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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위

@bjyx_rg

유채꽃 로망스


 
 
짐이랄 것도 없이 홀쭉한 백팩 하나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가는 길이 얼마나 고단할지 알아서였다. 섬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버스, 비행기, 기차, 또다시 버스, 배를 거쳐야만 했다. 그나마도 배편은 하루에 하나뿐이라 시간에 못 맞출까 봐 뜀박질하는 다리까지 생각하면 그 과정이 지난했다. 가까스로 올라탄 배로 45분을 이동하면 마침내 섬에 발을 들이밀 수 있었다. 집에서 출발한 지 꼭 열한 시간 만이었다.
왕이보를 먹이고 길러낸 섬이다. 남쪽에 붙어 있어 대체로 뜨뜻한 이 섬에서 할아버지와 둘이 다붓하게 지낸 세월이 거의 20년이었다. 한 명은 부지런히 컸고 한 명은 부지런히 늙었다. 섬은 왕이보가 어렸을 때와 지금이 큰 차이 없었다. 예전에 비해 낚싯대나 카메라 든 가방을 짊어진 관광객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데도 그랬다. 고작 2년 남짓 떠나 있었다고, 이미 도시물 먹어 버린 왕이보에겐 유난하게 이 섬이 작게만 느껴졌다. 높은 건물도 없이 띄엄띄엄 웅크린 집들이 전부인, 아주 작은 섬.
낡은 선착장에 발 들여놓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잘 도착했냐는 걱정의 말도 없이, 오는 길에 상회 들러서 유채 기름 짜 놓은 게 아직 남았는지 물어보라 했다. 있으면 한 병 외상 달아 놓고 사 오라고. 집 들어오며 길가에 호박 익었으면 적당히 하나 따 오라고도 덧붙였다.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왕이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나뿐인 가족을 너무 막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고, 이보 왔네?”
섬 크기 자체가 아주 작은 건 아니라서 그래도 이곳에 널찍널찍 터전 잡고 사는 게 백오십 가구 정도는 된다. 하지만 20년을 이곳에 살다 보면 결국 다 아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세 걸음에 한 번씩 사람들이 알은체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안녕하셨어요.”
“그래, 도시 생활은 괜찮고? 인물이 더 훤해졌네.”
“그냥 그래요.”
왕이보가 원체 말수 없는 걸 알아서 사람들은 말을 시키고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꾸벅꾸벅 인사를 해 가며 느리게 상회까지 걸었다. 지내던 곳은 아직도 쌀쌀하여 아침저녁으로는 겨울 같았는데 여기는 완전히 봄인 듯 후덥지근했다. 걸치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 가방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낡은 철문을 살짝 들며 옆으로 밀었다. 일주일에 한 번 육지에서 물건 들여오는 상회 내부는 조금 휑했다. 매주 수요일에 물건이 들어오는데 오늘이 월요일이라 그런 듯했다. 안쪽에 딸린 작은 방, 낡은 TV 앞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누워 있던 아주머니가 문 열리는 소리에 목만 들어 시선을 삐쭉 올렸다. 왕이보는 꾸벅 인사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이구, 세상에! 네 할아버지가 요 며칠 얼굴이 훤하더니 손주 오려고 그랬나 보네. 예뻐진 것 좀 봐.”
아주머니는 신발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와 왕이보의 어깨를 연신 두들겼다. 그리고 도시 사람 다 됐다는 감탄을 몇 번이나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여덟 번은 들었던 소리라 왕이보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기름 짜 놓은 거 남아 있으면 사 오라고 하셔서요.”
“안 그래도 따로 빼놨다. 좀 전에 할아버지가 전화하셔선 그거 팔면 귀한 손주 헛걸음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
아주머니는 질린다는 듯 웃으며 방 한구석에서 기름병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돈은 네 할아버지한테서 받을 테니 가지고 얼른 가라는 말에 왕이보는 고개를 꾸벅했다. 아주머니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까마득히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아주머니는 이제 아주머니란 말도 무색하게 할머니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자기도 같이 키운 것처럼 흐뭇하게 왕이보를 보곤 했다.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으로 상회를 나서려는데 아주머니가 혼잣말했다.
“이 코딱지만 한 섬에 잘생긴 총각이 둘이나 있어 아주 훤해, 응.”
잘생긴 총각? 왕이보는 문득 이 섬의 몇 안 되는 총각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잘생긴 축에 두고 말하자니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머니가 저렇게 말할 인물이 저 말고는 떠오르질 않았다. 새로운 총각이 이 섬에 굳이 이사 올 리 없으니 얼굴 반반한 낚시꾼이라도 왔나 싶었다. 사실 상회 아주머니는 허풍도, 넘겨짚기도 심한 편이니 굳이 진지하게 들을 필요는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할아버지의 얼굴이 요 며칠 훤했던 게 손주 반가워 그랬을 거란 추측이 그랬다. 왕이보는 할아버지가 훤했던 이유를 알았다.
- 나 연애한다.
대뜸 먼저 전화를 하셔서 무슨 일이라도 했나 철렁했던 왕이보는 순간 평생 멀쩡했던 귀를 대뜸 의심했다. 왕이보가 본 할아버지는 왕이보가 기억하는 내도록 혼자였다. 그리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절대 필요 이상의 말이 나오는 일 없는 입에서 ‘연애’라는 말이 나온 게 믿기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제는 좀 병원도 가까운 뭍으로 나가서 둘이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조그만 밭도 어쨌든 재산이라 처분해야 하고 구색뿐이라 해도 어쨌든 가게 역시 정리해야 나갈 수 있으니 와서 그 일을 좀 도우라고 했다.
먼 길 오는 동안에도 내내 ‘연애’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냥 이 섬의 돌밭에서 스스로 태어난 사람 같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간지러운 단어 같았다. 할아버지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왕이보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련히 알게 되리란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누구인지까지 들으면 이 요상한 기분이 더 심해질 것 같아서.
할아버지의 집은 선착장에서도 30분은 훨씬 넘게 걸어야 나왔다. 버스며 기차, 배에다 몸 싣는 건 말할 수 없이 고단했는데 막상 또 걷는 길은 그다지 힘든 줄을 몰랐다. 어린 시절 땀 뻘뻘 흘리며 열심히 뛰어다니던 길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눈 감고도 자빠지지 않고 끝에 다다를 만큼 훤한 길을 느리게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마을에 가장 볼 만한 곳이 나올 것이었다. 마침 요 며칠 날이 푹해졌으니 꽃들이 말도 못 하게 그득할 것이다.
할아버지도 상대 할머니, 혹은 아주머니와 꽃밭에서 데이트했을까. 왕이보는 꽃밭이 나오기도 전에 멈춰 서선 문득 든 생각을 없던 걸로 지워 버리고만 싶었다.
평생을 이 섬의 계절과 냄새 속에 살아온 그의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 뛰어서 5분은 족히 될 땅에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닷바람이 불 때면 노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특별히 꽃에 감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떠나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올린 풍경이 이것이라 자연히 걸음이 멎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이 띄엄띄엄 꽃밭 사이에 심겨 있었다. 꽃을 두 눈으로 보기만 하질 못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꺾어다 귀에 꽂고 입에 물어 가며 사진을 찍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차피 꽃이야 꺾어도 내년에 또 자랄 테니 크게 언짢지는 않으나, 썩 보기에 좋은 광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게 영 언짢은 사람이 하나 있는 모양인지, 저 멀리서 큰 소리가 났다.
“꽃 꺾었으니까 300위안!”
낯선 남자 하나가 조그만 낚시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채 외치고 있었다. 낮은 낚시 의자에 앉기엔 터무니없이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접은 남자는 얼굴에 영 귀찮고 성가시단 기색이 역력했다. 대충 걸친 푸른 셔츠가 꽃보다도 더 화려하게 눈길을 잡아챘다. 왜 저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지 싶을 정도였다. 남자의 앞에는 박스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매직으로 공들여 쓴 글자가 이랬다.
‘입장료 30위안. 
(꽃 꺾으면 300위안 벌금)’.
벌금은 왜 저렇게 작게 써 놨지. 왕이보는 꽃밭을 향해 대충 팔 휘젓는 남자와 허접한 박스 간판을 번갈아 보았다. 왕이보는 이곳에 거의 평생 살면서 꽃이 피고 지는 것도 꼭 그 햇수만큼 보았지만 입장료를 받는 건 난생처음 봤다. 애초에 이 꽃밭은 주인이 없었다. 가끔 거름철에 깻묵 뿌리는 정도는 동네 사람들이 안 까먹으면 간혹 손 빌 때마다 돌아가며 했지만, 딱히 주인이 없는 데다 수확 없이 꽃대 올라오게 둘 곳이라 따로 솎아 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저들끼리 싹을 틔우고 번지고 하다 꽃밭이 되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외지인인 사람이 입장료와 벌금을 받고 있는 게 조금 기가 막혔다. 남자의 발치에 놓인 낡은 밀폐용기에 정말로 돈이 몇 푼 놓여 있어서 더 그랬다. 저게 농담이 아니라니.
하도 뚫어지게 바라보니 얼결에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웃으며 간판을 톡톡 두드렸다. 들어가려면 30위안 내란 소리에 왕이보는 얼굴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냥 지나갈 마음이었던 데다, 사기꾼에게 돈을 낼 마음일랑 조금도 없었다.
