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이전글 다음글
달

@noctilucent_DAL

샤오잔이 날 때부터 살아온 세상은 잿빛으로 가득 찬 회색 도시였다. 우중충한 회색으로 덧씌워진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삭막하기만 했다. 칙칙한 세상이 누군가는 총천연색으로 빛난다고 말해도 청자인 샤오잔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는 하늘은 언제나 밝은 회색이었고, 먹구름이 끼면 그보다 어두운 회색일 뿐이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온통 까맣기만 한. 밤하늘이 마냥 까맣기만 한 게 아니라 짙은 푸른빛을 띤다고 말해봐야 그저 먹색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희박한 확률로 희귀한 체질로 태어난 사람들을 세상은 조건부 색맹이라는 단어로 일컬었다. 조건부라는 단어가 붙은 건 날 때부터 색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미래에도 색을 알지 못하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색을 잃어버린 채로 태어나도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그와 닿을 때마다 색을 하나씩 찾아간다. 샤오잔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그녀의 하나뿐인 자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어린 샤오잔을 품에 안고 색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색이 주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내가 네 아버지를 만났듯, 너에게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줄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거야. 어린 샤오잔에겐 그 말이 꼭 낭만처럼 들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를 둘러싼 환경은 운명의 상대라는 낭만을 간직하기엔 너무나 척박했다.
샤오잔의 성장기는 노도가 밀려드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견제하는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 일이 힘에 겨웠다. 타고난 성정이 상냥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악의에 매번 상처를 입었다. 가업보다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새 장 안에 갇힌 새처럼,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가문에 묶인 채 주어진 제 몫을 묵묵히 해냈다. 1등은 아니어도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원만한 대인 관계를 형성했다. 운동은 특출나게 잘하지 않아도 좋아했고 특히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 샤오잔은 같은 항렬 중 가장 우수한 인재로 손꼽히며 샤오가 가주의 사랑을 받았다. 바라지 않던 일이고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촌 형제들과 친인척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물어뜯기 일쑤였다. 도저히 같은 피가 섞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위에 샤오잔은 남몰래 울기도 했다. 특히 색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공격거리가 되었다.
샤오잔의 꿈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미술관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막대한 부도, 한 기업의 높은 자리도 무의미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샤오잔을 포함한 형제들은 모두 기업의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았다. 단 한 번, 미술이 하고 싶다고 했으나 색도 모르는 사람이 미술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대에 부딪혔다. 온통 무채색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재능을 보인다는 건 흡사 저주에 가까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묘 같은, 오로 하나의 색으로만 표현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말대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검푸르다는 색은 어떤 느낌인지 제게는 그저 하얀색에 가까운 밝은 회색 하늘의 원래 색을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샤오잔은 모든 걸 체념하길 강요받으면서도 단 하나의 소망은 포기하지 못했다.

DAYDREAM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손끝이 초조했다. 비서에게 내민 종이에는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의 한 컷이 인쇄되어 있었다. 선명한 화질로 인쇄된 종이에는 드라마의 주연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는 잠시 제 상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검색 한 번이면 알 수 있는 사람을 왜? 비서는 제 상사의 뜻을 묻기 위해 손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지시하신 분이 이 사람이 확실하십니까?”
“아… 아니, 아닙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물 말씀이십니까?”
 
재차 확인하는 목소리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제 상사가 이제 와 연예인을 후원할 리 없는데.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비서는 그를 찾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철두철미한 제 상사가 내민 사진이 고작 한 장뿐이라면 아마 주인공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확률이 높았다. 나오는 장면도 이게 다였겠지. 이거 조금 힘들겠는데. 곤란한 마음에 이마를 긁적이던 비서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샤오잔의 비서로 부서 이동을 한 이래 처음으로 사적인 지시를 내린 일이다. 개인 비서까지 겸하는 자리인데도 도통 제 상사는 사적인 일은 맡기지 않았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며 출퇴근 운전조차 본인이 직접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게 일을 맡겼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자고로 능력 있는 비서란 고작 컷으로만 나온 사진일지언정 그 인물에 대한 과거까지 줄줄이 보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서가 전의를 불태우는 동안 샤오잔은 하얀 피부색이 도드라지던 인물이 떠올라 심장을 움켜쥐었다.
샤오잔의 세상은 언제나 단조롭기만 했다. 색이 없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회색이 아닌 다른 색을 보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운명의 상대가 네모 상자 안에 있었다.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정도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천지개벽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터였다. 처음으로 본 색은 말갛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말갛다는 단어가 어떤 단어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주인공의 뒤에서 눈을 내리깐 채 서 있는 장면이 전부였지만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충동적으로 일을 진행해본 적이 없는 샤오잔이지만 당장 그를 만나고 싶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밤새 1화부터 현재까지 방영된 모든 회차를 봤지만, 단역으로 잠깐 나왔던 건지 겨우 한 장만 건졌을 따름이다. 사진으로 검색도 해봤지만 아무리 넘기고, 넘겨도 주연 배우의 사진만 나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결국 잠 한숨 제대로 못 잔 채 출근한 샤오잔은 비서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많아 그를 찾는 것에만 몰두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오전 내내 밀린 서류를 검토하고 결재해도 서류는 다시 또 그만큼 쌓였다. 평소라면 금세 처리할 양이었으나 그 남자가 자꾸만 생각나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허공을 응시할 때,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비서였다. 그는 종이뭉치를 들고 와 자신의 상사에게 내밀었다. 비서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알아본 듯 양이 상당했다. 네모반듯한 종이에 한 인물의 내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별반 도움이 될 만한 이력은 없다. 단역 아니면 비중이 적은 조연만 전전하는, 배우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성실하고 열심히는 살았네. 그게 왕이보라는 인물의 첫 감상평이었다. 얼굴도, 몸도 나쁘지 않은데 왜 못 떴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비서의 얼굴조차 무채색으로 보이는데, 그의 얼굴만 또렷하게 색이 입혀져 있다. 샤오잔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 손을 대보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혹시나 다른 색이 보일까 봐서. 그러나 당연하게도 다른 색이 드러나는 일은 없다.
 
“어린 나이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 데뷔했지만,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금세 해체했다고 합니다. 오디션은 계속 보지만 번번이 탈락해서 비중 있는 배역보다는 스쳐 가는 엑스트라나 일회성 장면에 출연하는 단역이 이력의 전부입니다.”
 
