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xxx_gg
피서
프레임 속 샤오잔은 조금 유난스럽다. 발언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행동은 과도하다. 혼자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다 갑자기 멋대로 차분해진다. 이 정신 나간 인물을 두고 작가는 개성이 강하다 설명했고 감독은 감성적이라 표현했으며 샤오잔은 그냥.. 병신이라고 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 얜 그냥 병신이야. 물론 속으로만 그랬다.
배신자 새끼! 가만 안 둬! 지붕이 폭삭 내려앉을 정도로 빽빽 운다. 동생의 방에서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발견한 뒤 얘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 동생이 붙은 곳은 이 넓은 땅에서 고르고 섞고 발라낸 애들 중에서도 제일 똑똑한 애들이 가는 곳이랬다. 이 쓰레기 같은 집구석에서 어떻게 이런 게 나왔지! 헛바람 들지 않게 적당히 키웠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이 줄줄 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동생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자전거에 책을 한가득 싣고서. 책의 두께와 크기가 어릴 때 옆집 삼촌네서 본 백과사전만 했다. 책등에 투박하게 쓰인 이름이 낯이 익었다. 보건소 임 선생의 이름이었다. 또 또 또 그 노인네다.
얘의 부모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석가모니의 환생이라고 떠드는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갖다 바치는 말종들이었다. 주기적으로 미친 짓을 해대 마을 사람들의 혐오를 샀다. 그 노인네도 그랬다. 너희 부모는 야만인이다. 그런 집에 있어서는 안 돼. 그런 말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호시탐탐 동생을 노리더니 기어코 빼돌린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면 별천지가 있다며 동생을 살살 꼬드긴 것도 다 그 치다. 심심하면 골방에 처박혀 뜨개질이나 할 것이지 왜 남의 집을 들쑤셔서 이 사달을 만들어 놓느냔 말이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왜 이제 와? 어디 갔다 와? 뭐 했어?
동생은 하얗게 질린 채 마당에 서 있는 형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 붙잡혔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묻잖아. 말 걸지 마. 참지 못한 형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다음은 엉망진창이었다.
너만 살겠다고! 나만 두고! 나를 여기에 버리고!
과연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 동생은 눈앞에서 자지러지는 형을 노려보았다. 싫어하면 안 되는 사람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 사랑하려 매 순간 치열하게 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눈앞에 형이 너무나 역겨워 속이 다 쓰렸다.
대치는 곧 깨졌다. 컷 사인과 동시에 샤오잔은 큰 보폭으로 프레임을 벗어났다. 그늘 안쪽에 서서 몸을 어슷하게 기울인 채 가쁜 숨을 내쉰다. 대각선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 더웠다. 며칠째 폭염이었다. 정수리로 내리쬐는 불볕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몸은 젖은 빨랫감처럼 축 늘어졌고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됐다.
곁으로 다가온 한룽이 물병을 내밀었다. 샤오잔은 고개를 젓고 휴대폰을 달라 손짓했다. 모니터 좀 보여줘. 휴대폰 화면 속 가득 조금 전 제 모습이 비친다. 온통 새빨개져서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다. 정말 못되게 나왔다. 샤오잔은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만 볼래.”
눈을 감고 선풍기에 얼굴을 묻었다. 같이 더위를 먹어버린 선풍기는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미지근한 바람에 속이 울렁거려 샤오잔은 작게 앓았다. 저를 보던 고약한 눈빛이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물 마셔.”
물을 건넨 한룽은 바로 뒤로 물러섰다. 이럴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이제는 안다. 그가 안간힘을 써가며 인내하는 동안 할 일은 없었다. 중천에 뜬 해는 지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뜨겁고 지루했다.
“B팀은 언제부터 나온대.”
문득 샤오잔이 물었다.
“몰라. 아직 들은 거 없어.”
감독의 신경증에 A팀은 점점 시든 옷가지처럼 말라비틀어졌다. 수시로 고성이 오가는 현장이었다. 얼마전 스크립터와 막내 에프디가 나란히 그만둔 일로 감독은 더 괴팍해졌다. 누굴 죽이니살리니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데나 코를 박고 엎어져 있고 싶었다.
“이게 뭐야. 너 나 무시해?”
