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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A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있는 건 무엇 하나 값비싸고 고급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왕이보 단 하나만 빼고. 그곳에는 아마 일하는 종업원조차 그와는 다른 세계에 다른 원리로 사는 사람일 테다. 본인이 이쪽 끝에 서 있다면 건너편 끝에 있는 건 아마―그러나 분명히― 이 남자이다.
기품을 사람으로 빚어놓은 듯한 그는 성대한 파티 속에서 꽤나 단출한 차림새로 보였으나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도 그가 이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먹이사슬의 최상단 포식자라는 걸 알았다. 어렵진 않았다. 그를 30분 정도만 관찰하면 유치원생들도 금방 알 사실이다.
그는 그곳에 저만 있는 양 웃어 재꼈다. 마시던 잔은 아무 데나 내려놓고, 또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웨이터를 손가락 두 개로만 불렀고, 통행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누구든 간에 밀치고 다니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왕이보는 그를 보며 사람이 가진 여유와 자신감은 물질로 환전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마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일 테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인파를 헤쳐 그에게 다가갔다.
“좋아해요.”
샤오잔은 바로 폭소했다. 왕이보가 꼬박 달 두 번 차오를 동안 고심한 수많은 말 중 딱 한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우아하게도 내려놓았다. 웃느라 벌게진 얼굴을 손부채질하고 이따금 뺨을 지그시 누르면서도, 정성스레 만져진 머리칼이나 화장품이 옅게 발린 얼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신경 쓴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그러더니 곧 왕이보를 위아래로 훑었다. 웃음기는 가시지 않았으나 명백히 의미를 달리하는 미소였다.
“기가 막히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 하는구나?”
“……”
“야. 정신 차려. 너 피해자야.”
“……”
“그렇다고 내가 가해자란 소린 아니야. 알지?”
남자는 왕이보가 뭐라 더 떠들기도 전에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소음 속에 묻힐뻔한 말을 겨우 주워봤으나 달리 의미는 없다. 밥이나 잘 챙겨 먹던가. 그 말에 샤오잔 주변 사람들은 왕이보를 조롱하며 그의 뒤를 쫓아 자리를 떴다.
LIMA - 01
왕이보는 예초기를 짊어 멨다. 올해 들어 처음 하는 제초작업이었다. 아직 풀이 억세지 않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할아버지 말에 고개는 끄덕였으나 그는 결국 밭으로 나왔다. 집에서 게임기를 붙잡고 있는 것도, 생각 없이 티비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질렸다.
반평생을 촌에서 나고 자라 도시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부모와 달리, 왕이보는 매년 여름방학 한 달을 꼬박 뛰놀던 이 남쪽 동네를 제 마음속 고향 삼았다. 어머니는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마치 의무감에서 해방된 듯 그를 외조부에게 보내지 않게 되었으나 왕이보는 뜻밖에 저 스스로 그 동네를 찾았다. 다 큰애가 무어가 재미있어 그 깡촌을 찾느냐는 말에는 대답을 뭉뚱그렸다.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 보러 가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그게 어머니든 아버지든 친구들이든 더 되묻지 않았다. 효심 한번 지극하다 싶었을 테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부모는 번쩍이고 화려한 도시에서 자수성가해 중산층의 멋들어진 삶이 만족스러웠겠으나, 그걸 처음부터 갖고 태어나버린 왕이보에게 도시는 소음일 뿐이었다. 미취학아동 시절부터 가정교사와 도우미 손을 타고, 의무교육 시절에는 그래프 경쟁을 하고, 그대로 대학에 진학해 서로 벼랑 끝에 내모는 각박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것들보단 따뜻한 시골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그뿐이다.
그의 조부모가 있는 동네는 유채로 유명했다. 볕 잘 들고 기온이 온화해 근방보다 일찍 유채꽃이 피는 곳이었는데, 그걸 나물로도 해 먹고 기름도 받고 하다 보니 마을 이름보다 유채꽃 마을이라는 명칭이 더 먼저 들어섰다. 현대 들어서는 평탄한 마을 전체에 유채꽃이 피어있는 모습이 장관이라 관광 목적으로 찾는 여행객 또한 늘었다. 그래봤자 유채에 꽃이 피면 수확이 어려워져 마을 사람들은 꽃피우는 걸 탐탁지 않아 했으나, 어떻게 나라님들이 해결해주셨단다. 덕분에 마을 어귀부터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큰 길목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관상용 밭도 따로 생겼다.