비서의 말처럼 그의 이력은 단역으로 빼곡했다. 그나마 이것도 최근 들어 일이지 그전에는 엑스트라로만 살았던 모양이다. 친인척들의 견제만 없더라면 순탄한 인생을 살았던 샤오잔에겐 왕이보의 이력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로 안 풀리면 보통 다른 일을 찾아보기 마련인데 그는 떨어질지언정 꾸준히 오디션을 봤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이력임에도 불구하고 업계 평판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얼굴은 무뚝뚝해 보였고, 그의 이력대로 삶이 녹록하지 않았던 탓인지 눈빛은 고생이 역력했으나 얼굴은 하얗고 볼살도 제법 말랑하니 앳되어 보였다. 이제 24살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직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운명이란 건 믿지 않지만, 이 사람이 제게 잃어버린 색을 되찾아줄 사람이란 건 안다. 샤오잔은 색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무채색의 세상이 다채로워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래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가 제게 도움을 준다면 저 역시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쥐여 주고 싶었다.
샤오잔은 일평생을 친인척들의 견제 속에 살아 그들이 자신을 공격했을 때 터트릴 약점을 몇 개 틀어쥐고 있었다. 정치적인 성향과 거리가 한참 멀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재능이 뛰어난 화가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사랑했다. 더군다나 색을 잃어버린 어머니에게 색을 되찾아준 아버지는 그 공을 인정받아 집안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의 관장을 맡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하나뿐인 고명딸인 어머니가 받은 사랑은 다른 삼촌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 샤오잔은 날 때부터 견제 속에 살았다. 하나라도 더 틀어쥐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인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하는 것 없이 받아 가는 게 못마땅한 듯 굴었다. 소소한 행복을 꿈꿨던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점점 정치적으로 변했고, 이는 샤오잔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탄했지만 피곤했다.
살아남기 위해 틀어쥔 몇 개의 약점 중에 제 사촌 형제들의 부적절한 스폰 관계가 있다. 샤오잔은 그들을 혐오했고, 그들 같은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풀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샤오잔은 비서에게 곧 지시를 내렸다. 이 사람과 시간을 잡아줄 수 있겠느냐고. 비서는 잠시 빡빡한 일정으로 빼곡히 들어찬 스케쥴러를 떠올리다 이내 지워냈다. 일정이야 조율하면 그만이지. 제 상사가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일에도 이토록 간절한 시선을 보낸 적은 없었다.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주곤 하는 상사의 눈빛을 외면하기엔 제 그와 지내 온 시간이 길었다. 비서는 이내 일정을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왕이보라는 인물과 연락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비서가 나간 후 샤오잔은 몸을 일으켜 암막 커튼을 걷고 불빛이 사라지지 않는 시가지를 내려보았다. 그의 사무실은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지역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말로는 답답한 게 싫다는 이유였지만,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그를 특별히 아끼는 회장님의 배려도 있으나, 외손자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샤오잔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그저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던 자리는 지나친 견제와 방해 공작에 시달렸다. 대립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으면 우습게 보이기만 했다. 부모님이라고 지쳐가는 아들의 상태를 모르지 않아 힘들면 그만두어도 된다 했지만, 승부욕이 강해 그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가슴 속에 묻어둔 채. 그렇게 살아온 게 30년이었다. 샤오잔은 손에 쥔 파일의 가장 앞장에 붙여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맺고자 하는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리스트를 감당하고서라도 색을 찾고 싶었다. 색을 찾아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었다.
왕이보에 대해 알아볼수록 샤오잔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기업과 정치, 그리고 연예계는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연예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 자연스럽게 돈의 흐름은 그의 뒷배경으로 흘러 들어간다. 기업이나 정치인들이 한 명의 연예인을 성공시키면 몇 배나 되는 돈이 다시 그들의 곳간을 채우고, 그렇게 키운 이들은 자산이 된다. 샤오잔도 이런 생태계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관심 밖의 일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을 뿐이다. 굳이 연예계에 입김을 불어 넣지 않더라도 샤오잔은 충분히 능력이 있었고, 이를 실현할 추진력 또한 가졌으며, 재력이라면 지금 당장 망해 삼대가 거리에 나앉아도 문제가 없을 만큼 차고 넘쳤다. 그러니 그들이 가져다줄 돈이 그다지 탐나지도 않았을뿐더러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역겹지 않은가.
왕이보가 데뷔했던 그룹은 2년 정도 방치되다 해체됐다. 4인조 그룹은 뿔뿔이 흩어졌고, 한 명은 가수 겸 배우로 어느 정도 입지를 쌓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다른 두 사람은 인디밴드를 꾸려 소소하게 인지도를 넓혔다. 그들 중 가장 안 풀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운이 나쁜 건지 매번 오디션 1차에서 좌절되거나 최종경합까지 가도 번번이 미끄러졌다. 어렵사리 1년 전에 방영됐던 드라마의 오디션 영상을 구해 확인했을 때 그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눈빛과 표정이 좋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연기했으며, 몸이 가벼워 액션 연기도 탁월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연기력 논란이 따라다니는 배우를 쓴 건 감독의 자질이 의심될 정도였는데, 결국 스폰서 문제였다. 왕이보는 내부적으로 발탁이 되더라도 결국은 배우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이들에게 배역을 뺏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지지리 운도 안 좋을 수가 있나. 그런데도 꾸준히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왕이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비서를 닦달해 하루빨리 만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오잔은 비서를 통해 곧 제작에 들어가는 드라마 몇 개의 대본을 골라둔 상태였다. 왕이보에게 그에 맞는 배역을 품에 안겨줄 생각이었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주제에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닌가, 잠시 고민했으나 이 정도는 그가 제게 줄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검색하던 샤오잔은 예상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단역이나 비중이 아주 희박한 조연이었음에도 그를 주목하는 글이 더러 보였고, 아이돌 그룹 시절 생긴 팬들이 소소하게 올린 영상들이 남아있었다. 춤을 춰서 그런지 몸을 쓰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고 유연하고 매끄러웠다. 굳이 성우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목소리도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밑바닥에 있는지 모를 만큼 스타성이 충분한데 알아보지 못하는 제작자들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성격은 어떤지 모르나 업계에서 알음알음 예의 바르다 소문난 정도면 그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턱을 괸 채 국어책을 읽다 못해 남주의 대사를 건너뛴 샤오잔의 시선이 남자주인공의 뒤에 서 있는 왕이보에게 닿았다. 지금 가장 바라는 건 그를 만났을 때, 왕이보가 제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일정을 조율해 왕이보를 만나기로 한 날에는 전에 없이 긴장됐다. 색을 찾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와 스킨쉽이 필수 불가결하기에 그가 선뜻 승낙할까 하는 의문이 뒤늦게서야 든 탓이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나서야 아버지와 떨어져도 색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다는데, 저는 남자이다 보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걱정이 밀려들었다. 협상할 때 말주변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스폰 관계와 다를 바가 없으니 그가 선뜻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분명 단순 접촉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긴장된 상태로 룸에 들어가자 단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인기척에 왕이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오잔을 응시했다. 마주친 눈빛은 전에 없이 또렷했고 형형했다. 샤오잔은 흐릿한 세상 속에서 홀로 색채를 띠는 왕이보를 잠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상을 통해 볼 땐 밀빛이던 피부는 실제로 보니 찹쌀떡처럼 하얗고 뽀얗다. 단지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색이 점점 번져나갔다. 실로 믿기지 않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앉아요. 왕이보씨.”
어색하게 손짓으로 의자를 가리키자 왕이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샤오잔 역시 맞은편에 앉아 저도 모르게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샤오잔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 벨을 눌러 직원을 부르는 손길엔 은근한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직원이 들어오고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야 겨우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그제야 샤오잔은 두 사람이 메뉴를 고를 때 빼고는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샤오잔은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난감했다. 막상 운을 떼려니 말이 꼬이는 듯했다.
 
“음, 우선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많이 당황했죠?”
“네, 뭐...”
“내 이름은 샤오잔이에요. 편하게 불러줬으면 해요.”
 
거기까지 말을 마치자 할 말이 없어진 샤오잔은 두 눈을 굴렸다. 제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당사자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 수 없어 자꾸만 망설이게 됐다. 비서가 본다면 평소엔 회장님 앞에서도 따박따박 잘도 말씀하시면서 왜 머뭇거리느냐 의문을 표할 정도였다. 샤오잔은 타는 목을 축이고 여전히 말이 없이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왕이보의 눈을 마주했다. 눈빛이 형형하고 또렷해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입이 바싹 말랐다.
 
“비서가 언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제게요?”
“그래요. 당신에게는 조금 불쾌할 수도 있는 제안일 수도 있지만…”
 
세상 어려운 문제를 만난 것만 같다 샤오잔은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왕이보는 여전히 바른 자세로 샤오잔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운이 좋게도 에피타이저가 나왔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꺼내는 것보다 음식을 먹으며 조금 더 풀어진 분위기에서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에 샤오잔은 우선 식사부터 하자는 말을 꺼냈다.
왕이보는 몇 번이고 망설이는 샤오잔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했다. 몇 날 며칠을 연락해 귀찮게 굴던 비서를 떠올리다 이내 털어버렸다. 단번에 말하지 못할 정도면 조금 심각한 이야기인가, 그룹 이름과 직함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나... 일단 그의 태도가 이전에 제게 비슷한 제안을 했던 사람들과는 달라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칼같이 거절하고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왕이보는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대충 늘 시키던 코스를 시킨 탓에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비워질만 하면 채워지는 테이블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샤오잔은 적당한 포만감이 들어 메인 메뉴도 나오기 전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갑작스럽겠지만…. 왕이보씨는 색을 잃어버린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죠?”
“아, 네. 그건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도 종종 다뤄지니까요. 들어는 봤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에요. 날 때부터 지금까지 온통 회색뿐인. 그런데 우연히 왕이보씨를 보고 나서 어렴풋하게 색을 되찾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서 말인데, 제가 색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대신 원하는 건 섭섭하지 않게 전부 들어줄게요.”
 
