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gmrmF3fwZXLkP
*필모페스, k-패치
연상을 소중히 할 것
- 나만 모르는.
“너 술 마시지 말랬지.”
뒤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어깨를 짚었다. 시끄러운 술집 안에서도 그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주 앉아있던 동기들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채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 낯을 한 진우가 서 있었다.
진우는 오늘도 왔다.
“이번엔 또 누가 알려줬어!”
“빨리 일어나. 데려다줄게.”
진우는 이미 채정의 가디건을 챙겨 든 채였다. 진우의 등장으로 잠시 조용해졌던 동기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채정을 보낼 준비를 했다.
“형 잘 들어가!”
“내일 수업 때 봐.”
“난 진짜 말 안 했음.”
“진우 선배 기다리시잖아. 우리 편하게 놀게 빨리 가, 그냥.”
“다음번엔 꼭 들키지 말고 달리자.”
웃음기와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저마다 인사를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며 빈 의자 위로 널브러진 가방을 챙기던 진우가 마지막 목소리에는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 농담을 던졌던 동기는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했다.
“진짜 누군지 자꾸 얘한테 이르는 거 나한테 들키면 가만 안 둬.”
채정은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진우가 건네주는 겉옷에 팔을 뀄다. 성의 없는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채정과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르는 진우는 B대의 두 유명 인사였다. 한 학교에 한 명만 있어도 놀라울 미남이 미대와 체대에 두 명이나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 사이라며 붙어 다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 커뮤니티에는 ‘오늘 체대남신 혼자 밥 먹던데 미대에 무슨 일 있음?’, ‘ㅊㅈ 지금 수업 째고 편맥하네ㅋㅋ이거 ㅈㅇ한테 들키면 또 끌려가냐ㅋㅋㅋ’ 하는 식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곤 했다. 커뮤니티를 이용하지 않는 채정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동기들은 재미있다며 굳이 알려주지 않았고, 진우는 채정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다. 그 덕에 진우의 지인들은 직간접적으로 채정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진우에게 알려주곤 했다. 채정은 이 안에 진우의 앞잡이가 있다며 끊임없이 동기들을 의심했지만 워낙 눈에 띄는 인물이라는 게 그의 비극이었다.
학교와 집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버스로는 십 분, 천천히 걸으면 삼십 분쯤 걸렸다. 쟤 오늘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했었는데. 채정이 제 옆에서 걷는 진우를 살펴봤다. 공부할 때에만 끼는 안경을 벗지도 않고 왔다. 피곤한지 평소보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같이 가.”
낮은 목소리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진우는 꼭 그랬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채정을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채정도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 주택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진우와 채정은 별말 없이 거리를 걸었다. 혼자 걸었던 것보다 둘이 걷는 게 훨씬 익숙한 길이었다. 둘이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골목이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여름, 채정은 아담한 정원이 딸린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바쁜 어른들 당부대로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앉아있기에는 좀이 쑤신 나이였다. 트럭을 타고 오며 근처 담벼락에 길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보았다. 잠깐만 구경하고 와야지 맘을 먹고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다 똑같이 생긴 골목을 뱅뱅 돌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엄마가 찾으러 올 거야. 그렁그렁 한 눈으로 입을 앙다물고 인도 한가운데에 서 있던 채정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 해? 아이스크림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를 보고 채정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놀란 아이는 채정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제집으로 데려갔고, 그 앞에서 사색이 된 채 집을 나서던 채정의 부모를 마주쳤다.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은 얼마 뒤였다. 애가 며칠 앓아서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어요. 옆집 아주머니는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들고 진우네를 찾아왔다. 진우는 엄마 손을 잡고 그 뒤에서 나오지 않는 옆집 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얗고, 마르고, 작고, 겁쟁이고, 또 울보였다. 아무리 봐도 자기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 손을 잡아당겼다. 내 방 가서 간식 먹자, 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약했던 채정은 어릴 때부터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여덟 살에 입학해야 하는 학교도 일 년을 미룰 정도였다. 또래와 어울릴 일이 적었던 채정은 틈만 나면 저를 찾아오는 진우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채정이 아홉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던 일은 아직까지 채정이 진우를 놀릴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진우도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같이 등교하고, 하교하고, 숙제하고, 노느라 종일 붙어있었다. 너희 다른 친구들이랑 안 어울리니? 부모들이 걱정스레 물으면 둘은 똑같이 대답했다. 얘가 제일 친한 친군데요? 채정이 종종 병원에 입원하면 가장 많이 병문안을 왔던 것도 진우였다. 중학생이 되고 급격하게 나빠진 몸 상태로 한 학년을 쉬게 됐을 때도 퉁퉁 부은 얼굴의 채정에게 그래도 이제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말해줬던 것도 진우였다.