그때 남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왕이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 물러났지만,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다가오는 남자가 생각보다 키가 무척 크고…… 잘생겨서였다. 문득 상회 아주머니가 말한 잘생긴 총각 중 한 명이 누구인지 알았다. 남자는 왕이보를 가만 보더니 물었다.
“혼자 왔어?”
대뜸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진 몰라도 일단 혼자 온 건 맞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다 알겠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뭘 달라는 것 같기는 한데 당최 뭔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재촉하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핸드폰.”
“왜요?”
“사진 찍어 줄게. 혼자 왔다며.”
“됐어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일단 사기꾼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남자는 꿋꿋하게 손을 거두지 않았다.
“돈 안 받을게. 어차피 나도 심심하고.”
“사진 필요 없어요.”
“거, 믿고 좀 맡겨 보라니까.”
남자는 급기야 왕이보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거의 낚아채듯 가져갔다. 카메라 어떻게 켜? 하고 묻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알아서 켰다.
“자, 거기 서서 저쪽에 느티나무 보고. 촌스럽게 여기 보지 말고. 아이, 예쁘다. 그렇지. 아이, 좋다.”
얼결에 떠밀려 사진까지 찍혔다. 핸드폰을 들고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남자를 봤는데 그는 별다른 행동도 없이 순순히 폰을 먼저 건네주었다.
받아 들고 화면을 보니 사진이 생각지도 못하게 제법 그럴싸했다. 심지어 다른 관광객들이 앵글에 걸리지도 않아 절묘했다. 정말로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단 게 조금 놀라웠고, 초면에 괜한 의심을 했나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마을 회의에서 유채꽃밭 입장료를 받기로 했고, 마을을 떠나 있던 자신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정말로 필요 없었던 사진이지만 일단 고맙다고 했다.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 눈매며 시원시원한 입이 보는 사람 넋 빠지게 곱고 잘나긴 했다. 바람이 불자 남자가 입은 매끄러운 재질 셔츠가 슬쩍 부풀었다. 사람 홀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는 아쉬운 듯 덧붙였다.
“꽃밭 가운데서 찍으면 사진 더 잘 나오는데. 어때? 내가 사진은 공짜로 찍어 줄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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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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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밭 꿰차고 앉은 이상한 남자 때문에 정신이 없어 호박 따 가는 걸 잊었다. 결국 짐만 내려놓고 도로 집을 나서야 했는데 슬쩍 꽃밭 쪽을 내려다봤을 때 그는 어디로 갔는지 안 보였다. 뭐에 홀린 것 같기도 했다.
길에서 마구 자란 못생긴 호박 하나 대충 따다 건네며 지나가듯 물었는데, 할아버지는 잠깐 고민도 안 하고 대뜸 말했다.
“샤오잔.”
“이름이 샤오잔이에요?”
“어.”
“그 사람이 유채꽃밭 앞에서 입장료 받던데.”
“그래.”
왕이보는 순간적으로 할아버지가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대꾸하는 사람과 여생을 보내기로 한 그 인내심이 대단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20년을 보고 산 손주도 가끔은 이렇게 속이 갑갑한데. 하지만 할아버지는 대답이 짧아서 그렇지 아주 무시하는 일은 또 없어서 왕이보가 넌지시 묻길 포기하고 이것저것 캐물으니 대답을 다 돌려주었다.
왕이보가 도시로 나간 뒤 한 달쯤 있다 그 사람이 배를 타고 들어왔다 했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 관광객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마을에 당분간 살기로 했다며 집을 구하니 사람들이 제법 술렁술렁했다고. 그냥 철 모르는 젊은 사람이니 저러다 또 섬 생활 지치면 그냥 슥 떠날 거라 예상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고 했다.
그런데 매일 하는 일도 없어 보이고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이나 조금씩 찍고 하던 이방인이 어느 날 마을회관에 돈 봉투를 가지고 왔다. 액수야 아주 크진 않았는데 그 돈의 출처가 기가 막혔다. 이제 막 흐드러지기 시작한 유채꽃밭에 앉아 입장료와 환경 훼손 벌금을 걷었다는 것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으레 어딜 가도 돈을 내니까.”
할아버지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이 틀리진 않아서 왕이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깊은 데가 자꾸 겸연쩍고 민망했다. 누구의 것도 아닌 걸 제 것인 양 꿰차고 앉아 돈벌이를 하나 했는데, 시킨 사람도 없이 혼자 앉아 그렇게 자원봉사처럼 돈을 걷고 마을에 주고 있었다니. 그런 사람을 공연히 마음속으로나마 사기꾼으로 몰아간 게 거듭 미안해졌다. 고작 2년을 도시에서 살아 놓고 그새 마음이 각박해진 게 우습기도 했고.
“좋은 사람이네.”
“그렇지.”
할아버지가 투박하게 말하며 고갯짓했다. 그만 떠들고 음식 나르란 소리였다. 밖에서 먹어?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투박하게 만든 식탁이 마당에 여전하게 놓여 있었다. 왕이보는 익숙하게 접시를 늘어놓았다. 언제 꽃을 따 왔는지 유채병(유채꽃튀김)까지 있었다. 기름 사 오라 호들갑 한 게 이것 때문인 듯했다. 각종 나물에 볶음까지, 소소해도 나름 가짓수가 제법 되었다. 반갑다고 얼싸안고 반겨 줄 성격은 못 되어도, 이게 할아버지 나름의 환대라는 걸 알았다. 네가 그리웠단 말을 할아버지는 밥 먹이는 걸로 대신 했다.
둘이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식사하는 동안 왕이보는 밥을 끝도 없이 밀어 넣었다. 그 음식을 군말 없이 비우는 게 할아버지 똑 닮아 무뚝뚝한 손주의 애정 표현이었다. 도시서 굶고 다니냐, 할아버지가 툭 쏘아도 그냥 묵묵히 못 들은 척했다.
“잘 먹고 다녀.”
“그러고 있어요. 그냥 오느라 힘들어서.”
면박을 주면서도 반찬을 자꾸 손주 쪽으로 밀어 주는 투박한 손을 외면하지 못해서 더 많이 먹었다. 반면에 할아버지는 평소의 반도 비우기 전에 젓가락을 놓았다. 슬쩍 걱정하니 그냥 나이 들어 그렇단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할아버지가 남긴 것까지 다 먹었더니 두 그릇 반을 비웠다.
밥상 치워 놓기가 무섭게 배를 꺼트리러 산책을 나가야 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다 눈에 낯선 집 하나를 찾았다. 원래 저곳엔 반쯤 무너진 나무집만 휑뎅그렁하게 남겨져 있었는데 벽돌을 바르고 지붕을 새로 한 듯 외관이 그럴싸했다. 저 집이 아까 만났던 그 유채꽃 남자, 그러니까 샤오잔이란 사람의 집이겠거니 했다. 아직 안 자는지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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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작은 동네라 중개인이 없었다. 할아버지 소유의 집과 작은 밭, 가게를 처분하기 위해서 왕이보는 몇 번이나 뭍으로 나가는 배에 올랐다. 아침 8시에 섬 떠나는 배가 있어서 타고 나가면, 돌아오는 배편은 오후 4시에나 있었다. 볼일이 일찍 끝나도 꼼짝없이 시간을 죽이며 기다려야 했다. 이런 사정이야 일찍이 알고 있어서 애초에 공부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배에 타곤 했다. 그게 벌써 나흘째였다.
섬에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며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셰이크를 시켜 놓고 책을 펼쳤다. 문 바로 근처 창가 자리였다. 배가 오는 대로 짐을 챙겨 나가야 하니까 여기만큼 좋은 자리가 없었다.
고급중학 3년 과정까지를 아슬아슬하게 마치고 왕이보는 학업을 접었다. 대학이란 건 없는 애초에 없는 선택지였다. 섬에는 당연하게도 대학이 없고, 학교를 다니자면 결국 도시로 나가야 했다. 할아버지를 혼자 남겨 두고 나가는 건 꿈에서도 생각지 않은 일이라, 대학 비슷한 얘기도 안 꺼냈다. 그냥 흙에서 태어난 지렁이가 흙에서 살다 가듯이, 이곳에서 할아버지 하던 일이나 물려받고 그렇게 흙이나 파먹고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왕이보를 앉혀 두고 돈 봉투를 주었다.
‘나가 살아라.’
풀어 말하자면 여기서 네 수발 받아 가며 살 생각일랑 없으니 도시로 나가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혼자 알아서 살아 보라는 것이었다. 말려도 보고 반기도 들었지만 할아버지는 완강했다. 손주 말이라면 은근슬쩍 넘어가 주던 모습이라곤 없었다. 꼭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처럼.
결국 등 떠밀려 간 도시에서 쪽방을 구해 몸 누이고 어찌어찌 두 해를 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틈틈이 대입 시험 공부도 했다. 올해에는 꼭 시험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래도 안 되면 취직을 할 마음이었고. 자꾸 눈앞에서 글씨가 헛돌 때면 무척 낡고 꾸깃꾸깃하던 봉투 안의 돈을 생각했다. 부인 잃고 혼자 사는 거로도 모자라 자식까지 일찍 앞세우고 팔자에도 없이 손주를 끼고 살며 얼마나 오래전부터 그날을 위해 돈을 모았을지 상상하면 마냥 허투루 살 순 없어졌다.
그때 똑똑,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누군가가 앞에 서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 사람은 아예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유채꽃 남자였다. 그는 친근하게 말했다.
“여행이 길어지네?”
아무래도 아직 오해하고 있는 듯해, 왕이보는 펼쳐 놓았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저 원래 섬 살아요.”
샤오잔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진짜? 되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얼마나 커다란지 왕이보는 덩달아 눈을 부릅떴다. 물론 표정이 동기화되어 버린 줄은 본인도 몰랐지만. 샤오잔은 왜 못 봤지, 중얼거리며 왕이보가 덮은 책을 흘끗 봤다.
“아직 학생인가 보네.”
“……그건 아닌데.”
“그런데 공부를 해? 대단하다.”