샤오잔은 절박했다. 색을 찾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지 않을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가? 성격에도 맞지 않는 허울뿐인 감투를 버릴 수 있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왕이보를 바라보았다. 왕이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그 사이 한차례 테이블이 바뀌었다. 메인이 나오는 순간에도 왕이보는 별말 없이 숟가락을 의미 없이 휘적거렸다. 그는 천천히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고, 한참만에야 나온 대답은...
 
“싫습니다.”
 
거절이었다. 그야 제 제안이 그의 입장에선 굉장히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생각보다 타격이 커서 샤오잔은 가만히 큰 눈을 꿈뻑거렸다. 왕이보는 무 자르듯 제안을 거절하고 스테이크를 자른 접시를 바꿔 가져갔다.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아 그대로 내버려 두웠던 스테이크도, 그의 행동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당황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 왜죠? 왜….”
 
왕이보가 생각하기에 샤오잔이 그에게 내민 제안은 간단했다. 제가 색을 되찾아주는 대신 원하는 바를 전부 들어준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그 의미가 확실했다. 겉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은 스폰 제안이었다. 그리고 왕이보는 그 점에 강하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 사이 왕이보는 샤오잔이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그의 접시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둔 제 접시와 바꾸었다.
 
“당신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저는 스폰 제안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스폰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맞지만 그래도….”
“색을 되찾는 것이 당신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저는 그쪽에 관심이 없어서요.”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모를까. 뒤이어 따라오는 말에 샤오잔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에게 불쾌한 이야기일 텐데도 아무런 대가가 없으면 다르다고? 샤오잔은 저도 모르게 그게 무슨 소리냐 반문했다. 그의 물음에 왕이보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샤오잔을 응시했다. 눈앞의 미인에 가까운 미남은 진심으로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광은 빛났으나 까닭 모를 의문을 품고 있다. 그는 제가 이미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다시 잘게 자르고 있었는데, 흡사 고기를 다지는 행위에 가까웠다. 아깝게. 제 돈으로는 큰마음을 먹고 와야 올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는 육즙이 부드러웠고, 굽기 정도도 좋아 씹는데 부담이 없다. 왕이보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몸짓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샤오잔에게 스파클링 샴페인이 담긴 잔을 밀며 덧붙였다.
 
“원하는 대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샤오잔은 다소 부드러운 눈빛을 한 왕이보를 보며 샤오잔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정말로 아무 대가가 없다면 해줄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샤오잔을 보며 왕이보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다고 한 건…. 그냥 관계가 너무 비즈니스적으로 흘러갈 것 같아서요. 그럼 내 손해가 너무 막심해서.”
“손해요…?”
 
무심결에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던 샤오잔은 접시를 긁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스테이크는 먹기 좋은 크기로 깔끔하게 썰려 있어서 애꿎은 접시를 긁은 셈이 됐다. 고개를 들어 왕이보를 바라보니 그는 반으로 가른 스테이크를 다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있었고, 그제야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때 제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갔던 게 떠올랐다.
 
“그건 습관인가요?”
“아, 그냥 습관입니다. 불쾌하셨을까요?”
“…아뇨. 배려 고마워요.”
 
식사는 조용히 진행됐다. 왕이보의 식사 매너는 어디에 내보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의 기질은 예상 밖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제 생각보다도 마음에 든 탓에 조금 더 붙잡아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정말로 저랑 관계를 맺을 생각 없으실까요?”
“대가가 있다면 제 대답은 같습니다.”
“…. 그럼 손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요?”
“아, 그건 감정이 끼어들면 곤란하니까요.”
 
감정? 샤오잔이 단어를 짚어내자 왕이보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소리도 내지 않고 내려놓았다. 이윽고 맞물린 시선은 단단하고 올곧았으며 동시에 강렬했다. 샤오잔은 아주 오랜만에 시선에 잡아먹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관계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이 색을 다 찾고 나면 우리 관계는 끝일 텐데, 그 사이 제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좋…, 좋아하게 된다면….”
”거봐요. 제가 당신에게 제안을 받았듯 사람 관계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만일 대가를 받게 됐을 때, 나는 더는 줄 게 없다고 하면 저만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모습은 배부른 사자마냥 여유롭다. 그는 관계의 주도권이 제게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그에게 달려있었다. 샤오잔은 그의 허락에 따라 처지가 달라진다. 샤오잔은 영원한 회색 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반드시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나는 정말로 색을 찾고 싶어요. 이건 전적으로 내 욕심에 가까운 일이니 딱 한 번,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
“이것도 아닌가요?”
 
왕이보는 샤오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메인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은 간절했다. 제가 뭐라고 저렇게 간절하게 바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왕이보는 더 거절하자니 제가 쓰레기가 된 것만 같아 결국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무릇 사람 일이란 게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으나 24세까지 이르러 얻은 거라곤 돈 몇 푼과 이력도 되지 않을 단역 필모가 고작이었다. 다행히 배가 곪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 자리 걸음이었다. 오디션마다 낙방하는 이유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기껏 5년을 버텨 데뷔한 그룹이 망하기 직전, 왕이보에게 들어온 스폰을 거절한 게 타격이 컸다. 제가 거절한 스폰을 냉큼 문 멤버A는 어느새 탄탄한 입지를 가진 배우가 되어 있었다. 연말마다 멤버들끼리 모이곤 했지만 A는 더는 오지 않는다. 연말 시상식마다 A의 얼굴이 보였다. 보컬이었던 능력을 살려 무대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멤버들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만일 왕이보가 그때, 그 일을 받아들였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을 수 없으니까.
 
“가끔 후회하지 않아? 그때 거절한 거….”
 
질겅질겅 오징어를 씹던 멤버 B가 물었다. 기타와 작곡에 재능이 있던 그는 이제 막 빛을 보는 신인 작곡가이자 인디 그룹 리더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멤버 C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B와 C는 같은 그룹으로, C는 B가 이끄는 인디밴드의 보컬이었다. 두 사람은 단역과 보잘것없는 조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팀의 막내를 안쓰러워했다. 원하면 언제든 그룹으로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왕이보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메인댄서이자 메인래퍼였던 저는 밴드에서 맡을 역할이 없었다. 제안은 고마웠지만 B와 C가 애써 노력해서 일군 그룹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은 없었다.
 
“후회 안 해.”
 
연말 시상식이 한창인 TV에서 A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A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고,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건지 보컬이 많이 좋아졌지만 왕이보의 눈에는 목티로도 가려지지 않는 반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왕이보는 그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란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정의 빛이 스쳤다. 그에게 스폰을 제안했던 남자는, 멤버 A를 여기저기 굴려 제 잇속을 채웠다. 물론 A도 그만큼 받긴 했지만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버려가며 유지하는 자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화면 속 A는 행복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행복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화면 속의 A에게 왕이보가 물었다. A 너는 만족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춥고 어두웠다. 왕이보는 그게 제 지나온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도심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고요한 새벽이 내려앉는다. 멤버들과 헤어지고 돌아가는 늦은 시각, 낡은 패딩 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렸다, 평소 왕이보를 눈여겨보던 감독이었는데, 또 술에 취해서 전화한 모양이라 적당히 받아주다 끝내야지 싶어 밤공기에 차게 얼어붙은 손을 꺼냈다. 예상대로 잔뜩 취해있던 감독은 다짜고짜 오디션을 하나 권했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주인공의 각성을 돕는 캐릭터라고, 너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기에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회상씬에서만 나올 거라 전체 회차 중 나오는 회차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네 놈 이뻐해서 소스 흘리는 거야, 잘 도면 한 턱 쏘는 거 잊지 말라는 말엔, 그렇게 이뻐하면 드라마 조연이나 시켜주고 나서나 해야라는 말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내지 1분 나오면 많이 나오는 단역만 전전하던 제게 이런 제안이 어디냐면서 걷고 있을 때,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더 왔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주의였지만, 그날따라 술기운 탓인지 감독님의 제안에 들뜬 탓인지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 혹시 왕이보씨 되십니까?
 