- 운동장 나오지 말라니까.
- 크로키 연습하러 나온 거거든?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
둘은 당연하게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채정이 여전히 또래보다 작았다. 진우는 중학교 삼학년 때부터 쑥쑥 자라 또래들 머리 하나를 웃돌았다. 채정은 몸을 쓰는 것보다 손재주가 좋았다. 병원에 입원해서 심심풀이로 시작한 그림은 이제는 꽤 진지한 취미가 되었다. 진우는 손재주는 젬병이었지만 몸을 쓰는 일에 재능이 있었다. 채정이 없는 동안 사귄 친구들과 틈만 나면 축구니 농구를 하러 다녔다. 체대 진학 권유를 받았다고도 했다.
진우가 없는 교실에서 채정은 외톨이었다. 저 형 우리보다 두 살 많다며? 왜 쉬었대?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목소리는 채정에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출석일 만큼이나 병결일이 많은 탓에 친해질 만한 시간도 없었다. 채정은 고장 난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봤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진우가 보였다. 책상에 펼쳐져 있던 공책은 그런 진우를 따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부터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 스탠드로,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로 내려오게 됐다. 당연히 진우는 채정을 발견하자마자 한 번씩 나와 말을 걸었다.
- 물 놔둘 테니까 목마르면 마시고, 햇빛 너무 따가우면 들어가. 목 아프면 바로 양호실 가고.
- 나 이제 그렇게 안 아프다고!
빽 소리를 지르는 채정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씩 웃은 진우가 운동장으로 돌아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진우가 향한 쪽에는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큰 눈이 반짝이는 여학생이 서 있었다. 채정도 아는 얼굴이었다. 공부도 잘하는데 예쁘고 성격까지 좋다며 유명한 진우네 반 반장이었다. 양 뺨이 붉어진 채 수줍은 미소를 짓던 반장이 진우에게 이온음료를 건넸다. 진우는 단숨에 캔을 비우더니 상대의 손을 꽉 쥐었다 놨다. 씩 웃는 미소는 조금 전 채정을 향했던 것과 같았다. 채정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네 둘 진짜 사귀는 거 맞나 봐. 속삭이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진우는 어느새 운동장으로 돌아가 공을 쫓고 있었다.
태양이 진우만 따라다니는 것 같은 이유가 있었다. 크로키 핑계를 대고 진우를 그리고 싶던 이유가 있었다. 진우의 웃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던 이유가 있었다. 하루 종일 진우와만 붙어있어도 즐거웠던 이유가 있었다. 채정은 그걸 진우를 만난 지 십일 년 만에야 깨달았다.
휴학을 했던 중학교 일학년 이후로 크게 아픈 적이 없던 채정은 오랜만에 크게 앓았다. 미열로 시작된 불씨는 온몸을 태울듯한 거센 불길이 되었다. 창백하게 질려 땀을 뻘뻘 흘리고, 발작하듯 내뱉는 기침에 피가 섞였다. 온 뼈마디가 욱신대며 아팠다. 며칠은 입원을 해야 했고 며칠은 집에서 쉬었다. 그동안 진우는 만나지 않았다. 진우를 볼 수가 없었다.