오늘은 배우가 그만둘 수도 있겠다. 심각한 분위기에 모두가 발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그 속에서 샤오잔은 혼자 심드렁했다. 하루걸러 이 지랄이다. 오늘은 동생의 차례였다. 동생은 감독에게 팔을 붙들린 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무전기를 들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남자애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좀 쉬고 계세요. 새로 온 막내 에프디였다. 오늘이 첫 출근이라더니 벌써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러마, 하고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정 지금 할까요.”
수영이 스프레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샤오잔은 몸을 뒤로 길게 젖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다 땄잖아.”
“다시 갈 거 같은데요.”
“잘 나왔는데 뭘 다시 찍어. 그냥 앉아서 쉬어.”
이리 와. 수영에게 옆자리를 내어주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새하얀 팔꿈치가 얼핏 스쳤다 사라졌다. 뒤이어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도.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정말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저거 왜 저래.”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익히 아는 낯이 아는 체를 해온다.
“안 더워?”
“삼촌 나 죽겠어.”
그는 이 촌구석에서 유일한 수퍼마켙 주인집의 아들로, 극 중 형의 소꿉친구로 나온다. 이름은 없고 그냥 삼촌이다. 그와는 출연작이 여러 번 겹치면서 서서히 가까운 사이가 됐다. 붙임성이 좋고 말솜씨가 뛰어나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멋대로 헤집어 놓은 그는 손을 탈탈 털며 대각선을 턱짓했다.
“막내는 또 왜 잡아? 지금 딴 거 네 바스트잖아.”
“몰라.”
“어깨도 안 걸렸는데 잡을 게 뭐가 있다고.”
그냥 혼자 너무 하얘서 열 받았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유가 없다는 소리야. 한룽, 얘 괜찮은 거 맞아? 한룽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피했다.
“밥 안 먹어? 지금 가도 될 거 같은데.”
“집 가서 먹으려고. 난 이게 막 신이야.”
“올라가?”
“응. 이제 다음 달에나 볼걸.”
형이 가면 난 이제 어디에 비비나. 너스레를 떠는소리에 함빡 웃는다. 쟤한테나 좀 비벼, 네 동생이잖아. 흐아암. 샤오잔은 하품을 쩍하며 선풍기의 세기를 올렸다. 옆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수영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히터예요? 샤오잔은 기겁하며 물러서는 애를 잡아다 집요하게 괴롭혔다. 간만의 평화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야!”
감독이 다시 발작했기 때문이다.
“중희 북전 나와도 단역밖에 못 하는 애들이 천지 빼까린데 안 쪽팔리냐?”
현장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단역밖에 못 하는 천지 빼까리 북전 출신 삼촌은 아주 얼이 빠졌다. 기가 찬 듯 꺽꺽대다 담배를 꺼내 문다. 샤오잔은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빨리 B팀 나왔으면 좋겠다. 아직 말 없지?”
“중반까지 버틸 거 같은데.”
“계속 저 새끼랑 있다간 정신 나갈 거 같아.”
그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이 드라마를 끝으로 고향에 내려가 벌꿀을 채집하면서 살기로 했다더니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난 이쪽 운은 없나 봐. 그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었다. 이 바닥은 운이 중요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운이 없으면 금방 굴러 떨어진다. 저기 쟤처럼.
“너 막내 좀 챙겨. 형이 돼서는 손 하나 까딱을 안 해. 쟤가 혼자 다니니까 저게 더 지랄을 하는 거 아냐.”
“삼촌이 챙기든가.”
“쟤는 나보다 네가 챙겨주는 걸 더 좋아할걸.”
그럴 리가 있나. 삼촌한텐 살가워도 나한텐 얼마나 무뚝뚝한데.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말 해봐야 또 유치하게 군다며 구박만 살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는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깨졌다. 멈춰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마당을 빠져나갔다. 그 속에는 동생도 있었다. 스크립터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조용히 구석으로 사라진다. 반소매 셔츠 사이로 뻗은 새하얀 팔뚝이 손자국으로 울긋불긋했다. 샤오잔은 땀으로 끈적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너무 더웠다.
*
“식사하시고 한 시 반까지 집합할게요. 한 시 반이요.”
볼이 푹 꺼진 막내 에프디가 비실비실 돌아다니며 외쳤다. 한룽이 벌떡 일어섰다.
“이동하자.”