그의 칭찬에는 영혼이 없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떠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왕이보는 많이 닳은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어서였다. 샤오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이보의 옆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돌아가는 배가 한참 뒤에나 있대.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된다더라.”
“……처음 나왔어요?”
“응, 어쩌다 보니까.”
가족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말은 못 들었다. 집을 마련하는 동안에 왔다 갔다 할 일이 제법 되었을 것 같은데 대신 다녀와 줄 사람도 없이 이제야 배를 타고 나와 봤다니 이상했다. 그게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난 모양이다. 샤오잔은 대충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평소엔 필요한 거 다 갖다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자구나. 부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물론 그 부자가 예쁘고 좋은 섬 다 놔두고 굳이 여기까지 온 건 이상했지만, 거기까지 굳이 파고드는 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어차피 모두에겐 사정이 있다. 첫 만남에서 오해했고 내심 미안했던 것만으로도 왕이보는 이미 이 남자에 대한 경계가 많이 누그러졌다. 게다가 부자가 굳이 땡볕 아래 앉아 관광객의 푼돈을 걷어다 쓸 리 없을 것이다. 마을에 선의를 베푸는 사람을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별로 남지도 않았던 경계심이 또 얼마간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나도 옆에 앉아 있어도 돼? 심심하고 다리 아파서.”
“……그러세요.”
자리 제가 산 것도 아닌데요, 왕이보가 작게 덧붙였다. 샤오잔은 환하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저렇게 웃음이 헤픈 걸 처음 봐서 왕이보는 그저 신기했다.
샤오잔은 옆에 앉자마자 너도 뭐 좀 먹을래? 나 이런 데 너무 오랜만에 온다 하며 몇 마디 말을 더 붙였다. 왕이보는 성실하게 필요 없다, 네, 하고 대답했다.
샤오잔은 긴 다리 휘적거리며 가더니 커피를 주문했다. 아이스 커피라고 하는데 정작 얼음은 별로 안 들어 있어서 금세 녹아 버렸다. 왕이보는 조금씩 줄어드는 그의 커피를 잠깐 보다 이내 다시 책을 펼쳤다. 물론 집중은 조금도 안 됐다. 자꾸 옆에서 경치 구경하듯 뚫어져라 보는 사람이 생겨서. 왕이보는 애써 책에 시선만 못 박아 둔 채로 온 신경이 쏠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슬그머니 왼쪽 뺨을 쓸었다. 나름 자연스럽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샤오잔이 웃었다.
“아무것도 안 묻었어. 그냥 보는 건데.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쓰이는데요.”
“그래? 그럼 나 눈 감고 있을까?”
또 그럴 것까진 아니니 왕이보는 고개를 저었다. 바깥에 바다도 있고 사람들도 돌아다니는데 굳이 입 닫고 공부만 하는 사람 옆얼굴을 보겠다는 걸 말릴 재간이 없었다. 그런 말재간이 있으려면 할아버지랑 같이 20년을 살아선 안 됐다. 굳이 안 말리니 샤오잔은 또 굳이 봤다. 웃음기 섞인 그 시선 속에서 문제를 가까스로 반 페이지 정도 풀었을 때에야 문득 이 사람이 날 놀리는구나 싶었지만 그냥 끝까지 태연한 척했다. 얼핏 답지를 보니 풀었던 문제 중 절반은 틀렸다. 평소보다도 더 참혹한 점수였다. 창피해서 채점은 건너뛰었다.
샤오잔은 턱을 괸 채 왕이보를 보다 문득 물었다.
“여기가 고향이야?”
“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널 못 봤을 리가 없어.”
도대체 사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여태 그게 의문인 모양이었다. 왕이보는 샤오잔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데 살아요. 2년 전부터.”
“아, 진짜? 나도 여기 2년 정도 있었는데. 엇갈렸나 보다.”
“네, 뭐.”
“아쉽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쉬울 건 또 뭘까. 하지만 샤오잔은 가타부타 부연 없이 테이블에 엎드리며 팔에 머리를 기댔다. 오후의 햇볕이 그의 화려한 셔츠와 가느다란 팔, 반듯한 얼굴 위로 쏟아졌다. 좋은 사람인데 얼굴도 예뻤다.
왕이보는 문득 다시 한번 궁금했다. 왜 이곳까지 왔는지, 심지어는 살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왜 유채꽃밭을 돌보는지,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쳐다보는지. 그것도 웃으면서. 자꾸 말을 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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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섬까지 둘이 함께 돌아왔다. 샤오잔이 배에서 내리며 살짝 비틀거려서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팔을 붙들어 주었다. 영 가느다랗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만져진 팔이 생각보다 탄탄했다. 어쩐지 손바닥에 땀이 난 것 같아서 화드득 덴 것처럼 놓았다. 샤오잔은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부쩍 날이 길어져서 선착장엔 살짝 붉어진 해가 길게 쏟아지고 있었다. 왕이보는 잠깐 넋을 놨다. 볕 아래 있는 거야 본인을 포함해 이곳에 모두가 마찬가지인데 왜 자꾸 눈이 안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사를 대충 꾸벅 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샤오잔은 그 몸짓을 못 본 척 옆으로 와서 같이 걸었다.
“나 샤오잔.”
“알아요.”
“아, 진짜? 또 언제 뒷조사를 했지?”
“뒷조사 아니고 할아버지가.”
“아, 할아버지. 그럼 넌 이름이 뭔데?”
“……이보요. 왕이보.”
조금 많이 늦은 감이 있는 통성명 끝에 샤오잔은 이름이 멋지다고 칭찬했다. 역시 진심 같은 건 나뭇잎 한 장 무게만큼도 안 실린 것 같았다. 조금 실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쩌면 그냥 붙임성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왕이보는 샤오잔에 대한 생각을 또다시 덧쓴다. 착한데 예쁘고, 붙임성까지 좋은 사람.
왕이보가 워낙 말수가 없으니 샤오잔도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잠깐 말이 없었다. 또 조용해지니 손에 끈적하게 땀이 배어서 왕이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물었다.
“왜 여기 왔어요?”
“응?”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샤오잔은 잠깐 멈칫하다 웃었다.
“왜 아무것도 없어? 꽃밭도 있고 좋은 사람에, 좋은 경치에, 좋은 공기도 있는데.”
왕이보가 살며 본 곳이라고 해 봐야 이 섬과 지금 살고 있는 도시 한구석뿐이지만, 조금 전에 샤오잔이 늘어놓은 이유가 그 많고 많은 곳 중 이곳을 콕 집을 만한 이유가 안 된단 것쯤은 알았다. 별로 납득 안 가는 얼굴로 가만 보니 샤오잔이 덧붙였다.
“조용하고 공기 좋은 데 찾다 보니까 어쩌다가 눈에 띄었어. 와 보니까 마음에 들었고.”
“왜 그런 델 찾았어요?”
“너도 의외로 호기심이 제법 있구나. 공부하는 애라 그런가?”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지만 왕이보는 일부러 부인하진 않았다. 샤오잔은 잠깐 말없이 앞만 보고 걷다 툭 던지듯 말했다.
“나 아파서.”
“아파요?”
“응. 요양하러 왔어.”
요양이 필요할 만큼 아파 보이진 않았다. 아까 만져 봤던…… 팔도 제법 탄탄했는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확실히 말랐는데. 왕이보는 순간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단 걸 잊고 샤오잔을 샅샅이 훑어봤다. 샤오잔은 그걸 지적하는 대신 어깨동무를 하며 왕이보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친근한 제스처였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어디가 안 좋은데요?”
“비밀이야. 다음에 더 가까워지면 알려 줄게.”
어느새 두 사람은 유채꽃밭을 나란히 지나고 있었다. 포장 작업을 한 지 좀 되어 여기저기가 깨지고 금이 간 길에 꺾인 유채꽃 몇 송이가 나뒹굴었다. 샤오잔은 한숨을 쉬며 꽃들을 주웠다.
“하여튼 감시를 안 하면 이렇게 꼭 사고들을 쳐요. 여기다 감시 카메라를 달 수도 없고.”
문득 며칠 전 봤던 그 박스 간판이 생각났다. 왕이보는 샤오잔의 손안에 담긴 꽃들을 물끄러미 봤다. 꺾어 놓고 버린 지 좀 된 모양으로 잎 끄트머리가 시들시들했다.
“진짜로 벌금 받아요?”
“받지. 사람 치면 벌금 물잖아. 찌르면 빵에 가고. 꽃 모가지를 꺾는데 벌금 안 받는 건 말이 안 돼.”
“꽃은 돈 못 받는데.”
“대신 이곳 사람들이 받잖아.”
뭐, 돈 받는다고 하는 게 제일 확실한 예방이기도 하고. 샤오잔은 허리를 숙여 가며 꽃 몇 송이를 더 주웠다. 개중 가장 덜 상한 걸 고르더니 나머지는 꽃밭에 도로 돌려보냈다. 도로 줄기에 가서 붙진 못해도 썩어 거름은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는 남겨 둔 꽃을 왕이보의 귀에다 슬쩍 꽂았다. 얼른 잡아 빼려 하니 손목을 붙들고는 예쁘다 했다.
“이게 뭐예요.”
“예쁘네. 사진 찍어도 돼?”
“아니요.”
“그래, 시든 건 좀 그렇지. 다음에 더 예쁜 걸로 따서 꽂자.”
“꺾으면 벌금이라면서요.”
“난 예외야. 너만 모른 척해 주면 돼. 아, 그거 빼지 마.”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어디 한 군데 빠짐도 없이 헐렁했다. 왕이보는 혼란스러웠다. 다 큰 성인 남성 귀에다 꽃을 꽂아 놓고 저렇게 웃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심지어 예쁘다고 하는 건 더 이상하다. 본인은 꽃 한 송이 안 꽂고도 예쁘면서.
왕이보는 샤오잔을 뚱하게 보면서도 결국 꽃을 빼진 않았다. 샤오잔은 볼수록 뿌듯한 모양으로 가는 내내 앞은 안 보고 왕이보를 봤다. 이럴 거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 그걸 보라고 할 걸 그랬다고, 왕이보는 잠깐 후회를 했다. 갈림길에서 잘 가라고 인사하고 갈라지는 순간까지도 자꾸 뚫어져라 보는 저 남자가 자꾸 쑥스러워서 그랬다.
꽃을 빼는 것도 잊고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그건 뭐냐고 불쑥 물었다. 왕이보는 황급히 귀 옆을 털었다.
“바람에 날려와서 꽂혔나 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였다. 심지어는 바람에 날려왔다는 걸 굳이 또 도로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서 하기엔 말이다.