진우는 마지막으로 봤던 채정의 멀뚱한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누구보다 채정의 안색에 예민한 진우는 그게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알았다. 틈틈이 스탠드를 볼 때 채정이 없길래 변덕을 부려 교실로 돌아간 줄만 알았다. 몸이 좋지 않아 양호실에 누워있다는 메시지를 봤을 때 수업 시간이래도 당장 채정을 찾아가 봤어야 했다. 하교 후 찾아간 채정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와 메시지조차 답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집을 찾아갈 때마다 채정의 어머니는 난처한 미소만 지었다. 정이가, 안정이 좀 필요해서…….
채정이 학교에 다시 나오게 된 뒤로는 더했다. 열흘 만에 등교를 했다는 얘기도 옆 반 그 형 얼굴 살이 싹 빠졌더라 하는 얘기를 주워듣고 알았다. 뛰어서 찾아간 교실에는 채정이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라지는지 머리끝도 볼 수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메세지에 답장도 없었다. 다음날 등굣길에 채정을 기다리다 지각을 하고 나서야 채정이 자길 피한다는 확신을 했다.
채정도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볼 거 다 본 소꿉친구를 내가 좋아한대. 그것도 자각하고 엄청 아플 정도로 좋아한대. 언제부터 진우를 좋아했는지도 도저히 모르겠대. 우정인 줄 알았던 게 다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조금 징그럽기도 했고, 그런데도 진우를 떠올리면 심장이 뛰어 죽을 것 같았다. 자기를 걱정하는 진우를 보고 기분이 좋으면서도 진우를 속이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채정은 틈만 나면 울었다. 부모님이 걱정하는 걸 알아도 우는 것 말고는 이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줄 몰랐다. 그런데도 점점 진우를 봐야만 하는 날이 다가왔다. 별수 없다. 정리가 될 때까지 피해 보자. 채정은 결연히 다짐했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진우는…… 독한 녀석이었다.
진우 몰래 등교하는 세 번째 날, 채정은 현관문을 열다 말고 기겁하며 문을 닫았다. 담장 너머 진우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평소 둘이 등교하는 시간보다 삼십 분 이른 시간이었다. 채정은 문을 닫고 진우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지각이 분명한 시간인데도 진우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엄마, 미안해. 채정은 속으로 생각하며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약한 체질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네 번째 날엔 두 시간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진우네 집 문도 열리는 걸 보고 몸을 돌려 뒷담을 넘어 몰래 나갔다. 쉬는 시간엔 학교 지리를 이용해 교실과 가까운 매점이며 특별실로 숨었고 하교 때는 병원 핑계를 대고 종례를 하지 않고 튀었다. 며칠을 이어지는 추격전에 진이 다 빠졌다. 이것도 진짜 못할 짓이다. 채정이 교복을 입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또 한편의 추격전을 찍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 너 키 컸냐?
채정이 다시 문을 닫기 전에 발을 끼워 넣은 진우가 말했다. 헉. 채정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날카로운 눈빛이 채정을 샅샅이 훑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붉어진 눈이었다. 어쩐지 핼쑥해 보이기도 했다. 눈치 없는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크게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 너, 너 어떻게 들어왔어. 엄마가 열어줬어?
- 나한테 말할 게 그거밖에 없냐?
진우가 얕은 한숨을 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 나 왜 피하는데.
채정이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미리 준비해놨던 핑계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와중에 갈라진 목소리에 설레는 자신이 싫어졌다.
- 내가 뭐 잘못했어?
-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창피했어.
채정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잘못이 있다면 친구에게 엄한 마음을 품은 자신의 탓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좀 튀어나왔다. 진우가 다시 고개를 들어 채정을 내려다봤다.
- 넌 건강하고 친구들도 많고 학교생활도 잘하는데, 나는 친구도 너밖에 없고 할 줄 아는 건 없고 맨날 아프기만 하잖아. 그래도 내가 형인데, 그게 좀……. 아무튼 미안.
핑계를 대다 보니 저도 몰랐던 속마음이 줄줄 나왔다. 이거 제법 그럴듯한 변명인데? 스스로 감탄을 하며 별것 아니라는 듯 준비해놨던 이유도 덧붙였다.
