 채 한번 웃어주고는 "문자 해."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왕이보는 고개만 끄덕여주고는 샤오잔과 마주친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문자하지 않았고, 샤오잔도 왕이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 * *

항상 먼저 물어보던 사람은 왕이보였고, 샤오잔은 언제나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간혹 [오늘도 연습실 가도 돼?]라고 물어봤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매번 미안해하면서 물어보는 샤오잔이 신경 쓰여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도 좋으니 문자 안 해도 된다고 먼저 말한 왕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과거의 자신을 질책했다.
왕이보는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할까? 근데 그날 기분 나쁜 티를 너무 많이 낸 것 같아서 샤오잔이 자기한테 질린 건 아닐까? 그래도 먼저 연락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 무렵 샤오잔도 왕이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그냥 오라고 했었지만, 며칠 전 헤어졌던 그날 왕이보의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그래서 기분이 풀리고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었다. 그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춤 영상만으로는 더 이상 뭔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 짜내고 짜내다 결국 더 이상 뭔가 떠오르지 않아 몰래 가서 보고 오면 되지 않을까 싶어 무작정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컴컴한 복도. 시계를 보니 이미 수강 시간도 다 끝난 늦은 시간이었다. 문도 닫겨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학원 안쪽에서 여전히 음악소리가 들려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려봤고,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슬쩍 문을 열자 안에는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 직원 한 명만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스르륵 열리는 문을 바라본 직원은 익숙한 얼굴에 "오랜만에 오셨네요? 마침 잘 됐다! 이보한테 아까부터 가야 된다고 좀 가자고 했는데, 영 갈 생각이 없어서요. 이보한테 문단속 잘 하고 가라고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부탁했고, 샤오잔은 웃으면서 잘 전달하겠다 말하고 퇴근하는 직원을 배웅했다.
왕이보가 항상 연습하는 연습실로 가까이 갈수록 음악소리는 커지고, 둥둥 울리는 소리에 심장도 같이 울리는 것 같았다.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문밖에서 작은 창으로 왕이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곡을 연달아서 춘 이보는 마지막 곡이 끝나자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그 모습을 숨도 안 쉬고 바라보던 샤오잔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직원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 진짜 갈게... 진짜 마지막..."

왕이보는 문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했고, "문 단속 잘 하고 가래" 하는 샤오잔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 왔어?"

샤오잔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듯한 왕이보의 물음에 미안하다며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며칠 만에 본 샤오잔의 모습에 놀라서 한 말이었는데, 샤오잔이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아 샤오잔을 잡으러 가려다 바닥에 있던 땀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괜찮아?"
"으...... 괜찮아...... 샤오잔 나 보려고 온 거 맞지?"

왕이보는 다가온 샤오잔이 다시 갈까 봐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너 아니면 여기 올 일이 없잖아. 아직 화난 거 아니지?"
"내가 왜 화났는진 알고?"

사회생활 n년차로 눈치 하난 빠른 샤오잔이었고, 왕이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왔어야지. 왜 이제 와?"
"미안. 근데, 너 내가 형인데 꼭 동생 대하듯이 말한다?"
"난 샤오잔이 나이 많다고 생각한 적 없어."
"뭐?"
"좋아해."
"넌 무슨 고백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냐?"

화날만한 일이 아닌데 기분 나빠했던 왕이보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샤오잔은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일이 있었고, 저렇게 이야기했더니 갑자기 연락이 없다고 했더니 '걔가 너 좋아하나 본데?'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럴 리가......'
'그냥 널 보면 좋고 너랑 있으면 좋고 네가 자기 봐주는 게 좋아서 계속 만나주는 것 같은데, 갑자기 돈 준다고 해봐라 기분 참도 좋겠다 그치?'
'그렇긴 하지...... 그래도 설마......'

동료의 말에 왕이보를 떠올렸고, 당시 그의 행동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 이야기 듣고 화난 사람 같았다. 딱히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왕이보를 통해서 영감을 얻고 함께하면 재미있었지만 연애 대상으로는 보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난감했다. 무엇보다 미성년자여서 더더욱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남자라서 안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왕이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샤오잔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왕이보가 샤오잔의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어? 아니 기분 나쁘진 않은데......"
"않은데?"
"왕이보 너 아직 미성년자고, 너 지금 연예인 데뷔 중인 연습생인 건 알아? 미성년이 성인이랑 연애하는 건 당연히 안되고, 연습생이 연애에 쏟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안 그래?"
"거절을 하려거든 좀 그럴싸하게 해."

샤오잔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거절 방법이었다.

"이제 한 달만 있으면 나 성인 되는 거 알지? 미성년인 거 문제없음! 연습생이 연애하는 거? 내 친구들은 다 하는데 뭐 연애도 문제없음! 그래서 나랑 연애하기 싫어?"

싫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샤오잔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마주한 시선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샤오잔은 그 눈을 피할 수 없었고, 마주한 눈이 가까이 다가와 맞닿기 직전 뒤로 물러났다.

"안돼!"
"난 또 내 눈을 너무 쳐다보길래 나랑 키스하고 싶은가 보다 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응"
"그거면 됐어, 내가 미성년자인 게 걸리는 것 같으니까, 한 달만 기다려, 한 달 안에 샤오잔도 날 좋아하게 만들 테니까!"

왕이보의 당찬 자신감에 샤오잔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이 친구를 이미 좋아하고 있었고, 아직은 왕이보와 같은 마음의 좋아함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왕이보와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오잔, 나 기다려 줄 수 있어?"

한 달 사이에 연인이 생길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이렇게나 일이 많은데 누굴 만날 생각이 들지도 않았지만 선뜻 왕이보의 물음에 답을 해 줄 순 없었다.

"나 성인 될 때까지 아무랑도 연애하지 마!"
"뭐?"
"샤오잔이 연애하고 있으면 그 사람한테서 샤오잔을 뺏어와야 하는데 상대한테 미안해지니까 기다려 달란 말은 안 할 테니까 연애만 하지 마"

당연하게 결국 자신을 선택할 거라는 왕이보의 어이없는 차선책에 웃음이 나왔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데?"
"달라!"

샤오잔의 웃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왕이보는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한 달 뒤에 두고 보자고 말하며 잡고 있던 손등에 입 맞췄고, 샤오잔도 잡힌 손을 굳이 빼진 않았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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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꽤 오랫동안 손 놓고 있던 연성러로 하여금 연성을 이끌어내게 한 왕샤오에게 박수를 보내며.....
키워드 [썸]을 생각하고 쓰긴 했는데, 썸보다는 [첫 만남]쪽이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썸타는 내용이 별로 없네요.
여튼,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합작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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