‌

* * *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영 속이 안 좋은지 밥술도 뜨다 말았다. 남들은 키 크려면 밥 먹어야 한단 얘기를 들을 때 왕이보는 다음 끼니 안 굶으려면 밥을 먹어야 한단 얘기를 듣고 자랐다. 굳이 또 기운 없는 몸 이끌고 어망 살피러 간 할아버지를 위해 왕이보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체한 것 같으니 보건소에 가서 약을 받아 올 생각이었다. 집에서 보건소는 그리 멀질 않아서, 골목 따라 질러서 가면 금방이었다. 하지만 왕이보는 굳이 큰길로 나섰다. 꽃밭을 지나서 살짝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관광객이 몇 있었고, 샤오잔은 어김없이 낡은 밀폐 용기 돈 통이랑 박스 간판을 대충 발치에 둔 채 낚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왕이보는 문득 할아버지 집 창고에 아무도 안 쓰고 낡아 가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떠올렸다. 가져다주면 그래도 저렇게 다리를 엉망진창으로 구겨 앉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좀 되어 샤오잔은 왕이보를 보지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못마땅한 연락이라도 받은 듯 표정이 별로 좋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꽃을 꺾는 관광객을 보자마자 앓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들! 꽃이 식물의 생식기인 건 아시나?”
그가 별안간 외친 말에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크게 당황했다. 물론 왕이보를 포함해서였다. 화창한 아침에 화사한 꽃밭에 대고 외칠 소리는 아니었다. 그 말을 한 당사자만 태연했다.
“이를 어쩌나, 방금 걔의 꼬추를 따 버리셨네. 내가 선생님 꼬추 똑 따서 귀에 꽂고 사진 찍으면 어떻겠냐고. 거기 빨간 옷 입은 선생님, 선생님 얘기 하는 거 맞아요.”
면박을 당한 사람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많진 않아도 어쨌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쏠려 있으니 어찌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여자친구 귀에 꽂아 줬던 꽃을 슬그머니 빼서 버리더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샤오잔은 두 사람 앞을 슬쩍 막아 서더니 웃었다. 그리고 박스를 향해 턱짓했다.
“벌금.”
이쯤 되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테다. 남자는 샤오잔의 앞으로 바짝 붙어서며 얼굴을 구겼다.
“아, 진짜 아침부터 별 미친 게 기분 더럽게 하네. 이거 양아치 아냐? 거지 같은 꽃밭에서 입장료 받을 때부터 이상하더니, 씨발.”
“아이구, 거지 같은 꽃밭에서 되게 즐거워 뵈던데. 그래서 벌금 안 내시려고?”
샤오잔은 계속 싱글싱글 웃고 있었는데, 조금도 겁먹은 기색일랑 없었다. 왕이보는 지금이라도 뛰어들어야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발이 움찔거렸다. 병 있어서 요양하러 왔는데 저런 진상한테 걸려서 더 크게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물론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맞는 게 몸에 이로울 리는 없다. 시비는 점점 더 커졌다. 샤오잔은 웃으며 다른 조용한 데 가서 잠깐 얘기 좀 하자는 태평한 소리나 했다. 만만하게 보았는지, 남자는 아예 샤오잔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밀어 가며 욕을 퍼부었다. 결국 왕이보가 부리나케 달려가 끼어들었다.
“어, 이보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시비에 휘말린 사람답지 않게 태평했다. 왕이보는 일단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떼어 놓고 차분히 얘기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데다 쪽도 팔 대로 팔아서인지 남자는 갑자기 끼어든 왕이보에게 불똥을 던졌다.
“넌 뭐야, 씨발. 딱 봐도 어린 새끼가 어디 어른들 말하는 데 끼어들어!”
“와, 꼰대.”
샤오잔이 한 말이었다.
“뭐, 이 새끼야?”
왕이보를 사이에 두고 또 두 사람 간에 신경전이 오갔다. 정신이 없다 못해 혼이 쏙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사이에 끼어 있던 왕이보가 샤오잔과 남자를 동시에 꾹꾹 밀었다.
“신고했어요, 좀 전에.”
남자를 제법 사납게 노려보며 왕이보가 말했다. 내친김에 쥐고 있던 핸드폰까지 흔들어 보였다.
“아까 먼저 욕하고 때린 것도 다 영상 찍어 놨고요.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으세요.”
샤오잔은 그제야 조금 놀란 눈치로 왕이보를 살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말릴 때만 해도 태연했는데 그사이에 신고를 했다고 하니 놀란 눈치였다. 잠시 주춤하는 남자를 보며 왕이보는 한숨을 쉬었다.
“사과하면 영상 지우고 신고 취소할게요.”
“……내, 내가 왜!”
“싫으면 그냥 계세요. 같이 가죠, 서에.”
여행 와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내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여자친구가 슬그머니 재촉하니 결국 남자도 못 이긴 척 사과를 했다. 거의 도망치듯이 빠르게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샤오잔이 한숨을 쉬었다.
“벌금 못 받았네.”
“방금 맞을 뻔했는데 그게 중요해요?”
“내가?”
“아까 어깨도…….”
왕이보는 잠깐 샤오잔을 보다 이내 말을 멈췄다. 알게 모르게 긴장을 좀 하고 있었는지 몸에 힘이 쭉 풀렸다. 샤오잔은 마주 본 왕이보의 오른쪽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며 물었다.
“진짜 신고했어?”
왕이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질린 얼굴이었다.
“그럴 정신이 어딨어요.”
“영상도?”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샤오잔은 왕이보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크게 웃었다.
“너 똑똑하다. 공부해서 그런가?”
“…….”
“말도 잘하던데?”
헐렁한 셔츠 걸쳐 입은 마른 몸이 웃을 때마다 흔들렸다.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그를 흘겼다.
“아픈 사람이 왜 무모하게.”
“응? 아파? 아, 나 아프지.”
“…….”
“자꾸 까먹어.”
샤오잔은 슬쩍 어깨를 놓더니 한 발짝 물러섰다. 돈이 든 통과 낚시 의자를 챙기는 모양새가 어딘지 어정쩡했다. 왕이보는 그게 샤오잔이 너무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사람이니 어련할까. 원래 시비에 휘말리면 사람은 흥분하게 되고 놀라니까. 건강한 사람이 그럴진대 아픈 사람이 무리가 가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설마 심장이 안 좋은 건 아니겠지? 왕이보는 괜히 슬그머니 가서 낚시 의자를 뺏어 들었다. 샤오잔은 딱히 말리지 않고 슬그머니 웃었다.
“들어 주는 거야?”
“……네, 뭐.”
“집까지?”
왕이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오잔은 반 발짝 정도 앞에서 걸었다. 다리가 긴 만큼 보폭도 컸는데 심지어는 걸음이 좀 빨랐다. 그 덕에 샤오잔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왕이보의 등허리는 살짝 땀에 젖어 있었다. 별로 무게랄 것도 없는 낚시 의자를 마당 한구석에 내려놓으며 슬쩍 둘러보니 확실히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다거나 바다에서 뭔가를 잡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 집이 보였다. 마당에 사람이 오가는 것까지 보일 것 같았다. 그제야 집에서 왜 나왔었는지가 기억이 났다. 너무 경황이 없어 보건소 가던 길인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 샤오잔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가 너희 집이야?”
“……네.”
“그렇구나. 완전 가깝네. 자주 놀러 와.”
왕이보는 조금 당황했다. 놀러 오라니, 진심일까? 그것도 자주? 놀러 오면 뭘 하고 놀지? 둘이서 대화를 많이 해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하지? 애초에 무뚝뚝하기로는 어딜 가서 빠지지 않는 할아버지와 살았으니 이런 살가운 말에는 적응이 잘 안 됐다. 한참을 침묵하다 일단은 싫은데요 할 수도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 한 잔 마시고 갈래?”
이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까먹고 있다면 모를까, 기억이 났으니 할아버지 약을 타러 가는 게 맞는 듯했다.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할아버지 약 타러 가던 길이었어요. 보건소에.”
“아, 그럼 얼른 가 봐야지. 내가 괜히 시간을 뺏었네.”
“아니에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니 샤오잔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또 보자.”
“……네.”
“아,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왕이보는 어쩐지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대답도 없이 마당을 나섰다.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돌아보지 못했다.
왜 놀러 오라고 하지. 왜 굳이 또 보자고 하지.
2년쯤 살아 봐서 왕이보도 안다. 도시 사람들이라고 다 저렇게 살갑진 않다는 걸. 특히 도시 사람들은 놀러 오란 말을 안 하던데. 아르바이트할 때 만났던 여자애들만 꼭 어디 같이 놀러 가자고 했는……데.
바삐 옮기던 걸음이 문득 멎었다. 사실 별말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특별하게 해석하고 싶었다. 멈춰 선 채 심호흡하고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벅벅 했다. 그리고 보건소까지 가는 길에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약을 타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셨다.

‌

* * *

 
할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지만 결국 사흘 동안 입원해야 했다. 왕이보는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병원 입구 벤치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링거를 꽂은 채 느리게 돌아다니는 환자들을 망연히 눈으로 좇으며 내내 마음이 시끄러웠다.
쓰러진 이유야 혈압 때문이었는데 엎어진 김에 마당 청소하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검사하는 동안 암이 발견되었다. 전이가 없고 나이가 있으니 진행이 느려 수술로 해결이 될 거라 했다. 혈압으로 쓰러지신 게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딱 하나였다. 돈.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되어도 온전히 슬퍼하거나 염려할 정신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할아버지의 유일한 가족 역시 왕이보라서, 현실적인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 뒀던 돈을 모두 해도 수술비까진 어림도 없었다. 땅과 집을 처분하고 왕이보가 도시에서 지내는 방의 보증금을 빼면 어찌어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지낼 곳이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이런 외딴 섬의 땅이 그리 쉽게 처분될 리가 없다. 그러나 수술을 그저 형편 될 때까지 미룰 수도 없고.
앉아 있는 동안 왕이보의 그림자가 서서히 옮겨졌다. 할아버지가 찾을지도 모르니 들어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자에 엉덩이가 영영 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드니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아주머니.”
상회 아주머니였다.
“병실 어디니? 같이 올라가자.”
“여긴 어떻게…….”
“네 할아버지가 이제사 말하더라. 참 갑갑한 양반이야.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구. 배편도 없어서 뤄 씨 낚싯배 빌려 탔다, 얘.”
화장기도 하나 없는 상회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다 문득 시선을 내렸다. 가게에서만 신는 낡은 슬리퍼가 툭 눈에 걸렸다. 그녀는 앞장서서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왕이보는 얼결에 알았다. 할아버지의 ‘연애’ 상대를.
하도 오래 앉아 있어 굳은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얼떨떨하긴 했지만 누구라도 사정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팽팽하던 마음 한구석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슬퍼졌다. 이제야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병실에는 아주머니 혼자 들어갔다. 왕이보는 괜히 음료수를 사 오겠단 핑계로 병원에 딸린 조그만 편의점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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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정이야 다 알지 못한다 해도 구급대원이 다녀간 일이라 작은 섬엔 왕씨 병원에 실려 갔다더라 하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 아주머니가 계시는 동안 짐을 챙기러 섬에 잠깐 들어온 왕이보는 본의 아니게 손님맞이를 몇 번이나 해야 했다. 두 손 무겁게 온 사람들은 소쿠리나 박스에 커다란 무, 감자 같은 걸 떠안기고 갔다.
할아버지에게 돈 문제를 얘기하면 행여나 수술을 받지 않겠다 할까 봐 왕이보는 슬쩍 그나마 가장 친한 아저씨 몇 명에겐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의외로 돌아오는 대답이 모두 같았는데, 채소 가게 위에 돈 빌려주는 데가 생겼으니 거기로 가 보라는 거였다.
“은행 가 봐야 왕씨 나이도 많은 데다 넌 직업도 없어서 몇 푼 나오지도 않아. 그런데 거긴 큰돈도 잘 빌려줘.”
그 말을 듣고 왕이보는 잠깐 고민을 했다. ‘해피머니’.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땐 고민이 더 깊어졌다. 일단 은행을 가 볼 마음으로 알아만 뒀다. 어지간해선 대부업체까지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곳까지 생기다니 섬도 조금씩 변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틀 후, 왕이보는 퇴원한 할아버지를 방에 눕혀 드리고 해피머니를 찾았다. 은행에 가 보았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노란 바탕에 초록색 동글동글한 글씨로 ‘해피머니’라고 쓰인 간판은 확실히 조금 새것 티가 났다. 앞에 서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의미가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차피 선택권이라는 게 없어서.
일단 들어 보기나 하자, 그러고 나서 결정하는 거잖아. 왕이보는 결국 깊게 심호흡하고 여기저기가 금가고 깨진 시멘트 계단을 밟았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고, 안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뭔가가 깨지는 소리였다. 걸음이 멈추었다. 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안이 도로 잠잠해졌을 때에야 억지로 발을 떼고 노크를 했다. 잠시 조용했다. 다시 노크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안에서 의외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렸으니 들어오세요.”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그 시간이 이상하게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문밖에서 들었던 소리는 환청이었나 싶을 만큼 깨진 것도 없이 내부가 멀끔했다. 정장 차림에 덩치가 곰 같은 남자 하나가 사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인상이 누구 하나 방금 묻고 온 듯했는데 의외로 말투가 사근사근했다.
“급전 필요해서 오셨어요?”
왕이보는 긴장한 와중에도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는 일단 앉으시라고 자리를 권했다.
“녹차랑 커피 있는데 뭐로 드릴까?”
“……아, 괜찮습니다.”
“녹차 먹읍시다, 그럼.”
사람 말을 좀 대충 듣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예상했던 것보단 덜 무서웠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사무실을 슬쩍 둘러보는데 남자가 티백 담근 종이컵을 불쑥 내밀었다. 왕이보는 일단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며 받았지만 용암이라도 부어 온 듯 뜨거워서 한 모금도 안 마시고 그냥 내려 두었다. 초록색 부직포가 밑에 깔린 테이블 유리는 얼굴이 고스란히 비칠 만큼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다.
“그래, 아직 젊어 보이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셨나? 도박? 여자?”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수술비가 필요해서요.”
그 말에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 험하게 구겼다. 무서운 얼굴이라기보단 어쩐지 낭패를 본 사람 같았다.
“아……. 은행이나 다른 가족들한테는 가 보셨고?”
“은행에선 대출이 어렵고 가족은 없어요.”
이런 데서 굳이 사정 같은 걸 꼬치꼬치 캐묻나 싶어서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왕이보는 성실히 답했다. 남자는 급기야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대충 의자 끄트머리에 붙였던 엉덩이를 도로 떼고 일어나 말했다.
“사장님이랑 상담하시는 편이 낫겠네. 잠깐 계세요.”
왕이보는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사장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저 사람이 듣는다면 펄펄 뛸 생각일지 모르나 일단 얼굴에서 보이는 나이나 험상궂은 인상 등만 봤을 땐 누구 밑에서 일할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남자는 커튼 쳐진 구석 공간으로 들어가더니 잠시간 감감무소식이었다. 안에서 무어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커튼이 도로 열렸다. 화려한 셔츠를 걸친 남자가 나왔는데 의외로 굉장히 호리호리한…….
“샤오잔?”
“아.”
샤오잔이었다.
 