- 그리고 나 미대 가려고 준비 시작해서 좀 바빴어. 형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 형은 무슨. 별것도 아닌 거로 고민하면서.
진우가 채정의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제 눈치를 보느라 주눅 들어있던 채정의 눈매가 금세 뾰족해졌다. 머리 만지지 말라고 투덜대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진우도 한마디 덧붙였다.
- 그럼 B대 가는 거지? 같이 가면 되겠네.
- 어, 어? 어, 그래.
그러고는 오랜만에 같이 등교를 했다. 밥도 같이 먹고 공부도 같이하고 집에도 같이 가고 그러다 보니 진짜로 같은 대학에 왔다. 이상하다, 그냥 도망칠 핑계였는데. 그것도 쟤가 선배라니. 채정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옆에서 진우가 채정을 살폈다.
“피곤해?”
“피곤하긴 네가 더 피곤하겠지. 너 교양 신청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엄청 빡세다며?”
“어. 죽겠다.”
“난 진작 탈주했는데. 히히. 시험 끝나도 레포트 있다는데 진짜임? 동아리 선배가 그거 족보 있다는데 구해다 줄까?”
진우는 옆에서 쫑알대는 채정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허약하고, 할 줄 아는 것도, 친구도 없다던 채정은 뒤늦게 웃자라 이제는 진우보다도 키가 컸고, 한번 실패를 했어도 차석으로 대학에 들어왔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을 몰고 다녔다. 웃는 얼굴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래도 술은 안 돼.”
단단히 하는 말에 채정의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그래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은 얼굴이었다. 채정이 장난스레 진우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울 엄마 아빠도 안 말리는데 왜 잡느냐고 왜!”
“몰라서 물어?”
진우가 기가 막힌 듯 물었다. 채정이 그 말엔 다시 얌전히 옷을 놓고 주름까지 정리를 해줬다. 처음 술을 마셨던 날은 둘 모두에게 다른 의미의 흑역사였다. 그래도 채정은 투덜거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친구한테도 이렇게 구속하진 않겠다.”
“여자친구랑 너랑 같냐.”
덤덤한 말투에 채정이 잠시 몸을 굳혔다. 몇 년이 지났다.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고 자신도 했다. 그래도 가끔씩 서랍에서 튀어나오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늦게까지 휴대폰 하지 말고 얼른 자. 마지막 인사까지 잔소리를 하는 진우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슬그머니 방에 들어간 채정이 창가에 섰다. 진우가 채정의 방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이 분쯤 뒤에 왜 불을 켜지 않냐는 메세지가 왔다. 채정은 그제야 전등을 켰고, 진우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택시를 불렀다.
“아악!”
채정이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질렀다. 간질거리는 심장을 참을 수 없어 이제는 눈물 말고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발까지 동동 구르는 건 덤이었다.
*
“채정! 너 우리 몰래 어디 가?”
“헉. 나 잠깐 누구 좀 보고 올게.”
“야, 이 배신자야. 오빠 너 체육대회 참여는 못 해도 우리 응원해 주기로 했잖아.”
“뭐? 정이형 어디 가? 얘들아 채정형 도망간대!”
“잡아!”
대부분의 상황에서 채정은 동기들이 착한 애들이라고 생각했다. 동갑인 척하다가 세 살이나 많은 걸 들켰을 때에도 조금 놀리기만 하고 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존칭을 붙이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와서 채정이 제발 반말을 해달라며 애원했을 정도였다. 매일 같이 강의를 듣고, 때로는 강의를 째고 풀밭에 누워있고, 다 함께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갑작스러운 일탈을 하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이 모습을 보던 선배들은 좋은 한때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채정에겐 하루하루가 신났다. 심지어 중간고사마저도 그랬다. 다 같이 밤샘을 하는 것조차 행복했다.