왕이보가 그 동네에 꼬박 한 달 묵어가는 건 매해 여름이었으니, 그는 그게 유채라는 걸 알면서도 꽃 피운 건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오죽하면 초등학생 때는 그게 할머니 할아버지 밥벌이인 줄도 모르고 밭 일부를 망치기도 했다. 그게 유채인 줄 알았나, 그냥 무성한 잡초인 줄로만 알았지. 조부모 집에도 걸려있는 꽃밭 액자처럼 그것에 올망한 노란 꽃망울이 붙어있었더라면 그도 그걸 개미굴 판다고 파헤치진 않았을 거다.
아무튼, 왕이보는 올해도 이 동네에 왔다. 다른 게 있다면 올해는 무려 꽃이 피는 계절이라는 거다. 솔직한 심정으로 마을 전체가 노랗게 물든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제초는 핑계고 그는 오늘도 그냥 꽃구경하러 밭으로 나선 셈이다. 운 좋으면 가는 길에 근처 사는 고양이도 만나고, 냇가에서 오리 떼라도 구경하고.
할아버지 말대로 제초작업은 별 일거리가 없었다. 채 봄도 되지 못한 날씨에 잡초가 무성할 리도 없었으니 그가 가져온 예초기는 십 미터 걸을 때 한두 번 시동을 걸다 말았다. 왕이보는 결국 계획을 틀어 더 깊숙한 밭으로 향했다. 산어귀까지 가면 그래도 할 일이 있겠지. 할아버지 소유지는 아니었으나 거기 등산로 입구라도 정리해두면 왕이보도 덜 심심하고 등산객도 좋고 할아버지 할머니 동네 체면도 서고 좋지 않겠나. 그 근처에는 대충 올라 낮잠 잘 정자도 있었다. 그는 거기까지 걸으며 누워 자면 추울까 아닐까나 걱정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만 생각하며.
“미친….”
유채꽃밭 한가운데 있는 정자까지 가려면 역시 꽃밭을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빨랐다. 거긴 동네 주민들이나 드나드는 곳이라, 제대로 된 길은 따로 없었고 꽃밭 사이로 고양이 새끼 하나 지나갈 만한 오솔길만 있어 저 멀리 길에서 내려다보면 꽃을 짓밟으며 걷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정도로 꽃에 묻혀있는 길이다.
그래도 길은 길인지라. 왕이보는 발에 뭐가 채여 넘어질 뻔했을 때만 해도 으레 상상할법한 걸 떠올렸다. 나무뿌리라던지 동물이라던지 누가 두고 간 농기구라던지. 그래서 경쾌하게 욕설을 뱉고 뒤돌았을 때 느낀 그 섬뜩함이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평생 모를 거다.
“미친, 이게…. 이게 대체…….”
왕이보는 새파래진 얼굴로 그걸 내려다봤다. 그 좁은 길에 삐쭉 튀어나온 사람 다리를. 그는 그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부디 그 다리 끝에 사지 멀쩡한 몸뚱이가 있길 바라며.
다리 주인은 거기 그렇게 엎어져 있었다. 유채꽃밭에 파묻힌 채로. 왕이보는 한순간 술 처먹고 잠든 동네 사람이길 간절히 빌었으나, 그 사람 머리와 근처 꽃들에 선연한 붉은색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꾹 참았다.
머리 다친 사람은 자고로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랬다. 그는 남자에게 손댈 생각도 못 하고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으나, 불발됐다. 신호도 똑바로 안 터지는 산어귀에 휴대폰 따위 가지고 올 필요도 없었으며 있어봤자 구급차가 예까지 오지도 못할 테다. 그는 결국 왔던 길을 도로 달렸다.
***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을 많이도 했다. 경찰서는커녕 파출소에도 들어가 본 적 없는데 신고자라는 이유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고, 운동장에서 무릎 까져 들어갔던 양호실 이후 처음으로 약내 진동하는 병원에 틀어박혀야만 했다.
사실 반나절 정도야 이 모든 것에 놀라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유치한 영웅심리로 병실 한편을 지키고 앉았었지만, 당최 몇 시간이 흘러도 정신을 차리긴커녕 아무 변화도 없는 이방인을 지켜보고 있는 건 지루하기 짝이 없어 고약했다. 그런데도 왕이보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남자가 눈을 뜰 때까지 보초선건 다름 아닌 의료진의 지나가는 한마디 때문이다.
“보호자분도 무리하지 마시고 쉬세요.”
“아, 네….”
그는 의자를 당겨 앉고 잠시 내려두었던 게임기를 도로 집어 들었다. 왕이보가 근 삼 개월간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새로 등장한 필드 몬스터를 꽤나 간단히 제압했다.