낯선 번호만큼이나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왕이보는 이런 전화를 종종 받아본 적이 있다. 대개는 내가 너의 후원자가 되어줄 테니 몸을 팔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한 마디로 A와 똑같은 전철을 밟으란 소리였는데, 잡았으면 진작 잡았겠지, 혀를 차며 용건을 다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고 인형 취급을 하려 드는 노인네들은 많았다. 사회적으로 이룰 거 다 이룬 모양이라 자신을 파괴적으로 만들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듯 굴었다. 재수 없게도. 이번 전화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해 끊으려 했으나 오랜만에 주량을 초과한 음주 탓에 생각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자신을 X전자 인사팀 소속 D라고 밝힌 남자는 갖은 미사여구 없이 본론만 전했다. 본부장님이 당신을 뵙길 원한다는 말 이외에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왕이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후 입김을 불었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걸 본 왕이보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전했다. 지금은 술에 취했으니 나중에 전화를 달라고.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쩌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딱히 다음 기회를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한 번 거절 당하면 자존심이 상해 다신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끈질기게 연락을 시도했다. 몇 차례 더 거절했으나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왕이보는 제가 옳은 선택을 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차라리 오지 말고 거절할 걸 그랬나. 고민하는 사이 저보다 조금 늦게 샤오잔이 도착했다. 마주한 얼굴은 빈말로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남자가 절 왜 찾았는지 의아했는데, 그보다 더 의외인 건 남자의 제안이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준다는 조건에도 거절한 이유는 하나였다.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취향이었으니까. 필연적으로 감정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구질구질해지는 건 제 쪽일 터였다. 그런 건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제게도, 남자에게도 좋았다. 그러나 남자는 절박한 모양이었다. 색이 없는 세계가 어떤지 왕이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초면인 사람에게 매달릴 정도로 간절한 일이란 건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았다. 결국 왕이보는 아무 대가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A가 떠올랐다. 그와 제가 같은 선택일지는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둘의 관계는 주에 두 번씩 이루어졌다. 샤오잔이 워낙 바쁜 탓에 겨우 시간을 쪼개 만나는 수준이었다. 색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샤오잔은 제 손을 잡고 처음 보는 색들을 도무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잔뜩 세웠던 경계심도 차차 누그러지자 그와 나누는 스킨쉽이 불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킨쉽에도 거부감이 사라져 간단한 포옹 정도는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색이 하나, 둘 늘어나자 대가가 없을 거란 말과 다르게 샤오잔은 제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물론 왕이보는 받지 않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그는 연예인이면 응당 필요한 게 있을 거라면서 하나, 둘 품에 안겨주었다.
소속사가 없어 혼자 발품 팔며 돌아다니는 제게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한 사람을 붙여주더니 제작자들에게 돌릴 프로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미처 거절할 틈도 없었다. 물건이라면 반품이라도 하지, 그는 사람으로 붙여주니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단지 색을 찾아준다는 이유로 평소라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생겼다. 일을 계속하려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거저 단 것은 아닌지 처음과 다르게 언변이 화려했다. 이미 한 번 물러섰던 경험 때문인지 더는 물러서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짐작뿐이지만. 처음이야 부담스럽지, 적응되면 괜찮아질 테고, 제 손해는 아니었으므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왕이보의 손에 들려있는 대본이었다. 샤오잔이 가져온 여러 개의 대본 중에서 왕이보는 이미 친분이 있던 감독님께 사전에 들었던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대본 표지에는 별표 하나가 작게 그려져 있었다. 다른 대본의 표지엔 없던 표시였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별표가 그려진 대본을 고르면서 왕이보는 굴절이 심한 두꺼운 안경을 낀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샤오잔에게 말했다.
 
“이 영화로 할게요. 대신 오디션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그 말인즉 캐스팅에 관여하지 말라는 주제넘는 소리였지만 샤오잔은 그가 제가 고른 대본을 받아든 것만으로도 만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추천을 받은 배역이라면 어느 정도 희망은 있어 보였다.
 
 
 
 
 
샤오잔에게 왕이보를 만난다는 건 회사-집만 반복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띨까 호텔이나 사람이 적은 정소를 골라 만나다가 한 달여쯤이 지나고 자신이 누굴 만나든, 식사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집으로 불렀다. 본래도 집 밖을 잘 나가지 않고 은둔하는 타입이라 이쪽이 훨씬 편했다. 두 사람은 주로 식사한 뒤 시간을 정해두고 간단한 스킨쉽으로 샤오잔의 색을 찾아갔다. 시간은 길어봐야 30분 남짓, 그 시간이 지나면 왕이보는 짐을 챙겨 밖을 나서는 퍽 건조한 관계였다.
왕이보는 습관처럼 서재에 앉아있는 샤오잔을 힐끔였다. 일이 바쁘다더니 손잡을 시간도 없어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가 오늘따라 헝클어져 이마로 흘러내렸다. 항상 목 끝까지 채워진 셔츠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안경을 낀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이지적이기까지 했다. 왕이보는 아주 가끔 그 단추를 끌러 내리고 싶단 상상을 하곤 했다. 그가 찾은 색은 이제 겨우 5개 남짓이다. 가장 뚜렷하게 구분하는 건 흰색, 회색, 검은색이고 그다음으론 살색, 빨간색이었다. 다른 색들은 여전히 회색조로 보인다는 말에 왕이보는 흠, 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도가 영 나가질 않는 탓에. 사실 색을 찾는 아주 좋은 방법은 그와 섹스를 나누는 것이지만 6살이나 많은 연상은 틈을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호락호락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왕이보는 우습게도 이 퍽 건조하고 건전한 관계에서 이런 게 스폰이라면 진작 받을 걸 그랬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이게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건 알고 있다. 샤오잔은 보기보다 미적 기준이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코디를 붙인 게 사실은 감히 제가 버는 돈으로는 살 엄두도 나지 않는 옷이나 구두 따위를 입히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심미안이 높은 그는 왕이보의 옷차림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보는 항상 검은 티셔츠에 헐렁한 팬츠를 주로 입었는데, 항상 몸 선에 딱 떨어지는 맞춤 정장만 입는 그의 눈에는 유행에 뒤처지고 낡아 보이는 듯했다. 코디는 촬영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제게 옷을 건네는 왕이보에게 당사에서 되돌려 받지 않는 조건으로 가져온 거라 집으로 가져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연히 코디를 담당하는 여성의 통화를 듣게 된 왕이보는 이게 샤오잔의 지시였다는 걸 알게 됐다. 색을 찾는 속도는 더디기만 한데,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은근히 영역을 넓혀가며 교묘하게 선물을 건넸다.
당사자의 취향으로 범벅이 된 옷들이 비좁은 방에 쌓여갈수록 왕이보는 난처하게 이마를 긁적였다. 몇 가지를 빼놓고는 버리려 했더니 코디가 나중에도 입을 수 있다며 절대 안 된다고 해 결국 비좁은 집 절반이 옷장으로 도배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보다 못해 샤오잔에게 넌지시 거절 의사를 던졌더니 자신을 만날 때 입고 오라며 측은한 얼굴을 했다. 차마 또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 그대로 놔뒀던 의상들은 모 명품회사에서 여성을 타깃으로 생산한 것들이라 왕이보는 이내 잠시 그의 취향을 의심하기도 했다. 자신이 입고 온 의상을 보며, 샤오잔은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만 했을 뿐이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디에게 준 카드로 취향껏 사 입으라고까지 하니 왕이보는 하는 수 없이 그가 주는 대로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관계였다.
왕이보는 맞은편 소파에 다소 불퉁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서류에 결재하는 샤오잔에게 다가갔다. 제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든 샤오잔을 마주한 왕이보는 책상을 빙 돌아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샤오잔은 영문도 모른 채 왕이보의 손에 끌려 순식간에 거실 소파에 앉게 되었다. 왕이보는 샤오잔 대신 서재에 잔뜩 쌓아놓은 서류 더미를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두고 어리둥절하는 샤오잔의 옆에 앉아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행위였으나 샤오잔은 그저 왕이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숨을 삼켰다.
 