중간고사 이주 뒤 예대에서는 체육대회가 열렸다. 중간고사 시험 대신 실기나 과제를 제출하는 예대인들에게 체육대회란 미치기 딱 좋은 행사였다. 거기에 이, 삼등에 걸린 상품이 엄청나다 보니 중간고사 대체 과제 대신 현실도피로 체육대회 준비에 힘을 쏟는 학생들도 있곤 했다. 채정의 동기들이 그쪽이었다. 스트레스에 미쳐버린 동기들은 달밤에 작업하다 말고 뛰쳐나가 계주 연습을 하고 축구며 발야구 연습을 빙자한 공놀이를 해댔다. 물론 채정은 거기에서 빠졌다. 나 진짜 무리하면 쓰러진다니까? 미쳐버린 미대생들은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채정을 잡아끌었다. 새파래진 채정이 숨을 색색 내쉬며 휴대용 호흡기를 한참 대고 있는 모습을 본 뒤로는 만장일치로 응원만 하기로 했다. 채정도 미안한 마음에 한껏 응원만큼은 열심히 하려고 했었다. 아침에 받은 전화만 아니었다면. 과에서 맞춘 트레이닝복 대신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채정은 평소보다 더욱 눈에 띄었다. 장난기 많은 동기들이 우르르 채정을 따라갔다. 어차피 점심을 먹을 때였다.
“아까 그 정문에서 본 외국인?”
“응. 언제 또 봤냐.”
“오빠 외국인은 어떻게 알아?”
“아, 그게... 나 재수할 때에 잠깐 파리에 있었거든. 그때 만난 친구야. 나 보러 온다고 하긴 했는데 진짜로 올 줄은 몰랐음;”
스물한 살은 정말 힘들었다. 체대를 준비하는 진우와 미대를 준비하는 채정이 함께 다닐만한 근처 학교로는 B대가 유일했다. 그러려면 실기는 물론 성적도 철저하게 관리를 해야 했기에 힘들 수밖에 없던 때였다. 그 와중에 진우는 점점 더 좋아져만 갔다. 감정을 처음 자각했을 때에는 이보다 더 커질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엔 한계가 없다는 사실만 하루하루 깨달아갔다. 접어야 한다고 억지로 마음을 먹으니 스트레스는 몇 배가 되고, 그 와중에 늦자라기 시작한 키 탓에 매일 밤 제대로 잠도 자기 힘들었다. 위염 때문에 병원에 다니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채점 한 시험 성적은 아슬아슬한 커트라인이었다. 진우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으면서 더는 희망 고문을 받기 싫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실기시험 전날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게 B대 실기시험장에서 졸았던 합리화가 되진 않았다. 마무리 도중 붓칠을 삐끗했다. 인생을 모두 망친 것만 같았다. 진우와도 결국 잘될 수 없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냐고 묻는 진우에겐 밝게 웃어주고 집에 와서는 유학을 알아봤다. 머리도, 마음도 모두 깨끗하게 비워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진우가 입학을 준비할 때에 채정은 파리의 학원과 숙소를 준비했다. 진우에겐 대학에 가기 전에 파리에서 미술 공부 좀 하고 싶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렸다.
스물두 살의 봄도 쉽지 않았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꼽았다. 그래도 채정은 파리가 좋았다. 진우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겨워졌던 그림도 조금은 좋아졌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꽃으로 근사하게 장식해둔 근처 카페테라스에서 라떼를 마시며 간단한 스케치를 하는 것은 하루의 즐거운 일과였다. 가브리엘은 카페 바리스타였다. 단골이 된 동양 남자애에게 몇 번이나 무시당하면서도 잡담을 건네는 성격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여름엔 조금 익숙해졌다. 얼마 전까지도 진우를 떠올리기만 해도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웃을 수 있었다. 떨어져 버린 대학들을 생각해도 가슴이 쓰리지 않았다. 주변에 화방을 찾아 캔버스에 그림을 도전해 보기도 했다. 언어가 짧고, 당황하면 굳어버리는 탓에 무시해버리고 만 가브리엘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이만하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자존심 상하니까 대학은 b대로 갈 거야. 혼자 다짐하기도 했다. 팔월 오일, 귀국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학원 근처 빵집에서 작은 케이크를 사며 했던 다짐이었다.
- 채정.