‌

* * *

 
왕이보는 어쩐지 믿기질 않아서 샤오잔의 이름이 쓰인 해피머니 명함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장, 샤오잔. 직원도 아니고 사장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다 간신히 질문을 꺼냈다.
“혹시 조폭…….”
“에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무서운 추측을 해. 나 그냥 현현금 좀 많은 선량한 사람이야. 돈 그냥 놀리는 것보단 나아서.”
“아까 그 아저씨는 좀…….”
“생긴 게 좀 쑥대밭이지만, 좋은 사람이야. 친절하지 않았어?”
선량한 사람이 다른 사람 얼굴을 두고 쑥대밭이라고 해도 되나? 하지만 샤오잔의 말도 사실이라 왕이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어둠의 세계에 발 담근 사람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기도 했다. 애초에 이런 섬에서 이자를 받아 봐야 크게 돈도 안 될 게 분명한데.
“아까 대강 들었어. 할아버지께선 괜찮으시고? 수술 날짜는 잡았어?”
“네. 일단…… 지금은 퇴원해서 집에 계세요. 다음 주에 다시 들어가셔야 해요. 수술이 내달 초라서.”
“그래, 마음고생 심했겠다. 장하네.”
마을 사람들이 위로의 선물과 함께 건넸던 위로에는 다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샤오잔이 담담히 건넨 저 한마디는 마음을 툭 건드렸다.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게 순간 휘청하는 느낌에 왕이보는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샤오잔은 왕이보가 말한 금액을 흔쾌히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제법 큰 돈인데 갚을 능력은 되냐는 둥의 질문도 없었다. 혹시 신체 포기 각서 같은 걸 써야 하나, 어떻게든 지옥 끝까지 쫓아와 받아 낼 자신이 있으니까 안 물어보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겁이 날 정도였다.
왕이보는 올 게 왔다는 심정으로 이자 얘기를 꺼냈다. 목젖이 크게 울렁거렸다. 너무 무리한 조건을 부른다면 다른 곳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 얼굴이 너무 비장하고 결연해 보였는지 샤오잔은 작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너무 높은 이자는 좀 그렇지. 그치.”
“우리 사이요?”
긴장하고 있던 탓에 순간 생각도 거치지 않고 툭 묻고 말았다. ‘우리 사이’라는 말이 너무 이상하고…… 또 간지럽게만 느껴졌다. 자주 놀러 오란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우리 사이가 도대체 뭔데.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도 제대로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관계의 이름을 갖다 붙일 수도 없다. 생각할수록 혼란만 커졌다. 혼란의 원흉인 샤오잔은 별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왜? 우리 꽤 친해졌잖아. 네가 나 도와주기도 했고.”
“……그냥 싸움 조금 말린 건데…….”
“나 맞을까 봐 걱정했던 거 아냐? 넌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싸워도 막 다 말리고 다녀? 걱정하고?”
왕이보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래. 넌 날 진심으로 걱정한 거야. 그래서 나 구해 준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꽤 가까운 사이지.”
듣고 보니 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자를 과하게 물리지 않겠다는 말에 극구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샤오잔은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원래 도박 빚이나 외도 때문에 돈 빌리러 오면 이자를 69%까지 받거든.”
“네? 69%요?”
“응. 그런 애들 어차피 내가 안 빌려줘도 다른 데 가서 빌릴 애들이라서. 마음 고쳐먹어서 안 빌리고 가정으로 얌전히 돌아가면 더 좋고.”
“그래도 그거 불법…….”
“그런데 내가 또 마음이 약해서, 가족이 아프거나 해서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렇게 못 해요. 아까 그 아저씨도 그래서 맨날 투덜거려. 우리 사장님 마음이 너무 약하다고.”
“아.”
“게다가 넌 또 나랑 어엄청 친하잖아. 그치? 이거 참 고민이 되네.”
전혀 고민 안 하는 얼굴로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왕이보는 그런 그의 얼굴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았다. 꽤 친한 사이에서 어느새 엄청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도 눈치를 못 챘다. 엄지손톱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고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샤오잔은 왕이보를 잠깐 감상하듯 바라보다 테이블을 탁 소리 나게 쳤다.
“에이, 기분이다. 그냥 연 1%로 가자. 이 정도면 거저 아냐?”
“네?”
진짜 거저였다. 왕이보는 화들짝 놀랐다. 잘못 말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샤오잔은 별 대수롭지도 않게 말했다.
“이자는 매달 이날. 원금 상환은 5년 안에. 중간에 돈 생기면 조금씩 분할로 갚아도 되고. 어때? 5년 너무 짧아? 10년 할까?”
“아, 아뇨. 5년이요. 될 것 같아요.”
“그래? 어려우면 얘기해.”
너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오히려 말문이 막히고 어안이 벙벙했다. 돈을 은행에서보다 더 싸게 빌려주는 사채업자라니, 그런 게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다니. 괜히 잘 차려진 밥상을 엎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왕이보는 눈앞의 남자를 치켜뜬 눈으로 잠시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혹시라도 그…… 무리하시는 거면 좀 그래서.”
샤오잔은 정말로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너 설마 또 내 걱정 하는 거야? 돈 안 급해?”
“급해요. 급한데…… 그, 너무 저한테만 좋은 것 같아서 좀.”
“내 돈이고 내가 사장인데 내 맘이지. 이럴 땐 그냥 예, 알겠습니다 하면 돼. 해 봐.”
대답을 듣고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일단 얌전히 네, 하고 답했다.
“혹시 돈 더 필요하면 부담 가지지 말고 얘기해. 그것도 똑같은 조건으로 얹어서 빌려줄게. 내가 너 열심히 사는 거 알아서 이러는 거야. 알지?”
“……감사합니다.”
사실 돈 얘기를 하러 와서 샤오잔을 만난 게 조금 전까진 얼마간 낯뜨거웠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일이 이리 술술 풀리고 나니 정말로 눈앞의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고 구세주 같았다. 다른 의심을 할 생각도 못 하고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이 공짜로 뭘 주거들랑 일단 의심을 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샤오잔도 어느 정도는 여기 섬 사람이고, 정말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굳이 더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의심만 가셨을 리 있겠는가. 막연한 호감이 솟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중에 샤오잔이 옥 장판 몇 개 사라고 하면 속는 걸 알면서도 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대뜸 넙죽 받기가 조금 불편한 마음에 왕이보가 덧붙였다.
“그럼 제가 혹시 여기 있는 동안 도와드릴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도울 일? 흠, 글쎄.”
“그때그때 생각날 때마다 부르셔도…… 괜찮은데. 고마워서. 진짜로요.”
샤오잔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나는 게 있음 불러야 하니까 전화번호를 찍으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완전히 최신폰이었다. 필요한 걸 갖다주는 사람이 사다 준 모양이었다. 왕이보는 얌전히 제 번호를 찍고 혹시 몰라 집 유선 번호까지 찍어 주었다. 샤오잔은 한번 전화를 걸어 보더니 왕이보 폰이 울리자 씩 웃었다.
“이제 번호도 알고. 이제 이 섬에서 나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야, 너.”
샤오잔은 좋은 사람이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좀 묘하게 했다. 저렇게 갑자기 거리를 좁혀 다가오니 왕이보는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는 동안에도 속이 얼떨떨하고 복잡했다. 그리고 그 심정은 계약서와 인주를 가지고 온 쑥대밭 아저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내용 확인을 해 주며 1%라고 읽을 때 아저씨가 이를 악물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샤오잔은 왕이보에게 손을 닦으라며 물티슈를 친히 뽑아 건넸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이 스쳤는데 이상하게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내외하듯 손가락을 슬쩍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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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돈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주머니는 그이가 손주를 참 잘 두었다 연거푸 말했다. 어쩐지 낯뜨겁기도 하고 ‘그이’라는 호칭 역시 이상하게 귀에 턱 걸려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위험한 일 하거나 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냥 좀 빌렸어요. 그…… 친한 형한테서.”
“친한 형? 많이 친한가 보네. 그런 큰돈도 턱턱 빌려주고.”
“네. 엄청…… 친한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됐어요. 왕이보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상회 한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가 왕이보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져 있었다. 말린 고추 받으러 오라기에 왔다가 생각보다 오래 눌러앉아 버린 탓이다.
“저 가 볼게요.”
“그래. 그거 가지고 가서 절반 빼놓고 나머지는 냉동해야 한다. 알았지?”
“네.”
꼭 세 번 채워 듣는 당부에 적당히 대답하고 가게를 나섰다. 철물점을 들러야 해서 걸음이 조금 바빴다.
[전구 사 들고 우리 집 올래? 전구가 나가서.]
[아, 전구 값은 줄게.(윙크하는 이모티콘)]
몇 번이나 읽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조금이긴 하지만 샤오잔이 키도 더 큰데 왜 전구를 못 갈까? 순간적으로 좀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몸도 약하고 돈도 많은 부자니까 한 번도 직접 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왕이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추 자루와 전구가 든 비닐봉지를 추슬렀다. 샤오잔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집에 들러서 고추 자루를 내려 두었다. 대신 냉장고에 있는 반찬 몇 종류를 덜어서 챙겼다. 이런 데는 배달도 안 되는데 혼자서 뭘 해 먹고 살겠나 싶어서.
“할아버지, 저 잠깐 다시 나가요.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올게요.”
“그래.”
방 안에서 짧게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좁다란 길을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서 샤오잔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샤오잔은 마당 평상에 드러누워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 늦었네.”
“죄송해요. 잠시 뭐 좀 챙기느라고.”
“선물이야?”
샤오잔의 눈에는 슬쩍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왕이보는 손에 쥔 비닐봉지와 반찬 담은 통을 잠깐 내려다보다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냥, 전구랑 반찬 조금이요.”
샤오잔은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받아 들었다. 손길이 느긋했다.
“잘됐다. 그럼 같이 저녁 먹고 갈래?”
“아…….”
순간 집에 있을 할아버지가 잠깐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할아버지의 가족은 아직 왕이보뿐이라서. 그렇다고 거절을 하고 싶은 마음은 영 안 들었다. 자꾸 그러자고 대답해도 될 만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이제 ‘그이’라고 부를 여자친구도 있고, 어쨌든 할아버지 수술비를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시원하게 빌려준 사람이랑 밥 한 끼 정도 같이 먹는 건 인간의 도의상으로도…….
“먹고 갈 거지?”
“네.”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가겠다고 하니 샤오잔은 그러라며 느릿느릿 반찬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상회 아주머니에게 전화해 할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좀 같이해 주실 수 있겠느냐 물었다. 흔쾌히 재밌게 놀다 오란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남아 있던 불편이 시원하게 날아갔다. 샤오잔은 편하게 들어오라는 듯 현관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그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전구가 나간 건 욕실이었다. 어제 씻는 도중에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깜깜해졌다고. 필라멘트가 터진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며 왕이보는 전구를 맞게 사 왔는지 확인했다. 박스를 뜯는데 샤오잔이 그 모양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손이 진짜 크다, 너.”
“……아.”
손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왕이보는 문득 제 손을 남의 것 보듯 물끄러미 봤다. 큰가? 제 것이든 남의 것이든 사실 손을 살면서 유심히 본 일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샤오잔이 손가락을 쫙 편 채 손을 내밀었다. 왕이보는 순간 영문을 몰라 잠깐 보기만 했다. 그게 손 크기를 비교해 보자는 뜻인 걸, 샤오잔이 몇 번 재촉하고서야 알았다. 바지춤에 괜히 슥슥 손바닥을 닦고는 손을 내밀었다. 닿지 않을 만큼만 대려 했는데 샤오잔이 불쑥 손바닥을 딱 붙여 갖다 대었다.
“와, 이것 봐. 키는 나보다 작은데 손이 한 마디는 더 커.”
“……그러게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일단 맞닿은 손바닥 살갗이 너무 간지러웠다. 무엇보다 그의 손이 지나치게 따뜻했다. 괜히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이 와중에 손가락이 살짝 얽히듯 스치니 더 낯뜨거웠다. 그러고 보면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종종 이렇게 손 크기를 비교해 보자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다. 물론 전부 여자였고,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왕이보는 그럴 때마다 난 남잔데 당연히 내가 더 크겠지, 하며 무뚝뚝하게 넘기곤 했었다. 생각해 보면 놀러 오라던 애들이 손 크기도 재자고 했다. 사실 이런 건 좀…… 너무 친밀하다 못해 좀…….
“아, 맞다. 집에 밥해 놓은 게 있나 모르겠네. 갈고 있어 봐.”
하지만 샤오잔은 손을 거짓말처럼 거두었다. 그러더니 뒷짐을 진 채 유유히 욕실을 나가 버렸다. 왕이보는 그 뒷모습을 보다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던 걸 알았다.
확실히 이런 건 좀…… 꼬시는 것 같아서. 이러다 오해하게 되면 어쩌려고 저럴까. 괜히 대신 고민해 주게 되었다.
 