점심은 만장일치로 만두였다. 현장에서 차로 십 오 분 거리에 유명한 만둣집이 있었다. 촬영만 하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 샤오잔도 그 집 만두는 곧잘 먹어 한룽이 자주 데리고 가는 곳이었다. 샤오잔은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삼촌을 불러 세웠다.
“같이 먹고 가.”
“됐어. 지금 올라가도 저녁에 도착한다.”
“먹고 가면 새벽에 도착하냐.”
“피곤해서 그래. 네 동생이나 챙겨. 나간다.”
그러더니 손을 휘휘 젓고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가로질러 간다. 돌아가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왜 나보고 챙기래. 다 큰애를. 샤오잔은 떫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내 어딨는지 알아?”
앞서가던 수영이 빠르게 대답했다.
“분장차에 있겠죠.”
또. 분장차에 아예 터를 짓고 산다. 막내는 매일 분장팀과 같이 밥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놀았다. 그냥 사이가 좋아 그런 줄 알았는데 회사가 없어 그렇단다. 재계약이 빠그라졌다나 뭐라나. 그래서 안면이 있는 분장팀이 자처해 그렇게 싸고도는 거라고 했다. 삼촌은 물론이고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채소가게 주인 명광씨도 아는 얘기를 샤오잔은 일주일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여태 단 둘이 붙는 신은 겨우 서너번 뿐이었고 대부분이 여럿이 함께 나오는 떼 신이라 길게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는 핑계고 기력이 없었다.
동생은 이 드라마에서 얘를 가장 처참하게 굴복시키는 존재로 중반까지만 등장한다. (이 드라마는 동생이 떠난 후 홀로 병자들을 떠안은 장남의 고군분투기… 면서 무려 휴먼드라마였다) 만나기만 하면 모진 말을 퍼부어 사람을 아주 반 조져놓기 일쑤였다. 대본인 걸 알면서도 가끔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상했다. 그래서 샤오잔은 그와 붙는 신이 달갑지 않았다. 저를 소 닭 보듯 하는 애 앞에서 맨날 혼자 힘쓰고 화내고 짜증 내고 처울기나 해야 하니까. 나만 슬프고 나만. 나만.
샤오잔은 골목 끝에 세워진 분장 차를 노려보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내버려 뒀더니 일만 더 피곤해졌다. 시간을 끌만큼 끌다 이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
“뭐해.”
계단을 오르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왕이보는 왼쪽 발목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둔 다소 껄렁한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분장팀은 어디 가고 웬일로 혼자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미간이 꿈틀한다. 저런 반응은 예상에 없었던 것이다.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이제 와 돌아 나갈 수도 없어 그냥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왜 혼자 있어.”
“다 밥 먹으러 갔는데요.”
“너는 안 먹어?”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느닷없는 등장에도 그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늘 그렇듯 미지근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보는 화장대 앞에 서서 수건 위에 올려둔 기계들을 하나씩 건드리며 말했다. 전원 꺼둬서 좀 기다려야 해요. 스트레이트기를 들어 코 밑에 대 열을 재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를 보러 온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나 부지.
“분장팀이야?”
“간단한 드라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필요해요?”
“진짜?”
놀라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요. 손 부족할 때만. 명광 아저씨도 내가 해줬어요. 삼촌도.
“난 그래도 너한테 안 맡길래.”
“그래요 그럼.”
미련 없이 손을 털고 웃어버린다. 얘는 웃는 게 예쁘구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어 입부터 열고 봤다. 날이 너무 더워. 그러네요. 조명 판 때문에 얼굴이 다 탔어. 너는 안 타고 빨개지는 것 같더라. 저도 타요. 어디가? 여기. 놀랍게도 얼렁뚱땅 대화가 됐다. 대충 던진 주제에도 반응이 성실했다. 뚝딱이는 건 저뿐이었다. 팔을 걷어붙이며 보라고 들이대는 바람에 한바탕 호들갑을 떨어야만 했다. 우와! 너 정말 하얗고… 탔구나! 솔직히 너무 놀랐다. 의외로 말을 잘해서. 의외로 싹싹해서. 의외로 안 무서워서. 의외로,
나를 싫어하지 않네.
손가락 마디 사이가 근질근질했다. 얘가 이리 살갑게 구니 조금 들떠버렸다. 불현듯 허기가 밀려들었다. 샤오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할 일 있어?”