환청인 줄 알았다. 그래도 고개가 번쩍 들리고 눈을 굴려 주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파리지앵 사이에서 회색 티에 청바지를 입은 멋없는 차림의 진우가 보였다.
- 야. 너 공부하러 온 거 아니고 도피성이라며.
- 아씨, 엄마가 말했지!
반 년 만의 만남은 허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반가운 마음 사이로 설레는 마음이 조금 고개를 들이밀긴 했다. 진우는 어제 도착했다고 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지는 못했지만 채정이 아는 맛집에서 채정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었다. 가끔 하는 상상 속에서나 있던 일이었다. 식사 후에는 채정이 사둔 케이크와 도수가 낮은 와인을 사들고 센강으로 갔다. 파리에 오면 에펠탑이지. 건너편에서 에펠탑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강물도 밤이 되어 야경이 비치니 아름답게만 보였다. 진우가 옆에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 생일인데 왜 여기 있어? 일행은 없고?
- 너 만나고 싶어서 나 혼자 왔어.
진우의 목소리에 채정이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주변 전등이 드리워져 진우의 얼굴이 빛났다. 진우가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년 내내 다잡아놨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채정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진우 너 형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 좋아하지. 넌 나 안 좋아해?
늘 그랬듯 덤덤한 목소리였다. 참을 수 없었다. 나도 그래. 작게 속삭인 채정이 진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겨우 스치기만 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진우가 깜짝 놀란 듯 몸을 뗐다.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채정의 눈과 달리 진우의 눈은 당황스러움만 담아내고 있었다. 채정의 안에서 해일이 쳤다.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 파리에 왔으면서 유럽식 인사를 몰라?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단 인사야.
금방이라도 아까 먹은 음식을 게워낼 것 같았다. 금세 창백해진 채정이 급하게 일어서자 진우가 따라 일어나 채정을 부축하려고 했다. 채정은 가볍게 그 손을 뿌리쳤다.
- 미안해. 너 만나서 즐겁다고 오랜만에 과식했나 봐.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 호텔 도착해서 연락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진우가 부르는 것 같았지만 이명 때문에 확신할 순 없었다. 눈물이 어룽거려 사물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 뛰어와 자신을 붙잡았다. 조금은 기대했다. 눈물을 떨궈 맑아진 시야에 가브리엘이 있었다. 이 넓은 파리에서,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우연히 가브리엘을 만나는 것보다 진우가 자신을 쫓아와 잡아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건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채정에 당황하지 않고 근처 바로 데려갔다. 가브리엘은 좋은 청자였다. 엉엉 울며 자기도 못 알아들 말을 내뱉는데 심각하게 들어주고 맞장구를 쳤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브리엘의 파트너가 하는 바라고 했다. 가게 일을 돕다가 채정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날 채정에겐 파리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가브리엘은 진우도 채정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지만 채정은 더는 자신을 희망 속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진우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 파리까지 온 진우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 진우가 더이상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싫었다. 조금 체해서 그랬다고, 내일 다시 보자는 연락을 남겼다. 걱정을 담은 메세지가 진우답지 않게 장문으로 왔지만 그건 모른 척했다.
가브리엘은 진우를 궁금해했지만 채정은 귀국할 때까지 진우의 사진조차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채정에게 가브리엘은 말했다. 언젠가 내가 찾아가서라도 만나고 말 테야. 그의 집념을 가볍게 넘긴 탓이었을까. 채정은 정말로 가브리엘이 파리를 떠나올 줄은 몰랐다. 아침에 도착한 음성 메세지에 B대 앞에서 보자는 내용이 담겨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왜 말도 없이 왔냐는 타박에 가브리엘은 그저 깜짝 이벤트라며 씩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저를 보자마자 끌어안는 가브리엘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급하게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도 가서 인사해 봐야지.”
“삼십 대 외국인 아저씨한테 인사해서 뭐 해. 아 그만 좀 따라와!”
“그 삼촌 모델처럼 생겼던데 누드모델 해달라면 해줄까?”
“되겠냐?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밥이나 먹고 이따 보자고, 좀!”