* * *

 
샤오잔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왕이보는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 먹고 키가 저렇게까지 큰 걸까. 할아버지가 봤다면 왜 사람이 밥을 새처럼 먹냐 했을 게 분명했다. 밥을 반 공기 정도 먹고서는 배가 부르다며 그만두었다. 물론 반찬은 아주 맛이 있었다며 제법 먹었지만, 어쨌든 왕이보가 보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다.
“내가 원래 입이 좀 짧아.”
“잘 먹어야 오래 사는데.”
아직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중얼거리자 샤오잔은 어린애가 늙은이 같은 소릴 한다며 웃었다. 의자에 반쯤 드러눕다시피 기댄 채로 그는 왕이보가 밥 먹는 걸 구경했다. 넌 맛있게 잘 먹으니까 오래 살겠다는 둥의 말을 가끔 툭툭 던지면서.
“그런데 넌 몇 살이야?”
“스물둘이요.”
“난 몇 살 같아? 아,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좀 아저씨 같은가?”
“……스물다섯?”
“너 사회생활 잘하겠다. 우리 사무실에서 일할래?”
샤오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왕이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부하겠다고 도시로 나갔는데 다시 섬에 들어와서 사채업에 종사하는 건 할아버지에게 못 할 짓 같았다. 샤오잔도 얼굴에 비해 진심은 아니었던 듯 금세 원래 나이를 알려 주었다.
“나 스물아홉.”
“거짓말.”
“어려 보여?”
“네. 그냥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샤오잔의 화제는 이번에도 민들레 홀씨처럼 잘 옮겨 갔다.
“성인 되자마자 도시로 갔겠네, 그럼.”
“네.”
“난 처음에 이 섬에 왔을 때 좀 놀랐어.”
“왜요?”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조용해서?”
“깡촌이니까요.”
“에이,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샤오잔은 웃으면서도 딱히 부정은 안 했다. 왕이보는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치우기까지 해 주는 거야?”
“네. 설거지해 놓고 갈게요.”
“좀 천천히 해도 될 텐데. 바빠?”
“그건 아닌데, 원래 먹자마자 바로 치워요. 벌레 끓으니까.”
“아. 너 벌레 무서워해?”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싫은 건데요.”
“그게 그거지.”
왕이보는 조금 뚱한 얼굴로 아니에요,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샤오잔이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벌레 얘기를 꺼내선 자존심이 푹 상했다. 다행히 한 가지 화제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샤오잔은 이번에도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남은 그릇 몇 개를 싱크대로 옮겼다. 그릇을 물로 부시던 왕이보와 어깨가 슬그머니 닿았다. 주방세제를 찾는 시늉을 하며 슬쩍 떨어져 봤지만, 샤오잔은 눈앞에 훤히 있는 세제를 굳이 찾아 주며 도로 붙었다. 그리고 왕이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계속 옆에 딱 붙어서 말을 시켰다.
“너 술 세?”
왕이보는 잠깐 고민하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답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도시로 갔고 술을 취하도록 함께 마실 만큼 가까운 친구도 없어서 가끔 혼자 맥주 몇 캔 홀짝거려 본 게 다였다. 취한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도 잘 알지 못해서 술이 세냐고 물어보면 늘 대답이 궁했다. 샤오잔은 술이 센가 보네, 하고 중얼거리더니 웃었다.
“다음에는 같이 술 한잔하자.”
“둘이서요?”
“둘이서는 싫어? 그럼 저기 구석에 있는 친구도 같이 마실까. 어때?”
“……네?”
왕이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샤오잔이 가리킨 곳을 획 돌아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 다만 벌써 해가 컴컴하게 진 창밖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한데, 이 집엔 둘만 있는 게 확실한데 괜히 뒤통수가 서늘한 게 근질근질했다. 왕이보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벅벅 문지르며 샤오잔을 흘겼다.
“농담하지 마요.”
“……아닌데, 농담.”
“저 갈래요.”
“친구가 가쟤?”
왕이보는 아예 대꾸도 안 하고 행주만 벅벅 빨았다. 그리고 공연히 더 힘차게 팡팡 털어 널어 놓았다. 귀신을 특별히 무서워하진 않는데 이런 말 들으니 괜히 오금도 조금 저리고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도대체 왜 저런 농담을 저렇게나 진지한 얼굴로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근데…… 농담이 맞겠지? 왕이보는 슬쩍 샤오잔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순간 흠칫 뒷걸음질했다. 샤오잔의 눈에 흰자위밖에 없었다.
“놀랐지?”
힘껏 까뒤집고 있던 눈을 바로 하며 샤오잔은 깔깔 웃었다.
“벌레도 무서워하고 귀신도 무서워하고, 아기네.”
“아니라니까요.”
왕이보는 성큼성큼 걸어 벗어 뒀던 바람막이를 챙겨 들었다. 에이, 화났어? 이런 걸로 화내는 거 보니까 아기 맞네, 뭘. 샤오잔은 계속 신경 긁는 소리만 했다. 왕이보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 허허실실한 남자에게 무어라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찾지 못했다. 어쩌면 자기 전에나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결국 왕이보는 뚱해진 얼굴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