“이래서 언제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을 찾을 건데요? 당신은 일해요. 나는 나대로 대본 외워야 하니까. 이 자세로 있으면 신체접촉은 이뤄진 거니까 한 가지색이라도 찾을 수 있겠죠.”
“…”
 
샤오잔은 물끄러미 왕이보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그저 예상외였을 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샤오잔이 다시 서류에 집중하자 왕이보도 일에 열중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대본에 집중했다. 며칠 밤을 지새워 외운 대사도, 너덜너덜해진 대본도 사실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너덜너덜한 대본이 말해주듯 왕이보는 보란 듯이 오디션에 합격했다. 비록 조연에 불과했으나 처음으로 대사가 길고 비중 있는 배역에 캐스팅된 거라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는 건 맞았다.
왕이보는 문득 오디션을 왜 보냐고 묻던 게 떠올랐다. 인지도도 없는 배우가 입김으로 들어가면 다들 의심부터 한다고 답했다. 샤오잔은 제 입김을 불어 넣을 생각이었던 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매우 좋은 역할이었고 대중들이 왕이보라는 인물을 알리기엔 나쁘지 않은 역할이었다. 믿는 구석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자신이 지금 이렇게 바닥만 전전하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왕이보도 사실 알고 있었다. 샤오잔이라면 그의 몇 마디에 제가 그 대본의 주연도 꿰찰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건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들뿐더러 자신에게도 오디션에 당당하게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진심으로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하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왕이보는 금세 그 생각을 고쳤다. 샤오잔은 그에게 이런저런 빌미로 물품을 안겨주지만 저는 그런 것들보다 그의 시선이 제게 향했으면 했다. 색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그의 마음이 제게 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건 저는 아무것도 없는 일개 무명 연예인일 뿐이고 그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그룹의 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으니 그 끝은 뻔했다. 다행히도 샤오잔은 적당한 거리를 두었지만 그 선을 넘어도 딱히 말리는 이가 아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 중요한 배역 따냈다면서? 축하한다. 우리 막내가 드디어 빛을 보네.
왕이보는 간단한 안부 겸 축하 인사에 머쓱한 얼굴을 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면서 왕이보는 전에 없이 바빠졌다. 영화의 흐름상 중요한 역할이라 감독님과 작가님, 그리고 주인공의 아역배우와 호흡이 중요했으므로 항상 촬영장에 대기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왕이보는 그날 촬영분에 대한 대사를 외우고 디테일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세 흘렀다. 긴장으로 얼룩진 시간이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때는 동료로부터 전화가 올 때였다.
 
“뭐…. 운이 좋았지. 형은 앨범 준비 잘 돼가? 그동안 발표한 곡들이랑 신곡 더해서 정규앨범으로 내는 거라며.”
- 그냥 그렇지 뭐. 펀딩으로 진행되는 거라 앨범 실물 퀄리티는 보장 못 해도 음악 세션은 최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겠냐. 무사히 나오기만 하면 다행이지.
“뭘 걱정하고 그래. 노래 다 좋던데. 잘 되겠지.”
- 너는 어때?
 
첫 촬영을 마친 뒤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감독이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거란 말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멤버 B와의 통화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시시콜콜한 농담과 응원으로 끝났다. 리더였던 멤버B는 팀 막내의 불운이 내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통화를 마친 뒤 대기실로 돌아오니 곧 촬영이 들어간다는 말에 왕이보는 제 상태를 점검했다. 영화 촬영 순서는 낮과 밤에 맞춰 진행되었고 씬 넘버는 사정에 맞게 그때그때 바뀌었다. 어느덧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살수차가 동원되는 것을 보며 왕이보는 오늘 찍어야 할 장면을 머리에 새겼다.
살수차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어두운 골목을 달리는 장면이었다. 누군가를 쫓아가는 게 전부인, 심지어 대사도 없었다. 금세 끝날 줄 알았던 촬영은 몇 번이고 감독이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다시 찍었다. 계속 반복되는 장면에 아무리 체력이 좋은 왕이보라도 조금씩 지쳐갔다. 애써 티는 내지 않았지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이유나 알고 다시 찍자고 말하면 얼마나 좋아, 물을 먹어 무거워진 다리를 붙잡고 빠른 속도로 달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다. 지정된 위치까지 이르러 한참을 뛰어도 좀처럼 사인을 보내지 않던 감독은 그제야 OK 사인을 내렸다. 우산 아래서 화면을 돌려보던 감독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표정 연기도,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는데 일프로가 부족했다고. 근데 마지막에 그 일프로를 채웠다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할 때,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툭툭 어깨를 치던 감독은 촬영 종료를 알렸다.
뒤이어 찍을 장면까지 준비했던 왕이보로서는 매우 아쉬운 일정이었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이라 뭐라 더 말할 수는 없었다. 실력은 있지만 촬영이 들쭉날쭉 제멋대로라서 배우들이 힘들어한다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임시로 마련된 컨테이너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나온 왕이보는 현장에 남아 뒷정리를 하는 스탭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신인 때부터 가진 습관으로 매번 당황해하던 스탭들도 이젠 제법 익숙하게 받아주었다. 매니저를 따라 차에 타기 전, 왕이보는 익숙한 차량이 구석에 주차된 것을 발견했다. 샤오잔의 차량이었다. 왕이보가 다가가자 샤오잔이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거슬려 인상을 찌푸리자 샤오잔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왕이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촬영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와봤는데, 실례가 됐을까요?”
“아니요. 어차피 촬영 끝나서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라서요.”
“….”
 
왕이보는 매니저와 코디에게 먼저 돌아갈 것을 당부하고 다시 샤오잔에게 돌아왔다. 두 사람은 샤오잔의 차를 타고 왕이보가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왕이보는 살수차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아 씻고 오겠다며 욕실에 먼저 들어갔고, 샤오잔은 괜히 왔나 싶은 생각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왕이보가 지방으로 촬영을 내려간 바람에 기껏 되찾은 색이 희미해져서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이보가 씻는 내내 할 일이 없어 무심결에 틀었던 TV 화면 속에 지평선까지 심어진 꽃과 구름이 떠있는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무슨 색이었는지 알게 된 샤오잔은 회색으로 변한 하늘 위에 어렵지 않게 색을 덧씌웠다. 화면에는 샛노란 유채꽃밭이 적혀있었으나 샤오잔은 샛노랗다는 게 무슨 색인지 끝내 알지 못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샤오잔을 본 왕이보가 그의 시선을 따라 화면을 응시했다. 푸른색 하늘이 짙푸른색으로 변해간다. 화면 가득 채운 유채꽃은 그 색을 잃지 않고 외려 설치해 둔 조명 빛을 받아 낮에 보는 것보다도 훨씬 분위기가 있었다. 밤에 보는 유채꽃밭은 저도 처음이라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땐 엄마 손을 잡고 자주 찾던 곳이라 왕이보는 잊을 래야 잊을 수도 없는, 너무도 익숙한 장소였다.
 
“저기 꽃이 무슨 색인지 궁금해서요.”
“유채꽃이요?”
“네. 샛노랗다는데 저는 모르는 색이니까…”
“나중에 보러 가면 되죠.”
“…어딘지 알아요?”
“네. 신인 때 지역 방송국 예능프로그램 촬영 차 찾아갔던 곳이거든요. 사진도 있어요.”
 
제 고향이라는 말은 쏙 뺀 왕이보가 핸드폰에서 사진을 찾아 내밀었다. 그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어깨가 닿자 그토록 궁금했던 노란색이 무슨 색인지 떠올랐다. 그리고 되찾았던 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사진 속 왕이보의 모습이 총천연색으로 보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겹쳐지자 순식간에 방 안에 있는 모든 색이 돌아오는 듯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야에 들어오는 색을 눈에 담던 샤오잔은 개구지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이보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샛노란 물결을 배경으로 다소 색이 바랜 붉은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은 어린 티가 역력했다. 지금도 왕이보는 어렸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거친 느낌이 역력했다.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가요. 장담하건대 사진이나 영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울걸요.”
 