채정이 질색할수록 달라붙는 동기들은 되도 않는 농담을 던졌다. 가브리엘과 만나기로 한 분수 주변엔 사람이 많았다. 작은 소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봤다. 예대 운동장으로 향하던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누드모델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귀에 꽂혀 들렸다.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익숙해 고개를 돌려보니 채정이었다. 채정은 진우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였다. 유난히 키가 큰 외국인이 성큼성큼 채정에게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채정의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또 뭐라고 투덜대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둘은 익숙하게 양 뺨을 부딪혔다. 얼핏 입술이 닿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채정만 아무렇지 않은 듯 제 무리를 이끌어 사라졌다. 친구들을 서로 인사시켜주는 것 같았다. 채정이 사라진 곳을 빤히 응시하던 진우도 다시 몸을 돌렸다.
체육대회의 정수는 계주가 틀림없다. 역전승의 꽃을 피워내는 종목이 아니던가. 채정도 달리기를 좋아했다. 물론 보는 것만 좋아해 왔다. 자신이 선수로 나간다는 것은 초등학생 이후로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채정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늘 생각했다. 겨우 한 학년 위인 이 선배가 그랬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자신을 아니꼬워한다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채정이 신입생 중 차석이고, 사실은 세 살이 많고, 내실 있는 중견기업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하나씩 밝혀질수록 그의 미움이 깊어지는 것이 보였다.
“야. 너 오늘 아무것도 안 나갔다며. 대타 좀 뛰라는 게 그렇게 어렵냐?”
계주 선수 중 하나가 직전에 있던 농구 결승전에서 발목을 다쳤다고 했다. 어차피 계주에서 이등을 해도 삼등 안에 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잘 뛸만한 사람을 추리던 중에 학생회 소속이라던 그 선배가 채정을 콕 짚어 불렀다. 채정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 얼굴에 난처함이 서렸다.
“어차피 순위권 안에 드는 건 글렀고. 단합대회나 마찬가지인 거 모르냐? 왜 너만 빠져? 남들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연습하고 대회 나왔어?”
“.......”
“어쭈. 대꾸 안 해? 내가 우습냐?”
“아닙니다.”
선수는 나오지 않고, 미대 쪽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느껴졌는지 운영석에서 사정을 살피러 오기 시작했다. 채정을 잡는 선배는 눈치채지 못했다. 주위에는 일, 이학년밖에 없는 데다 늘 고까웠던 채정이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보자 기묘한 우월감에 괜히 어깨가 으쓱였다. 뭐라고 한마디를 더 먹여주고 싶었다.
“무슨 일입니까.”
운영을 맡은 총학생회 일원이 아니었다. 꽤 달려온 듯 진우의 숨이 조금 거칠었다. 채정의 앞을 가리고 선 진우가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아, 그게, 우리끼리 일이 좀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형?”
채정에게는 꼬박꼬박 야야 거리던 그는 동갑인 진우 앞에서는 기가 죽어 우물거리며 존대로 말끝을 흐렸다. 진우는 채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채정이 중학생 이후로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호칭까지 덧붙였다. 채정은 진우를 슬쩍 밀어냈다.
“알겠습니다. 계주 나갈게요.”
“뭐?”
진우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진우는 채정이 얼마나 아팠는지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 중 하나였다. 채정이 진우의 팔을 잡았다. 진행 요원이 거의 다 다가온 게 보였다.
“대신 정말 의의만 둬주세요. 저 진짜 못 달려요.”
채정이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마침 다가온 진행 요원에 의해 채정은 어영부영 계주를 위해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진우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진우가 뭐라 말하기 전에 채정이 선수 쳐 말을 꺼냈다.