* * *

 
[이따 저녁에 올 거지?]
[딸기 좋아해?]
[사진]
어쩌다 보니 거의 이틀에 한 번씩은 밥 같이 먹는 사이가 됐다. 할아버지는 상회에 가서 아주머니랑 같이 식사를 했다. 섬에 변변한 친구도 없는 손자가 번번이 나가 먹으니 궁금하신지 누구 만나러 가냐 묻기는 했다. 어차피 반찬 계속 훔쳐 가려니 민망하던 참이라 왕이보는 순순히 샤오잔과 함께 먹는다 털어놓았다. 그에게서 돈을 빌렸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음, 하고 대답인지 헛기침인지 모를 소리만 내었다. 그날은 오후 내내 부엌에서 잠시 분주히 움직이더니 음식을 한 보따리 싸서 줬다.
‘가져가서 먹어라.’
보자기에 싸인 음식을 잠깐 바닥에 내려놓은 왕이보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 가고 있다고 메시지 보낸 뒤 핸드폰은 도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날이 그새 많이 더워져서 바람막이는 벗어 놓고 나왔다. 밤에 좀 서늘해도 뛰어가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샤오잔이 꽃밭에 앉아 있지도 않기에 집에 있나 보다 싶어 조금 이르게 나섰다. 그 집에 가는 것도 벌써 대여섯 번쯤 되니 마냥 남의 집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샤오잔은 왕이보가 조금 일찍 오든 늦게 오든 크게 신경을 안 썼다. 볕 잘 드는 곳에 누워 손이나 살랑살랑 흔들기 일쑤였다. 며칠 지켜본 결과, 그는 의외로 틈만 나면 드러누웠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건지, 그냥 게을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왕이보가 보기에 샤오잔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것 같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뭘 믿고 저렇게 손님 앞에서 벌렁벌렁 드러누울까. 게다가 친절하기는 또 왜 그렇게 친절한가. 거리는 또 왜 그렇게 없고. 사람을 자꾸 그렇게 툭툭 만지고 스치고 하다가 어떤 오해를 살 줄 알고. 왕이보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내가 여자였다면 샤오잔이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을 거라고.
왕이보는 괜히 머리를 슬쩍 정리하고 샤오잔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가 놓진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거실에도, 부엌에도 샤오잔이 없었다. 화장실에 갔나 싶어 일단 음식은 냉장고에 넣어 두기로 했다. 그때 문득 침실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프다고. 살살해.”
“조금 참아요. ……나면 좋아할 거면서.”
“으……. 너무 큰 걸로 골랐어.”
“후회해도 늦었어요.”
왕이보는 덜컥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섰다.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도 놀랐지만 저 대화 내용이 지나치게 이상했다. 저 아프다고 하는 건 분명 샤오잔의 목소리였다. 왕이보는 순간 어쩔 줄을 몰라 얼굴 굳힌 채 뒷걸음질했다. 그러다 싱크대 위에 있던 맥주캔을 건드리고 말았다. 쿠당탕 소리가 울리자 왕이보는 더 놀라서 그냥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침실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먼저 나왔는데 머리가 치렁치렁 길고 팔에 문신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굳이 한마디로 인상을 표현해 보자면…… 양아치 같았다. 그는 엉거주춤 선 왕이보를 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손님 오기로 했었어요?”
“어? 응.”
뒤따라 나온 샤오잔은…… 조금 헐벗었다. 정확히는 셔츠 단추를 채우며 따라 나왔는데 왕이보가 보기엔 영 반쯤 벗은 것 같았다. 샤오잔은 꼭 평소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
앞에 선 남자는 왕이보를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뭔가 알겠다는 눈빛이라, 왕이보는 더욱 불쾌해졌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저런 사람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마치 알겠다는 눈빛이라서. 샤오잔은 셔츠 단추를 느긋하게 다 채우더니 왕이보에게 그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내 대학 후배야.”
“…….”
“여기 가끔 그림 그리러 놀러 와. 미대 나왔거든.”
왕이보는 기가 막혔다. 그림 그리러 왔다는 사람이랑 왜 방 안에서 단둘이 그런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도대체 뭐가 아프고 뭐가 큰데. 샤오잔은 앞에 버티고 선 남자의 등허리를 쿡 찌르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제 가. 손님 와서 멀리 안 나간다.”
“다음에 또 언제 볼까요. 2주 뒤?”
“따로 연락할게.”
“아프면 연락 주세요.”
“됐어,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데 새삼.”
둘이 속닥대는 꼴을 보고 선 채로, 왕이보는 문득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샤오잔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그냥 돈 빌려준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이 나서 왔나, 뒤늦은 의문이 이제야 들었다.
“더 있다 가셔도 돼요.”
불쑥 왕이보가 입을 열자 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화끈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했다.
“……누가 있을 줄 모르고 왔어요. 가 볼게요.”
샤오잔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며 왕이보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쟤 이제 갈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랑 밥 먹으러 온 거 아냐?”
“생각 없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샤오잔을 무슨 얼굴로 봐야 할지도 알 수 없는데 마주 보고 밥이라도 먹었다간 식욕은 고사하고 체해서 할아버지랑 같은 병원에 가게 생겼다. 이 상황을 미묘하게 웃으며 보는 저 남자 얼굴도 꼴 보기 싫었다.
“야, 너 주려고 딸기도…….”
“저기랑 같이 드세요.”
그게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왕이보는 차마 내뱉기도 싫은 말을 꾹 삼켰다. 먹은 것도 없이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뛰쳐나가 버렸다. 샤오잔은 더 이상 붙들지 않았다. 뒤에서 또 무어라 대화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왕이보는 슬리퍼를 신은 채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나중에 슬리퍼 앞으로 발이 툭 빠져나오며 넘어질 뻔하고 나서야 우뚝 멈췄다.
나, 조금 좋아했나 봐. 샤오잔을.
주위를 보니 이미 집을 지나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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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입원했다. 수술 날짜도 제법 이르게 잡혔다. 왕이보는 수술을 하루 앞둔 할아버지가 긴장할까 봐 몇 마디 걸어 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머니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아서 말주변 없는 왕이보는 열심히 수발만 들었다. 가습기 물을 채우며 왕이보는 두 사람을 흘끗 보았다. 할아버지는 주로 듣기만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고 편안해 보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저런 게 연애겠구나 했다.
샤오잔에게는 며칠 연락이 오다 말았다. 정확히는 왕이보가 답장을 돌려주지 않으니 끊어졌다 봐야 했다. 중간에 두세 차례 섬에 들어가긴 했지만 일부러 샤오잔의 집 쪽으로는 발길도 안 뒀다. 유채꽃밭도 피해서 돌아가곤 했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나는 건 아니었다. 창피한 마음이 더 컸다. 제 마음도 깨닫기 전이었는데 차이기부터 한 느낌이라 더 그랬다. 차라리 그 방에서 야릇한 대화 주고받던 게 여자였으면 이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애인, 심지어 남자 애인이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왜 막 그렇게……. 창피한 마음 다음으로는 서글픈 마음이 컸다.
물을 떠 오겠다는 핑계로 빈 물통을 들고 나와선 한참을 미적거렸다. 보통 이럴 땐 담배를 피울 텐데 왕이보는 흡연도 하질 않아 그냥 멍하니 허공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흘끗 보니 며칠 뜸했던 샤오잔이었다.
먹을 걸로 꼬셔 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젠 전략이 바뀌었다.
[창문이 깨졌는데, 유리 같은 건 어디서 새로 해야 돼?]
[사진]
사진을 보니 거실 쪽 창문 하나가 거의 산산조각 나 있었다. 도대체 뭘 했기에 멀쩡하던 창문을 다 깨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왕이보의 의문을 알기라도 한 듯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청소하다가 살짝 스쳤는데 깨지더라고.]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전화를 걸 뻔했다. 도대체 어떻게 청소를 하다 어떻게 스쳤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솔직히 스친 정도로 유리창이 저렇게 깨지는 거면 무서워서 청소를 어떻게 하겠는가.
다친 덴 없는지도 솔직히 궁금했다. 아직 안 치웠으면 그냥 내가 가서 치워 줄 테니까 안 밟게 조심해서 다른 방에 가 있으라고도 하고 싶었다. 고작 며칠밖에 안 봤지만 샤오잔은 대체로 누워 있고, 생각보다 생활력이 좀 떨어지는 병약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런 걱정은 제 몫이 아닌 것 같았다. 샤오잔에게는 애인이 있으니까. 비록 남한테도 과도하게 친절하지만 애인이 있으니까. 왕이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또 시무룩했다.
더 이상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쳤다.
 