왕이보는 사실 그 풍경을 보고 그저 꽃밭이 넓다는 감상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샤오잔의 눈에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 가진 듯한 사람이 원하는 게 고작 색을 되찾는 일이라 왕이보는 그를 연민했다. 다 가져서 가지지 못한 하나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을 순 있겠다. 하지만 처음에도 그랬듯 샤오잔은 색만 되찾을 수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한 태도를 고수했다. 맹목적일 만큼. 그래서 왕이보는 그에게 처음으로 약속했다. 촬영이 끝나면 직접 보러 가자고.
샤오잔은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왕이보와 있으면 샤오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억지를 부려서 시작한 관계였지만, 왕이보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본인 역할을 잘해주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은 쏙 들어간 듯 담백하게 굴었다.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산전수전 다 겪은 여든 살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가끔 아니 자주 6살이나 어린 남자애처럼 굴기도 해서 가끔은 헷갈리기도 했다. 전날 야근한 채로 늦은 시간에 운전까지 하고 와서 벌게진 눈을 가려주는 지금처럼.
 
“나 보다도 더 피곤해 보이네…. 침대 넓으니까 여기서 자고 가요. 졸음운전 할 거 같아.”
“아…”
“싫어요? 그래도 자고 가요.”
 
왕이보는 샤오잔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주고 제 옆에 누워 객실 내부에 불을 꺼버렸다. 맞닿은 어깨가, 잡힌 손이 어색했다. 색을 잃어버린 사람이 색을 되찾으려면 어딘가 신체적인 접촉을 해야만 한다지만 이렇게 낯간지러운 상황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도 미련도 없어 보이는데 괜히 저만 신경 쓰이나 고민하는 게 억울할 정도였다.
샤오잔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체온이 높은 손이 잡고 있어 몸을 뒤척이는 게 어려웠다. 괜히 잠에 방해될까 봐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 왕이보 역시 잠이 든 건 아니었는지 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왜 안 자요. 누가 봐도 잠도 제대로 못 잔 사람이.”
“원래 잠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요. 걱정하지 말고 자요. 왕이보씨야 말로 피곤할 텐데.”
“흐음.”
“조금 더 있으면 진짜 잠 올걸요?”
“진짜로? 그럼 이건 어때요.”
 
왕이보가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누워있는 샤오잔을 덥석 끌어안았다. 졸지에 저보다 두 마디는 작은 남자의 품에 안긴 것도 당황스러운데, 더 당황스러운 건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인데도 오히려 싫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졸지에 왕이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셈이 되었지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포옹이 처음도 아닐 진데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밤이었다.
 
 
 
 
 
고층 빌딩이라 그런지 오전부터 햇빛이 들이치다 사무실 내부는 훈훈하다 못해 살짝 더웠다. 평소라면 자켓까지 꼼꼼히 여며 입었을 샤오잔이지만 오늘은 외투를 벗고 셔츠마저 살짝 걷어 올린 상태였다. 아무리 환절기라지만 한낮에 18도까지 치솟는 날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통유리창이라 햇빛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구조는 냉난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창 직원들이 올린 안건을 검토해 결재하던 샤오잔은 비서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곧 있을 회장님 팔순 잔치에 꼭 참석하셨으면 한다고 합니다.”
“아…. 외조부께서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나요? 그걸 왜 비서님에게 했지. 직접 연락하시면 될 걸. 날짜와 시간이 언제죠?”
“금주 토요일 저녁 7시입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금세 피곤함으로 물든 얼굴을 보자 비서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샤오잔은 기업가의 자녀치고 대내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편에 속했지만, 가족들과의 사이가 좋으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의 사촌 형제들이 워낙 지저분하게 노는 데다 샤오잔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외손자라 할아버지의 관심을 조금 더 받는다는 이유로 항상 견제받았으니 분명 가족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가 달가울 리 없을 테니.
이미 관계가 최악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초대된 파티는 껄끄러웠지만 달리 거절할 방도도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외조부의 팔순 행사인데 참석하지 않는다면 분명 모양이 이상하게 그려질 것이다. 그간은 출장이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피해 다녔지만 그럴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비서와 상의해 스케쥴을 조율하면서도 샤오잔은 가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샤오 회장 본인의 능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하나같이 다들 어딘가 모자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사이에서 혼자 바르게 자란 샤오잔은 단연 군계일학이었으니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게다가 사촌 형제들은 감각이 없거나 헤프거나 난잡하거나. 셋 중 하나거나 셋 다였다. 그들이 직접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과가 별로거나 말아먹기 일쑤라 주가가 연일 오르락내리락해서 회장은 명예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임에도 현역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오늘 하늘이 엄청 파랗게 떴길래 본부장님 생각 나서 보내요.]
 
비서가 다녀간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앉아있던 샤오잔은 제게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왕이보가 찍은 사진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나무가 빼곡하게 촘촘히 심어진 산, 그리고 초록색 물결로 뒤덮인 들판 위였다. 왕이보 덕분에 찾은 색으로 본 세상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속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브이를 그리고 있는 왕이보는 그저 예쁘다는 생각뿐이다. 콩깍지가 쓰인 것마냥.
 
[너무 예쁘네요.]
 
자연도, 당신도. 차마 쓰지 못한 여섯 글자는 전송되지 못한 채 지워졌지만, 샤오잔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무색하게 기분이 풀어졌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마저도 다 괜찮을 만큼.
 
오후 내내 회의며 업무에 시달린 샤오잔은 굳어진 목을 주무르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비서는 내일 스케쥴을 읊어주었다. 피곤에 절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티가 났는지 비서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비서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읊어 간신히 달랜 샤오잔은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곤함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르게 주차장에 들어선 샤오잔은 운전대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는 건 익숙한 일인데, 오늘따라 들어가기 싫었다. 부모님이랑 떨어져 산 지도 오래됐는데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이 샤오잔을 잠식할 때면, 그는 언제나 차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들어가기 싫어 차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을 때, 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에 빛이 번쩍였다.
 
[차에서 뭐 해요?]
 
왕이보의 메시지에 샤오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주차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기대어 서 있는 왕이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급하게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촬영을 마치고 온 건지 제법 짙은 화장이 남아있는 얼굴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촬영이 길어진다더니.”
“슬슬 색이 또 희미해질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언제 도착했어요? 왜 온다고 말하지 않고.”
“서프라이즈? 근데 차에서 왜 그러고 있었어요.”
“그냥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랬죠. 들어가요.”
 
왕이보는 샤오잔의 집을 올 때마다 깔끔함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생활감이 전혀 없는 느낌.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의 동선은 서재와 본인의 침실이 전부였다. 왕이보는 이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촬영지 멀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정비 시간 갖는다고 한 3일 정도 휴가 줘서요. 갈 곳은 마땅히 없고, 얼굴도 좀 보고 싶고.”
“내 얼굴을요?”
“그럼 달리 누가 있어요? ”
 
왕이보의 직구에 샤오잔이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였다. 떨떠름한 반응에 보기 싫었나 보네. 괜히 왔네. 중얼거리던 왕이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샤오잔이 다급하게 팔목을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뻗어나간 손을 어색하게 거둔 샤오잔은 그를 소파에 앉히며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조금, 당황해서요. 누가 날 보고 싶다고 한 적은 오랜만이라서...”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잘생겼잖아요.”
“...”
“아닌가?”
 
왕이보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샤오잔이 가져온 딸기를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새콤한 향이 꽤 나쁘지 않아 샤오잔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여전히 굳어있는 자세로 딸기를 받아먹는다. 왕이보와 있으면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누군가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은 적도. 누군가 제게 잘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부모님을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다.
 
“딸기 맛있죠”
“그렇네요.”
“직접 사다 놓은 건 아닌 거 같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 먹죠?”
“입맛이 별로 없어서.”
“거르지 마요. 그러다 쓰러지면 손해다? 아프면 내 손해야”
 
왕이보는 이제 제가 먹는 대신 샤오잔의 입에 넣어주는 게 훨씬 많았다. 생각 없이 받아먹다 보니 가끔 손가락과 입술이 스칠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샤오잔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색을 되찾겠다는 핑계로 왕이보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그랬다. 마지막에는 샤오잔이 얼굴을 뒤로 물리자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한 걸 감지한 왕이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이상한 생각했죠.”
“응?”
“아니에요?”
“아닐...걸요?”