“아뇨.”
“배 안 고파?”
“별로요.”
“그럼 나랑 같이 밥 먹자.”
별로라던 왕이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
혼자 가더니 둘이 되어 나타났네. 한룽은 차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꾸벅꾸벅 졸던 수영이 번쩍 눈을 떴다.
“앞으로 와.”
“왜요?”
창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그제야 앞으로 넘어온다. 무슨 일이래. 놀라움도 잠시 그녀는 다급하게 현장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사인받아도 돼요?”
“이보?”
“네.”
“팬이었어?”
그러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제 질문의 어디가 그녀의 의기를 드높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경기도 보러 갔었어요. 두 번이나.”
“뭐야. 왜 그동안 모르는 척했어.”
“왜겠어요.”
한룽은 기가 차 웃었다. 별걸 다 눈치 본다.
“내가 받아다 줄게.”
“너무 티 내지 말고요. 은근슬쩍.”
“나 그런 거 완전 잘해.”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잠자코 끄덕인다. 더운 바람이 훅 끼치고 두 사람이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탔다. 뒷좌석을 향해 몸을 돌린 한룽이 빠르게 쏟아냈다.
“얘니팬이래사인좀해줘경기도두번이나보러갔대.”
곧장 퍽 소리가 났다.
*
도착했을 때 만둣집은 이미 만석이었다. 주변이 허허벌판인 동네라 올 때마다 널널 했던 곳이 오늘따라 시장 한복판처럼 북적였다. 인근에서 공사를 하는지 손님은 전부 인부들이었다. 두 사람 다 식사 후 바로 다음 신이 아니라 촉박하지는 않았지만, 수정과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돌아가려는 일행에게 주인이 쪽방을 권해왔다. 쩌라도 드갈랍니까. 샤오잔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그러겠다 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쪽방은 어른 하나가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네 사람은 바짝 붙어 앉아 몸을 웅크렸다. 맞은 편에 앉을 줄 알았던 왕이보는 자연스레 샤오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 바람에 어깨와 허벅지가 찰싹 들러 붙었다. 하필 둘 다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살결에 닿는 감촉이 너무 적나라해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좀 떨어져 보겠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왜 그러냐는 듯 빤히 쳐다본다.
“더워요?”
쪽방이어도 사람이 생활하는 곳이라 있을 건 다 있었다. 18도에 맞춰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그렇다 할 수가 없어 샤오잔은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살 닿는 게 불편해.”
“아.”
그러자 어깨를 비틀며 벽으로 달라붙는다. 샤오잔은 불편하게 구겨진 왕이보를 끌어당겼다. 그냥 있어. 한룽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몸에 열이 많아서 그래.
“땀 많이 흘렸으니까 냄새날까 봐.”
도로 어깨를 붙여 앉은 왕이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나요.”
“그래? 다행이다.”
주인이 음식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판이 작은 상 위를 빈틈없이 채운다. 대화는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동안 잠자코 만두만 먹던 수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 대회는 안 나가시나요? 잔뜩 수줍어하는 태도에 샤오잔이 대놓고 비웃었다. 너 진짜 웃겨. 수영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왕이보는 고민하듯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가 그 전에 끝날 것 같긴 한데, 연습을 못 해서.”
“아 그러시구나….”
샤오잔이 물었다.
“몰랐어. 언제부터 선수였어?”
“사 년 됐어요.”
“연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너 재주가 좋구나.”
“그건 선배고.”
“나?”
그는 음식을 깨끗하게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어떻게 알아?”
“인터넷 켜면 나오니까.”
그 말 대로다. 샤오잔은 대단히 잘 나갔다. 스물네 살에 데뷔해 처음 찍은 영화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터진 후 단 한 번의 하락세 없이 현재까지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어딜 가도 그를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쓸 수 있는 건 한 번쯤 다 저를 거쳐 갔다. 덕분에 아주 부자가 됐다.
“저 그거 자주 들어요.”
“뭐.”
“작년에 춘절 방송에 나와서 부른 노래요. 제목 기억이 안 나.”
“아 그거.”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춘다. 샤오잔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상 모서리에 시선을 두고 입만 오물거렸다. 식사는 순식간에 끝나고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한룽과 수영이 먼저 일어섰다. 차 열 좀 식히게 잠깐 있다 들어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진 샤오잔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둘만 남은 공간에 공백이 오래 머물렀다. 왕이보는 따분해하는 기색 없이 얌전히 기다렸다. 찬바람에 살결에 소름이 돋을 때 즈음 샤오잔이 입을 뗐다.