할아버지의 수술은 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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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알람이 울렸다. 알람 이름은 ‘이자 납부 하루 전’.
왕이보는 알람을 끌 생각도 못 하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벌써 돈 빌린 지 한 달이 지난 셈이다. 계좌로 보내면 되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오늘은 섬에 들어가서 자기로 했다. 며칠 보조 침대에서 웅크리고 잤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할아버지의 거동이 아직도 편하질 않아서 아주머니에게 다 맡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연애 중인데 소변통 비우기를 아주머니가 하시면 셋 모두가 불편해질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에서 쭉 떠나질 못했다. 오늘도 가서 하루 자고 옷만 챙기고 아침에 도로 나와야 했다.
“배 시간 늦겠다. 얼른 가 봐라.”
“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래. 저녁 잘 챙겨 먹구.”
할아버지의 수술이 끝나길 둘이 함께 기다리며 왕이보는 상회 아주머니와 제법 가까워졌다. 이제 섬에 처음 들어오던 때처럼 심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마음이 제법 그득하고 든든했다. 늘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그게 많이 옅어진 기분이라.
섬까지 들어가는 동안,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사실 마음이 시끄러웠던 건 혼자 오해하고 지레짐작했던 탓이지, 샤오잔은 죄가 없는 것 같았다. 애인 있다고 꼭 이마빡에 써 붙이고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애초에 주인 있는 자리를 보며 앉을까 말까 고민을 했던 셈이다. 이자를 송금하고 연락하는 김에 넌지시 에둘러 사과하면 될 것 같았다.
샤오잔은 착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또 그냥 대수롭지 않게 웃고 말 것이다.
섬 선착장 갑판은 낡은 데다 틈새가 듬성듬성해서 제대로 보고 내리지 않으면 발 끄트머리가 끼거나 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발 조심하라고 빨간 글씨로 커다랗게 써 갈겨 놓은 건 이미 사고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착실하게 아래를 보며 선착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드니 샤오잔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왕이보.”
붉은색 페이즐리 셔츠를 입은 그는 환하게 웃으며 왕이보를 반겼다. 다만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왕이보는 황급히 옆으로 한 발짝 비켜났다. 왕이보 뒤에 따라 내리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느라 둘은 선착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왕이보가 대충 멘 가방 어깨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너 기다렸지.”
“저요?”
“응.”
“왜요?”
샤오잔은 별 스스럼없이 답했다.
“너 이자 안 내고 도망갔나 해서.”
“그거 내일인데.”
“아, 그랬나?”
그랬나, 하는 걸 보니 딱 보아도 이자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꽃 꺾었을 때 내는 벌금이랑 이자 금액이 비슷하다. 그 돈이 궁해서 굳이 선착장에서 기다리진 않았을 것 같았다.
“나 배고픈데 같이 저녁 먹어.”
“……배가 별로 안 고픈데요.”
“나는 고파.”
어차피 밥을 같이 먹어도 늘 새 모이만큼 먹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자꾸 재촉했다. 왕이보는 어쩐지 미심쩍은 눈으로 의심하면서도 결국 그러자 했다. 어차피 집에서 혼자 먹을 저녁 같이 먹는 셈 치고. 가급적 비대면으로 메시지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을 그냥 직접 하는 셈 치고.
몇 발짝 뗐는데 선착장 매표소 근처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어서 왕이보도 금방 알아봤다. 해피머니에 있던 아저씨였다. 왕이보에게 펄펄 끓는 녹차를 주었던.
“생각보다 쉽게 잡혔습니다.”
인상을 쓰면서 다가와 하는 말에 샤오잔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구나. 모기가 잡혔다니 참 다행이다. 오늘 밤에도 못 잘 뻔했네.”
“네?”
“고생 많으셨어요, 실장님. 얼른 가서 저녁 맛있게 드세요.”
샤오잔의 말에 잠깐 영문 모를 표정으로 보던 아저씨는 왕이보를 한차례 훑었다. 그러더니 이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왕이보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 아직 못 고쳤어요?”
“응?”
“여긴 날이 좀 더워서 모기가 더 빨리 나와요. 창문 얼른 고쳐야 될 텐데.”
샤오잔은 웃으며 말했다.
“아. 아냐, 고쳤어. 그런데 며칠 깨진 상태로 뒀더니 그때 들어온 모기가 내도록 안 잡혀서.”
여기저기 잘 드러눕고 잠도 잘 자는 것 같았는데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예민한 모양이었다. 그냥 창문이 깨졌다고 연락이 왔을 때 모르는 척 이것저것 알려 주기라도 할걸, 왕이보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할아버지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야?”
“네. 수술 잘 끝났어요.”
“아, 벌써 수술을 하신 거야? 그래서 며칠 연락이 안 됐구나.”
“……네, 뭐.”
왕이보는 머쓱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사실 그게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얘기하기는 조금 애매해서. 수술이 잘 끝났다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샤오잔의 목소리가 퍽 부드러웠다. 얼핏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 또 괜찮아진 것 같았다.
샤오잔의 집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다. 먹을 게 없으면 뭐라도 요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잘되었다. 왕이보는 자연스럽게 싱크대 앞에 서서 음식을 그릇에 적당히 덜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식탁에 앉은 샤오잔이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겸연쩍어서 왕이보는 왜 그리 보냐고 물었다. 샤오잔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다시 놀러 오니까 좋아서.”
왕이보는 또 어디 한군데가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그런 말을 막…….”
“응?”
“하, 아니에요.”
애인도 있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아무한테나 잘해 주고 다정하게 말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애인이면 절대 저 꼴은 못 볼 것 같았다. 제2의 왕이보, 제3의 왕이보…… 제1823의 왕이보까지 양성해 내고 말 게 분명하니까. 한숨을 푹푹 쉬며 밥상을 차린 후 앞에 앉았다. 한 거라고는 음식 그릇에 덜어다 식탁으로 옮긴 것밖에 없는데 샤오잔은 솜씨가 좋다며 칭찬했다. 저마저도 왕이보는 속에 턱 걸린 것 같았다.
밥 먹는 데에 영 집중을 못 해서 식탁에 음식 흘린 것만 세 번이었다. 식탁이 좁아서 그런지, 샤오잔의 다리가 너무 길어서 그런지 자꾸 식탁 밑에서 발목끼리 스쳐서였다. 다리를 움츠렸다가 저도 모르게 폈다 하면 잠시 후에 툭 스치곤 하는 것이었다. 정작 샤오잔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왕이보만 죽을맛이었다.
영 먹질 못하니 샤오잔이 걱정스레 물었다.
“입맛 없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냥 좀…….”
대충 얼버무리고 흙 씹는 사람처럼 밥을 씹었다. 제 시커먼 마음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었다. 그때 샤오잔이 몸을 일으키더니 별안간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왕이보는 입에 든 걸 삼키지도 못한 채 화들짝 놀랐다. 열을 체크하려는 듯 이마를 갖다 댄 건데, 아까 발목이 자꾸 스치며 괜히 애먼 생각을 했던 탓에 지나치게 놀라 버렸다.
왕이보의 뺨을 두 손으로 쥔 채 이마를 대어 본 샤오잔이 고개를 갸웃했다.
“살짝 열이 있나?”
“이, 이거 좀 놓고…….”
“이마는 괜찮은데 얼굴이 뜨겁네.”
너무 가까웠다. 왕이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샤오잔의 손목을 콱 잡아 떼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샤오잔에게 말했다.
“이런 거. 이런 거 하지 마요.”
“응? 열 재는 거?”
“아니, 이거랑 그 다른 것도 있는데. 아니, 아무튼 하지 말라고요.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샤오잔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더 왕이보를 돌게 했다. 대부업 하니까 험한 사람들도 많이 만날 텐데 이러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또 그 와중에 인정은 또 얼마나 많은가. 불쌍한 사람들한테는 다 그렇게 금리 깎아 주고. 게다가 어떤 마음을 품을 줄 알고 자꾸 이렇게…….
걱정되는 마음과 화가 나는 마음이 뒤섞이니 화내듯 걱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도 많고, 그런 일도 하면 사람을 의심할 줄도 알아야죠. 이런 거 하지 말라고요. 진짜 짜증 나.”
“어?”
“애인도 있으면서.”
이를 악문 채 말하자 샤오잔이 멍하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보야.”
“왜요.”
“나 손목 아픈데.”
그 말 한마디에 왕이보는 숯이라도 쥐었던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손목을 놨다. 셔츠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이 붉어져 있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막은 왕이보는 잠깐 굳은 듯 멈춰 있다가…… 달아났다.
“왕이보! 야!”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뜀박질이 더 빨라졌다. 그런데 문제는 샤오잔의 목소리가 뒤에서 자꾸 들린다는 거였다. 거기 좀 서 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무시하며 뛰었는데도 그랬다. 달리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오는 길엔 사과를 해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왜 손바닥으로 재도 될 열을 굳이 이마를 갖다 붙여 가면서 그렇게 재는가. 이건 왕이보도 할 말이 많았다.
슬쩍 돌아봤는데 저 멀리서 샤오잔이 소리를 치며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렇게 험악한 얼굴로 소리 지르는 게 처음이라 왕이보는 더 죽어라 뛰었다.
뛰다 보니 유채꽃밭까지 왔다. 어느새 해도 거의 다 져서 아무도 없었다. 붉고 또 노랗게 넘실거리는 꽃밭을 보니 불현듯 서러웠다. 어느새 뒤에선 쫓아오는 소리도 안 들려서 멈춰 섰다. 꽃밭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애인만 없었어도 슬쩍 좋아하는 시늉쯤은 해 봤을지도 모르는데. 시작도 전에 싹 잘린 첫사랑이 서러웠다.
그때 발소리와 함께 샤오잔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숨이 많이 가쁜 모양으로 무릎을 쥐고 옹송그린 채 헐떡였다. 왕이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픈 사람인데, 자기를 쫓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도망치던 것도 잊고 도로 뛰어가려는데 샤오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도로 마구 뛰어왔다.
“너, 이…… 허억, 새끼, 또 도망을 가……!”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왕이보는 샤오잔을 멈춰 세워야겠단 생각으로 얼결에 그를 막아 세웠다. 거의 전속력으로 달린 샤오잔이 들이받히니 왕이보도 휘청했다. 버텨 보겠다고 몇 발짝 꽃밭 쪽으로 들어가며 휘청대다 결국 끌어안은 채로 꽃밭 위로 둘이 함께 쓰러지듯 넘어져 버렸다.
샤오잔은 한참을 숨을 고르며 헐떡였고, 왕이보는 샤오잔을 위로 올린 채 넘어지느라 어깨랑 뒤통수를 찧어서 한참을 끙끙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꽃밭 위로 넘어져서 충격이 덜했다.
“괜찮아요?”
왕이보가 묻자 간신히 숨을 고른 샤오잔이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세웠다. 일단은 좀 일으켜 주려고 하는데, 샤오잔이 갑자기 왕이보의 멱살을 잡으며 도로 눕혔다.
“그게 걱정되는 놈이 그렇게 도망을 가?”
“……쫓아올 줄 모르고 그랬는데.”
“나 보고도 도망갔잖아!”
“너무 무섭게 쫓아오니까…….”
저도 모르게 말끝을 얼버무렸다. 샤오잔은 이를 악물더니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
“일단 일어나서 하면 안 돼요? 이것도 좀 놓고.”
“왜? 또 도망가게?”
“안 그래요.”
샤오잔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일단 몸을 일으켰다. 왕이보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는 꽃대가 다 바닥에 납작 붙어 버렸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꽃밭 한구석이 뭉개졌는데도 샤오잔은 눈치채지도 못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왕이보만 봤다.
“읊어 봐.”
왕이보는 퍼질러 앉은 채로 눈치를 살피다 삐쭉거렸다.
“도망친 건 맞는데, 돈 안 갚으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갚을 거예요.”
“알아. 돈도 갚을 건데 왜 도망쳤는지 읊으라고.”
“그게, 샤오잔이 먼저…….”
“내가 뭐. 내가 잘못했다고?”
“……자꾸 사람을 가만히 안 놔두잖아요.”
노을이 붉게 넘어가면서 그렇잖아도 붉은 왕이보의 얼굴은 더 빨개 보였다. 샤오잔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로 가만히 안 놔뒀으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누웠겠지.”
“네?”
“아냐, 계속해.”
샤오잔의 눈썹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슬쩍 올라가 있었다. 그 얼굴이 생각보다 제법 사나워서 왕이보의 얼굴은 점점 시무룩해졌다. 뚱한 얼굴로 애꿎은 엄지손톱만 자꾸 문지르다 말했다.
“애인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애인?”
샤오잔은 정말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저렇게까지 모른 척을 하니 왕이보는 이제 답답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전에 그 미술 한다는 후배 왔을 때, 저 들었어요. 안에서 얘기하는 거.”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 무슨 얘기 했었지?”
샤오잔은 잠시 고민하는 듯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하지만 영 생각이 안 나는 모양으로 무슨 얘길 들었냐고 물었다. 이것까지 읊으라고 하는 건 너무 무도하다. 왕이보는 한사코 거절했다. 아무튼 자기 다 들었다고. 하지만 샤오잔은 집요했다.
“빨리 말 안 해? 이게 진짜.”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고 윽박지르니 왕이보는 억울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크다고! 아프다고! 살살 하라고!”
“……아.”
샤오잔은 순간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할 만하긴 했네, 중얼거리기도 했다. 왕이보는 영 사나운 눈으로 그런 샤오잔을 노려보았다.
“애인도 있으면서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오해하면 어떡하려고.”
“누가 오해를 하는데?”
“내가요.”
샤오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주위를 잠깐 둘러보다 갑자기 왕이보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훅 딸려가면서도 왕이보는 너무 놀라 저항도 못 했다.
“또 도망가면 진짜로 죽어. 똑바로 봐.”
샤오잔은 멱살을 툭 놓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선 채 붉은 셔츠를 위로 끄집어내어 쑥 올렸다. 맨살이 고스란히 획 드러났다. 왕이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샤오잔은 분명 뒤돌아 있는데, 영 애먼 분이랑 눈이 마주쳤다. 인자한 인상의 천수관음보살이랑. 등에 빼곡하게 들어찬 팔을 멍하니 보는데, 샤오잔이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봤어? 너무 큰 걸 골랐다고. 이거 보기보다 되게 아프거든?”
왕이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너무 충격적인 걸 보면 말문이 막히곤 하니까 당연했다. 그러면 그때 들었던 게 문신하는 소리였던 거고, 큰 거 골랐다는 말도 문신을 너무 큰 걸 골랐던 거고, 그 양아치는 문신을 새겨 주려고 섬까지 출장을 온 성실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림을 등짝에 그리는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애인은 없었다. 샤오잔에게 애인이 없다.
샤오잔은 말아 쥐고 있던 셔츠를 대충 툭툭 털어 정리하고는 왕이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왕이보. 이래도 애인 어쩌고 할래?”
“……아, 아니요.”
“왜 웃어?”
“안 웃는데요.”
“너 지금 웃는데.”
“아닌데요.”
아니라고 잡아떼면서도 알았다. 입꼬리가 자꾸 실실 기어 올라갔다. 잡아 눌러도 슬금슬금 올라가기를 반복해서 결국은 웃어 버렸다. 등짝에 문신이 있는 것쯤이야 양아치 애인이 있단 소식보단 훨씬 나았다. 샤오잔은 오히려 왕이보가 웃으니 맥이 빠진 듯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해하면 어쩌냐고 했지?”
“……아. 네.”
왕이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샤오잔은 한 손을 뻗어 왕이보의 두 뺨을 꽉 모아 쥐었다. 그리고 복어처럼 툭 튀어나온 통통한 입술을 노골적으로 보며 말했다.
“해.”
“…….”
“오해하라고. 이 정도 떠먹여 줬으면 이제 뭐라도 좀 해.”
왕이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뺨이 여전히 잡힌 채로 눈까지 커다랗게 뜨니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샤오잔이 놓아 주니 말랑말랑한 뺨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던 왕이보는 돌연 샤오잔의 양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제 해는 수평선 거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렸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가운데 왕이보의 입술이 샤오잔의 입술에 닿았다. 사실은 거의 들이받은 것에 가까웠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냅다 입술을 갖다 댄 그 애를 보며 샤오잔은 아주 작게 웃었다. 누가 봐도 첫 키스를 하는 모양새라서.
잠시 후 입술을 잠깐 떼더니 왕이보가 얼굴이 벌건 채로 말했다.
“근데…… 등에 문신은 왜 그렇게 큰 걸 했어요? 혹시 조폭…….”
“키스하면서는 집중해야지.”
샤오잔은 말허리를 뚝 자르고 왕이보의 입술을 깊게 물었다. 혀를 슬쩍 밀어 넣으니 순간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이 콱 들어갔다. 일단 잡아 왔으니 밤새 가르칠 게 많아서 잠 못 이룰 걱정을 기꺼이 하며 샤오잔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노란 꽃이 자꾸만 뺨이며 손등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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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공 #도망공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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