 샤오잔이 머뭇거리며 빈 접시를 들고 일어서자 장난기가 발동한 왕이보가 뒤따라가며 계속 되물었다. 본부장님. 이상한 생각한 거 맞죠? 응? 이젠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오른 샤오잔이 접시를 개수구에 대충 담구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은 제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라 그 앞에 멈춰선 왕이보는 고개만 슬쩍 안으로 밀어 넣어 장난 그만할 테니 나와달라 애원했다.
 
“진짜죠?”
“속고만 사셨나.”
“….”
“진짜에요. 얼른. 얼른 끌어안고 있어야 색 찾는단 말이에요. 3일이나 주어졌는데 한가하게 있을 틈이 어디있어요?”
“….”
“세상에 다채로운 색이 얼마나 많은데. 얼른요.”
 
물론 장난을 안 친다는 왕이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샤오잔이 불신에 찬 얼굴로 다가온다. 이러나저러나 색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결국 어쩔 수 없이 왕이보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도 거부감이 들지 않은 것도 신기했다.
 
“장난치지 말고.”
“알겠어요. 장난 안 치고 그냥 안고만 있을게요.”
 
왕이보가 두 팔을 벌렸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품에 안겼다. 흐릿하게 보이던 색상이 점차 제 색을 찾아 뚜렷해질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끼곤 했다. 어깨를 두른 팔에 안정감을 느낀 샤오잔은 눈을 감았다.
 
 
 
 
 
[오늘 잘 다녀와요.]
 
차에서 내리기 싫어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비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왜 안 내리냐는 듯한 시선에 샤오잔은 속에서부터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이미 도착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들어가야 할 텐데 걸음이 무거웠다.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본부장님.”
“그래요. 이제 가야겠죠.”
“잘 다녀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8시까지 안 나오면 그냥 출발하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샤오잔은 맵시를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가족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샤오잔을 반기는 사람은 오로지 제 부모님뿐이다. 조용히 가서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께 간단하게 인사한 뒤 옆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묵묵히 견디는 동안 외조부가 도착했다.
식사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식사 자리에서 싱글벙글 웃는 건 아마 제 어머니인 샤오옌 밖에 없었다. 원래도 외조부와 격 없이 지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식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기업에 대한 현안이 흘러나왔다. 샤오잔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식사에 집중했다. 체할 것 같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샤오잔의 가족은 조용히 앉아있었으나 외삼촌과 숙모들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발언이 오갔다.
 
“음식이 맛있어? 나중에 우리끼리 또 올까?”
 
묵묵히 음식만 먹는 샤오잔에게 샤오린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어머니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인 샤오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를 닦았다. 물로 목을 축이고 식기를 내려놓자 외조부의 부름이 들렸다.
 
“샤오잔”
“네. 할아버님. 말씀하세요.”
 
가장 멀리 앉아있는 외손자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인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샤오잔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조부에게 다가갔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 흡족한 기색이 떠오르자 주위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피곤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견제받는 삶은 역시 달갑지 않다.
 
“그래. 잘 지냈느냐? 요새 성과가 좋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미숙하지만 좋게 봐주시는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올해 나이가 서른이지 않니?”
“네. 그렇습니다.”
“이제 슬슬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됐구나.”
 
어머, 멀리 앉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애 결혼하셨던 부모와 달리 정략혼이 될 가능성이 거론되자 몹시도 당황한 듯했다. 이는 샤오잔도 마찬가지라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외조부는 이미 이야기가 진행 중인 상대가 있는지 한번 만나보라며 사진 한 장을 건넸다. 그녀는 유력 국회의원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사진에 담긴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다웠으나 정작 샤오잔은 흥미가 없었다. 그 순간 사진만 보고도 색이 보였던 왕이보가 떠올랐다. 동시에 심장이 쿵쿵 뛰며 죄책감이 짙게 내려앉았다.
 
“할아버님 저는...”
“어머 아빠! 이런 건 나랑 먼저 상의했어야지. 내 아들의 결혼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나랑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나 몰래! 내가 아무리 어? 우리 남편이랑 같이 미술관에만 힘쓰고 있다지만 아빠 너무한 거 아니야?”
“네가 결혼하느냐?”
“그래도 그렇지. 일단 내가 먼저였어야지. 우리 아들일인데! 명색이 어미가 돼서 몰라서야 되겠냐고. 내가 응? 이 나이 먹고도 아빠한테 투정 부려야 해?”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를 어머니가 막아줬지만 외조부는 생각해보라는 말을 끝으로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체할 것 같다. 식사 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마무리되고 외조부를 배웅한 가족들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샤오잔의 가족만 남게 되자 샤오린과 그녀의 남편이자 샤오잔의 아버지인 리신도 괜찮으냐 물었다. 어떤 의미인지 순간 이해되지 않았지만 곧 애매하게 웃었다.
 
“너는 어때. 우리는 네가 원하면 밀어붙이지 않을 생각이야. 우리가 반대해줄게. 어차피 너희 외할아버지가 나 못 이기는 거 알잖아.”
 
어머니의 말에 샤오잔은 잠시 고민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안 한다고 하면, 안 할 수는 있어요?”
“안 하고 싶니? 그럼 안 해도 돼.”
“그래. 우린 네가 중요하지. 집안이 중요하진 않으니까.”
“그럼….”
 
안 하고 싶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지만 제 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단 듯 등을 두드린 채 헤어졌다.
 
 
 
 
 
멍한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뭘 해도 흥이 나질 않은 채로 하루하루가 흘렀다. 왕이보는 막바지 촬영으로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세상은 다시 회색으로 돌아갔다. 왕이보의 사진을 볼 때만 잠깐 색이 돌아왔다가 금세 흐려졌다. 부모님 선에서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던 약혼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금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아 위염이 도질 것 같았다.
왕이보의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혼란했다. 약혼과 왕이보. 두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색을 되찾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간절했지만 외조부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 제가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결국 들어주실 테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날 잡음이 상당히 곤란했다. 상대에 대한 것도 그렇고. 왕이보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약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린 채로 거실 소파에 누워있었다. 문득 그가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웠던 때가 떠올랐다. 대가 없이 색을 되찾게 해준다는 그의 모습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느냐던 모습도. 만일 제 약혼 소식이 들린다면 그의 반응이 어떨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긍정적이진 않겠지만, 그의 태도를 보았을 때 깔끔히 물러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이 내려앉은 내부는 적막했다. 샤오잔은 이리저리 휘둘리는 제 신세가 조금 처량 맞았다. 처음으로 생긴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약혼은 확실하게 거부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특정적이고 제 비서는 아닐 테니 남은 사람은 한 사람이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숨을 몰아쉰 채 서 있는 왕이보가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그는 숨을 한참을 몰아쉬더니 문을 비집고 현관에 들어섰다. 현관 센서에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던 그는 덥석 샤오잔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소문이 진짜에요? 본부장님 약혼해요?”
“예?”
 
어쩌다 그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그걸…. 중얼거리자 그게 중요한 거냐며 되려 묻는다. 센서가 작동하며 불이 켜졌다. 눈빛이 워낙 진해서 샤오잔은 말문이 막혔다. 외조부가 추진하는 일이지만 약혼할 마음은 없다고. 거절할 예정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럼 나는 어떻게 돼요?”
“그게...”
“와, 사람 가지고 노는 거에요? 나한테 막 색 찾아달라 해놓고 본부장님은 약혼?”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샤오잔은 일단 왕이보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를 거실로 데려와 앉히고 찬물을 건넸다. 불을 켜고 그의 왼편에 앉아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누가 말을 건넨 건지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 봐야 비서뿐인데 비서가 전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샤오잔을 참을 성 있게 기다리던 왕이보가 다급하게 물었다.
 
“진짜 약혼해요?”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소리가 들렸지.”
“방금 마음을 정했거든요. 그런데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외조부가 밀어붙이면 어쩔 수가 없어서.”
 