“진우야. 나 이십 대 건장……은 좀 아니고, 튼튼……도 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이제 나름대로 건강한 남자야. 무리만 안 하면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진우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무리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채정은 진우보다 다섯 번째 주자였다. 마지막 주자인 진우와 세 차례 차이가 났다. 출발은 미대가 빨랐다. 물론 체대는 논외였다. 배턴을 이어받는 건 수백 번도 더 봐왔다. 채정이 초조한 듯 침을 삼켰지만 자세는 제법 그럴듯했다. 어느새 채정의 차례가 다가왔다. 미대는 여전히 선두그룹이었다. 체대를 제외하면 채정이 가장 먼저 배턴을 이어받았다. 반 바퀴만 달리면 된다. 진우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체육대회에 목숨을 걸던 동기들을 생각하니 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하나둘 채정을 앞질러 가는 선수들이 보였다. 채정도 이를 악물고 달려 배턴을 넘겼다.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세우고 숨을 골랐다. 뒤에서 쫓아오는 선수가 없어 그대로 응원석으로 향했다. 크게 무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운동을 너무 안 해서 그런지 좀…… 생각보다 힘들긴 했다. 숨이 거칠고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재수 없던 그 선배 새끼에게 겁이나 좀 줄 생각이었다. 힘 빠진 다리로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동기에게 힘들다고 칭얼거리며 다가가 무릎에 툭 기대어 누웠다. 그래도 조금만 쉬면 금방 괜찮아질 정도였다.
“어, 어?”
그때였다. 마이크로 중계 요원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울렸다. 채정의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야? 왜 이리로 와? 채정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 진우 선배 눈 뒤집혔는데요……? 채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을 뜨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진우는 늘 저 멀리에서도 채정을 알아보는 선수였다. 채정이 잠수를 탔던 이후에는 과보호로 따라잡을 사람도 없었다. 스피커로 체대 마지막 주자가 경로를 이탈해 미대 쪽으로 가고 있다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의 이목이 결승선보다 미대 응원석에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성난 황소처럼 체대 학생들이 진우를 쫓아오기 시작했다는 누군가의 속삭임도 들렸다. 채정에게 무릎을 내줬던 동기는 슬쩍 채정의 머리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자리를 옮겼다. 채정은 눈을 뜨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했다는 소문이 도는 게 덜 창피했다. 여기서 눈을 뜨면 보게 될 광경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우야 제발 그냥 보건 센터로 옮겨줘. 그나마 남들 눈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게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채정!”
진우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예대 체육대회 개최 이래 처음으로 음대가 일등을 했다는 소식도 스피커 너머에서 울렸다. 미대는 꼴찌였다. 음대 말고는 아무도 결과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채정은 모르겠지만 진우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채정을 바로 눕히고 손을 주무르며 그의 상태를 살피는 내내 그랬다.
사실 채정을 보자마자 눈치챘다.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리는 속눈썹이나 새빨개지기 시작한 귓불이 보였다. 진우는 채정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 귀신같은 사람이었다. 그냥 힘들어서 눈 감았던 거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채정이 괜찮다는 것을 인식하자 온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졌다.
문득 창백하게 질린 채정의 뺨에 시선이 갔다. 손을 주무르며 스친 손등의 살결은 부드러웠다. 저 흰 뺨은 그것보다 훨씬 보드라웠다. 작년 여름,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던 피부의 감촉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 볼을 스치던 이름 모를 외국인의 입술과 환히 웃던 채정의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헉.
정적 속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소리가 울렸다. 채정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우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아니, 제 입술과 진우 입술이 맞닿아있었다. 진우 얼굴 너머로 잔뜩 모인 사람들이 얼핏 보였다. 다들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머리에 과부하가 왔다. 진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공호흡.”
진우 목덜미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채정만 눈치챘다. 진우가 인파를 헤치고 자리를 떴다. 그제야 주변은 난리가 났다. 진우 너 나만 여기 버리고 떠나면 어떡하는데! 아니, 그보다 이게 대체 뭔데!!!
채정은 진심으로 기절하고 싶었다.
- 고백 편에서 계속
먼저,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주최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쓰고 싶은 게 정말 많았던 글이에요. 고백 편과 연애 편까지 생각은 해뒀는데 아직 갈 길이 구만리네요(...) 남들은 다 알고 자기들만 모르는 썸도 썸이라고 주장해 봅니다.ㅎㅎ
후기에 적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는데 막상 쓰려니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후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생각보다 길어져서 지루할 수 있는 글인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