남자가 눈을 떴다. 우려와 달리 달랑 이틀만이다. 왕이보는 그가 얼마나 중상이었는지, 머리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외한이었기에 그가 쏟아내던 피의 양에 비해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역시 그 출혈은 사람이 제정신으로 깨긴 어려웠던 모양이라.
“모르겠는데요.”
그는 정신을 차린 이후 저 말만 반복했다. 의료진들이 묻는 꽤 많은 질문에 도통 괜찮은 답을 하질 못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냐 물으면 스물아홉이라 했다가 곧 서른이 넘었던 게 확실하다고 했으며, 직업을 물으면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답했다. 사건의 경위는커녕 지금 제가 있는 동네의 이름조차 생소해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딱하나, 제 이름 하나 기억했다.
“잔(贊)이라고 해요.”
“그게 다예요?”
“그거요. 칭찬할 때…….”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성은요?”
“모르겠는데.”
그렇게 답하고 도로 읽던 잡지에 고갤 처박는다.
남자는 조금만 더 세부적인 질문을 하면 대놓고 말을 돌리고 고개를 돌렸다. 하루 온종일,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조금만 심기가 뒤틀리면 모른다 기억 안 난다 하기 일쑤였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집도 모르겠고,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웃기는 소리였다. 그 사람의 피범벅 된 옷들은 전부 턱 떨어질 만한 가격의 명품들이라는 걸 담당 형사에게서 첫날 들었다. 그리고 남자는 잘 개켜진 그 얼룩진 옷들이 제 것이라는 이야길 듣고서도 시큰둥하니 반응이 없었다. 세탁소에 맡겨드릴까 물었더니 핏자국이 빠지겠냐며 이제 필요 없는 옷이라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어 거짓말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런 게 반복이었다. 왕이보는 결국 사흘째 되는 날, 꼭두새벽부터 의사를 찾아가 저 인간 백 프로 거짓말을 하는 거다 주장했으나 막상 담당의는 웃으며 고갤 저었다. 마냥 다 거짓이라기엔 분명 기억을 어려워하는 부분이 명확히 확인되기에 나이롱환자라 땅땅 못 박을 수는 없단다. 오히려 특정 기억에 대한 거부, 외면, 거짓말 등이 그가 환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는 소리에 왕이보는 차마 더 무어라 말 못 하고 병실로 돌아와 앉아야 했다. 무엇보다 일단 머리에서 철철 흐르던 피는 꿈이 아니었던지라.
아까 여길 박차고 나갈 때만 해도 이 사기꾼 고자질할 생각만 했는데, 돌아올 때 되니 그냥 좀 애처로운 사람이다. 돈도 많은 사람이 뭐 하다 뒤통수를 흉기로 얻어맞고 밭에 쓰러져 있었는지. 아니, 그 돈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 친구야.”
“예?”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왕이보를 대충 불렀다. 이름을 다섯 번 알려주었는데 매번 잊어버리고 저따위로 부른다. 저것도 고의가 아니고 아파서 저러는 거라고? 왕이보는 다시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아냈다.
“나 너희 집에서 좀 지내자.”
세상에. 저렇게 개같음이 밀도 있게 차 있는 문장은 난생처음 듣는다. 반말은 그렇다 치고, 통보형의 어미 종결이라니 말이 안 된다.
왕이보가 대답도 없이 얼이 빠져있어도 남자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차근차근 앞으로의 계획을 떠들기 시작했다. 계획이래 봤자 가는 길에 지 몫의 칫솔이랑 옷을 사야 하니 너 현금 있냐라던가 자기는 못 먹는 게 많으니 네가 알아서 피하라던가 지저분한 꼴 못 보니 청소가 어떻고.
남자가 한참 떠들고 나서 이제 다 말했으니 출발하자고 링거를 뽑으려 들었을 때나 되어서 왕이보는 진심으로 막혔던 기를 단전부터 풀어내려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우선 그가 함부로 링거를 만지지 못하게 제지한 다음 너스콜을 때려 부술 기세로… 때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잔은 왕이보와 눈을 마주치고도 무해하게 끔뻑이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조류입니다. 완성된 글로 찾아뵙고 싶었는데 내용음 점점 길어지고 수습이 안되어 결국 끊어내게되었습니다.. 삶과 덕질의 병행이란 쉽지않군요.. 모처럼 끊게된거 다음편 다다음편도 쭉 가져오려구합니다..! 그럴 기회를 주신 합작주최 너무 소중하고 감사해요🥺 다들 즐거운 왕샤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