샤오잔이 희미하게 웃었다. 반쯤은 체념에 가까웠다. 왕이보는 그가 원하지 않음을 알고 반쯤은 충동에 가까운 말을 던졌다.
 
“그럼 우리 도망갈래요?”
“도망이요?”
“응. 도망. 내가 가진 게 없긴 한데, 그래도 앞으론 일이 좀 잘 풀릴 테니까. 자신은 없지만 내가 먹여 살릴게요. 싫어요?”
 
샤오잔은 난처하게 웃었다. 도망이라니, 게다가 이제 겨우 시작하는 사람이 하는 말 치곤 너무 당돌했다. 지금 당장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샤오잔이 망설이자 왕이보는 그에게 전에 가자고 했던 유채꽃을 보러 가자고 이끌었다. 잠시 고민하던 샤오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꽃이 필 시기는 아니지만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샤오잔은 비서에게 내일 하루 연차를 쓴다는 무책임한 메시지를 남기고 왕이보의 뒤를 따라나섰다.
운전은 제가 하겠다며 나선 그에게 번갈아 가며 운전하자고 제안했지만, 조수석에 앉아 눈이라도 붙이라는 말에 잠자코 따랐다. 왕이보는 운전 경험이 많지 않아 불안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무사히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샤오잔은 불안하던 것도 원래 살던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안정을 찾았다.
 
“근데 지금은 안 피었겠네. 가도 볼 게 없겠다.”
“괜찮아요. 그런데 그거 진심이에요? 나 먹여 살린다는 말.”
“뭐,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여 살리면 되지.”
“나는 놀고?”
“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지.”
 
 
하하. 낮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소리는 부모님 이외의 사람이 말하는 게 처음이었다. 늘 하라는 것만 있었지. 부모님의 품에서 자랐다고 한들 샤오잔은 외조부의 품에서 자란 시간도 꽤 길었다. 괜히 몽글몽글한 기분에 사로잡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단 잠 좀 자요. 어떻게 만날 때마다 눈가가 빨갛지?”
“그럴게요 그럼. 피곤하면 깨워요. 내가 운전할게.”
“그럴 일 없어요. 저는 누구랑 달리 체력이 좋거든요.”
“….”
“그러니까 얼른 자요.”
 
왕이보의 오른손이 뻗어 나와 샤오잔의 눈을 가렸다. 늦은 시각 고속도로를 비추던 가로등마저 사라진 시야는 어두컴컴했다. 오지 않던 잠이 불편한 좌석에도 불구하고 금세 밀려들어 수마에 빠져들었다.
곧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바람 소리와 섞여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도 꽤 먼 거리라 도착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일 것이다. 왕이보도 촬영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거라 피곤했지만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매니저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어 저도 모르게 달려온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왕이보는 조심스레 제게 색을 되찾고 싶다고 말하던 눈을 떠올렸다. 간절해 보이던 그 눈이 발목을 잡았다.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온 건 그가 좋아서였다. 티는 내지 않아도 색을 되찾아준다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신체접촉을 하고 싶을 만큼.
도로를 달리는 차는 드문드문 보였다. 짐을 싣고 달리는 트럭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을 피해 부드럽게 달리는 차량 한 대가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이제 곧, 그들이 가고자 하는 장소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주차된 챠랑 앞에 꽃대만 남은 꽃밭이 보였다. TV에서 봤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노란색은 없지만 초록색 꽃대가 곧 울망울망한 꽃망울을 맺어 피어낼 것이다. 하늘과 땅이 반으로 갈라진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왕이보는 곤히 잠이 든 샤오잔을 깨웠다. 다시 돌아가야 할 테니 지금 보지 않으면 늦을 터였다.
 
“샤오잔 일어나요.”
“아... 벌써 도착했어요?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봐요. 꽃은 피지 않았지만 당신이 가고 싶었던 곳이에요.”
왕이보의 말에 샤오잔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흐릿한 초점이 한데로 모이자 희미한 달빛 아래 초록빛 물결을 이루는 유채꽃밭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차 문을 열고 꽃밭 가까이 걸었다. 좁은 길을 따라 좌우로 펼쳐진 물결이 그가 보고 싶었던 노란 빛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조용히 뒤따라온 왕이보가 손을 잡아끌어 길의 중간에 있는 포토존으로 향했다. 작은 벤치 하나만 달랑 놓여있었지만 외려 자연을 방해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꽃이 피었으면 더 좋았을걸.”
“그러게요. 색도 조금 더 되찾았으면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였을 텐데.”
“아쉬워요?”
“응. 기껏 도망쳐서 왔는데 나는 못 보는 거잖아요.”
“그럼 나랑 다음에 또 와요. 내가 볼 수 있게 해줄게.”
 
말을 마친 왕이보는 잠시 머뭇거렸다. 샤오잔은 아마 노란색일 꽃망울을 봤지만 그저 무채색으로만 보였다. 그를 둘러싼 줄기와 잎은 초록색인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꽃이 필 때 같이 오면 또 볼 수 있을까. 아마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먼 미래에 꼭 이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꼭 같이, 다시 오자고 해야지. 샤오잔의 결심이 섰을 때 왕이보가 조심스럽게 샤오잔의 손을 잡았다.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준다고 했죠?”
“맞아요. 그랬죠….”
“그럼…. 원하는 거 지금 말해도 돼요?”
“지금?”
 
샤오잔이 놀란 눈으로 왕이보를 쳐다봤다. 소원을 말하기엔 너무 뜬금없는 장소가 아니던가. 제 손을 잡은 왕이보의 손이 조금씩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띄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샤오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지금. 들어줄 거에요?”
“제가 직접 약속한 건데, 한 입 가지고 두말하면 안 되지. 대체 뭐길래 그렇게 비장해요?”
“….이번 봄에도, 내년 봄에도, 내후년 봄에도, 오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어쩌면 계속 찾아올 봄에 나랑 이곳에 와요.”
 
말을 하면 할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가진 것도 없고 이제 겨우 그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주제에 가진 게 많은 그에게 매달리는 꼴이 조금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게 다 상관없을 만큼. 왕이보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 그거…, 나한테 프로포즈 하는 거에요?”
“반지도 뭣도 없어서 실망했어요…?”
“아니. 그걸 소원으로 쓰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요? 나한테 돈을 요구할 수도 있는 건데. 나 돈은 많거든요. 할아버지가 준 게 많아서.”
“돈이 뭐가 중요해요.”
“중요하던데.”
 
샤오잔이 놀리듯 말했다. 그러나 역시 소원을 이곳에 쓰기엔 너무 아까웠다. 왜냐하면….
 
“그래도 너무 아까워요. 나중에 다른 소원으로 써요.”
“….”
 
샤오잔의 말을 거절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왕이보의 표정이 조금 어두어진 듯했다. 달빛과 가로등에 그늘이 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그랬다.  
 
“왜냐하면 나는 왕이보씨가 소원으로 쓰지 않아도 당신하고 올 거니까. 내가 선심 썼어요. 소원 물려줄 테니까….”
“아니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냥 당신만 있으면 돼요. 내가 당신의 세상을 다채롭게 해줄 테니 내 곁에만 있어 줘요.”
“….”
“지금 대답 안 해줘도 돼요. 그냥…”
 
샤오잔은 물끄러미 왕이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무덤덤하거나 장난기가 넘쳤던 눈이 지금은 절박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샤오잔이 이런 눈을 했는데 지금은 왕이보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대답을 해줄까 말까 하던 샤오잔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걸었다. 당황한 왕이보가 다급하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걸어가던 샤오잔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초록 물결의 가운데까지 걸어간 샤오잔은 조용히 그를 마주 보았다.
긴장한 왕이보의 얼굴이 처음으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산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그래도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제가 원하는 바를 찾은 샤오잔은 왕이보의 얼굴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꽃잎에 내려앉은 나비마냥 살포시 내려앉은 듯 가벼웠지만, 그 의미만큼은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답을 전했다.
 
왕이보의 얼굴에, 샤오잔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괜히 멋쩍은 기분에 샤오잔이 시선을 돌리자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했던 들판에 맺힌 꽃망울이 더는 회색으로 보이지 않았다.
 
곧, 황금으로 물든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