“이보.”
“네.”
“오늘 끝나고 뭐해?”
“운동가요.”
“잘됐다. 나랑 술 마셔. 내 방에서.”
그는 이번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네.”
거침없는 대답은 샤오잔을 고양되게 했다. 간지러운 기분에 풀썩 웃음이 터졌다. 먼저 문을 나선 샤오잔이 힐끗 돌아보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너 되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기다렸으니까.”
고저 없는 소리가 중심을 관통한다. 가슴께가 묵직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인지 돌아볼 수 없어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주변이 시끄러운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자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다.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대본을 봤다. 대본을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허심탄회한 분위기를 주의하며 영양가 없는 얘기만 하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됐다.
“여기서 꼭 가야겠냐고 묻잖아.”
“네.”
“나 이 대사가 너무 싫어.”
내일은 온종일 매달려 울고불고하는 신이었다. 하는 짓이 단세포 아메바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대본을 팔락팔락 넘기다 거칠게 덮어버렸다. 아, 나 얘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소파 등에 뺨을 기대고 느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왕이보가 히죽 웃었다.
“이거 왜 했어요?”
“드라마?”
눈썹을 까딱하며 몸을 더 늘어뜨린다. 아주 편안해 보였다. 졸린 것 같기도 했다.
“회사에서 엄청나게 우겼어. 한 번쯤은 이렇게 후진 거 해줘야 자극이 된대.”
“무슨 자극?”
“요즘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한대. 울고불고 쓰러지고 불쌍한 거.”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이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샤오잔은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수가 있나! 반응이 웃긴 지 눈을 접고 푸스스 웃어버린다. 선배 우는 게 예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요. 턱을 당긴 샤오잔이 웩,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희한한 소리를 하네.”
“모니터 보잖아요.”
그게 뭐. 눈을 흘기자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준비된 게 없어 적막은 자주 찾아왔다. 샤오잔은 다시 대본을 펼쳤다. 닳도록 외운 대사가 오늘따라 설익은 밥알처럼 입안을 겉돌기만 했다. 왕이보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엄지로 검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소곤소곤 대사를 읽어내리는 목소리가 귀를 살살 파고든다. 남의 손을 타지 않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은 말갛고 아무렇게나 말린 머리카락은 수더분해 보인다. 문득 그를 처음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학교의 위상을 높인 졸업생의 신분으로 축하 연설을 하러 왔었다. 하늘색 정장 차림의 그가 유독 화사해 자꾸만 시선이 갔다. 졸업생들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바란다며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이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뒤로 마주치는 일은 당연히 없었지만, 텔레비전이나 길거리 포스터 속의 그와 마주할 때면 생각이 났다. 그때뿐이었지만. 그를 생각하지 않고도 왕이보는 잘만 먹고 살았다. 그러니까 분명히 첫눈에 반한 건 아니란 소리다.
고작 두 캔에 몸이 빨갛게 달아오른 샤오잔이 몸을 옆으로 길게 뉘었다. 고동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허벅지를 살살 간질인다. 한 뼘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의 냄새가 났다. 햇빛에 바짝 말린 이불에서 나는 냄새와 닮았다. 너무 포근해 얼굴을 파묻고 싶을 만큼. 왕이보는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그가 알면 학을 뗄 만큼 너저분한 것들 말이다.
샤오잔은 대본으로 얼굴을 덮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별로야 별로. 손을 뻗어 대본을 거둬간 왕이보가 눈으로 물었다. 무엇이?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피로하게 느껴지면 안 되는데, 그게 잘 안돼.”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입술을 불퉁 내민다. 긴 한숨 끝에 울컥 토해내는 목소리가 허탈했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는 거 같아.”
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속이 너무 상해. 샤오잔은 그 말을 끝으로 잠들었다. 전원이 나간 로봇처럼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그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거둔 왕이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가 쪽으로 화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직접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했다. 잎이 넓적한 화초는 마른 곳 하나 없이 푸르싱싱하다. 타지에서 외로움을 견뎌내는 방법조차 그다웠다.
매일 아침 화초에 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만 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