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xwx_sx
여름아 멈춰줘!
헝디엔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더워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촬영장은 그늘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햇빛이 뒤덮은 탓에 새까만 우산은 필수였다. 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서 더위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더운 탓에 선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더운 바람만 탈탈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선풍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탓에 모두가 컷 소리만 나면 제일 먼저 선풍기를 찾아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스태프들의 손과 목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스타에게 건네줄 색색의 선풍기들이 가득했다.
겹겹이 입은 옷과 가발은 또 어땠는가. 움직일 때마다 풍성하고 우아해 보여야 하는 탓에 얇은 옷을 여러 벌 겹쳐 입은 탓에 통풍이 영 되지 않았다. 땀 때문에 끈적이는 몸에 그 얇은 천들이 이리저리 달라붙는 게 어찌나 거슬리던지. 처음에는 꾹 참았는데, 촬영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창피함도 잊고 짧은 반바지가 다 보일 정도로 옷을 들춰올린 채 촬영장을 활보했다. 하지만 제일 고역인 것은 가발이다. 분장하는 시간만 해도 상당하기 때문에 하루치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벗을 수가 없는 가발은, 무거울 정도로 긴 탓에 목과 등을 다 덮어 가뜩이나 더운 헝디엔의 뜨거운 열기를 전부 머금는다. 덕분에 더위에 취약한 몸은 툭하면 현기증에 비틀거리기 일쑤였고, 흐르는 땀 때문에 몇십 번이고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오잔은 좀처럼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힘들다는 투정 한번 부릴 법도 한데, 자신에게 온 기회에 되려 감사할 뿐, 투덜거리는 소리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걸러 높아지는 기온에, 완전히 지친 샤오잔은 그나마 평평한 돌아앉아 멍하니 땅바닥을 응시했다. 더위를 먹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꼴이라, 누군가 ‘샤오 선생, 힘들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러자 좀 힘들다고 하면 어떻다고, 샤오잔은 ‘좀 덥긴 한데, 여름이 원래 다 덥죠.’라고 답하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지워진 후 다시금 얼굴 위로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럴 만도 한 게 요란스러운 더위가 온몸에 기력을 전부 빼앗아 가서, 흐물흐물하게 두 눈이 풀리고, 입맛이 없어 살이 쭉쭉 빠져 볼이 움푹 파였으니 말이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보이지만, 샤오잔의 눈은 당장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호텔로 자신을 데려다 놔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런, 안쓰러워라. 스태프는 안타까운 듯 그런 샤오잔을 바라보다, 이내 어디론가 손짓했다. 그리곤 ‘어이, 남잠. 네 부인이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야.’라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또 부인이라고 부르시네. 이제는 이 호칭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샤오잔은 괜히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정작 호출 당한 왕이보는 딱히 부끄러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지, 성큼성큼 샤오잔을 향해 걸어왔다. 직전에 찍었던 신이 액션이다 보니 흐트러진 가발을 다시 정돈하던 스타일리스트도 덩달아 빗을 들고 부랴부랴 뒤쫓아왔다. 그리곤 샤오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많이 덥냐고 묻는 왕이보를 향해, ‘누가 남편 아니랄까 봐, 부인 덥다는 말에 한 걸음에 가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가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빗질을 시작했다. 드라마는 지기애로 포장을 했으나, 사실 원작 내용이 지기애보다 더 깊은 감정이라는 걸 이곳에 있는 모든 배우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니 샤오잔을 부인으로, 왕이보를 남편으로 부르는 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느새 당연시되어 있었다.
“더워?”
“좀.”
“얼음 물 좀 가져올까.”
“아니. 근데 좀 떨어져 봐. 너 오니까 더 더워.”
샤오잔은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서 굳이 그 작은 선풍기 바람을 같이 맞으려는 왕이보를 슬쩍 밀어냈다. 가뜩이나 더운데, 몸이 바짝 닿아있으니 너무 더웠다. 하지만 단단히 버티고 있는 탓에 밀어낸 보람도 하나 없이, 왕이보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엉덩이를 한번 들썩인 후 이미 틈도 없는데, 더욱 바짝 밀착했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마냥 흐물흐물한 샤오잔은 너무하다는 듯 왕이보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왕이보가 커다란 손을 뻗어 샤오잔의 목덜미를 슬그머니 움켜쥐었다. 언제는 내 손 시원하다며. 왕이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땀 때문에 뭐가 닿는 게 불쾌한 샤오잔은 또 시답지 않은 장난을 친다며 떼어내려다, 이내 말았다. 확실히 손이 시원하긴 했다. 얼마 안 지나서 제 목 열기에 똑같이 달아오른 손이겠지만.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이 시원함을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정도 지났을까. 이제는 똑같이 뜨거워진 손을 샤오잔을 미련 없이 밀어냈다.
“이제 더워. 치워.”
“와. 서운해, 샤오 선생. 어떻게 이렇게 차갑게 쳐내?”
“덥단 말이야. 그리고 진짜로 좀 떨어지면 안 돼?”
“좀 참아. 원래 부인 옆에 남편이 있는 법이야.”
자신만큼이나 만만치 않게 더위를 타면서. 왕이보는 껌딱지처럼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샤오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샤오펑요. 솔직히 말해. 너 나 괴롭히는 재미로 헝디엔 오지. 그래도 이번만 좀 봐줘. 지금 나 너무 덥단 말이야. 스태프들에게는 여름이 원래 더운 거니 괜찮다고 했던 것과 달리, 샤오잔은 왕이보에게 맘 놓고 칭얼거렸다. 이상하게 왕이보에게 이런 모습 보이는 게 편했다. 그건 샤오잔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많이 더우면 쿨팩 좀 줄까?”
“남은 게 있어?”
왕이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태프에게 부탁했다. 미리 챙겨두고 있었던 건지, 스태프는 촬영장 한곳에 두었던 보스턴백에서 쿨팩을 꺼내 왕이보에게 건넸다. 왕이보는 다소 과격하다시피 쿨팩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다 터지겠다. 샤오잔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왕이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몇 번 더 쿨팩을 내리치고는, 차가워지는 팩 온도를 확인한 후 샤오잔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아무리 사다 놔도 날이 워낙 덥다 보니, 금방 사라지는데. 어쩌다 네 건 남아 있었대. 샤오잔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눈을 감고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참 왕이보의 머리를 빗어내리던 스타일리스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왜겠어. 부인 더위 많이 탄다고 자기 안 쓰고 챙겨둔 거지.”
“…진짜야? 왕 선생?”
“뭐래. 그냥 오늘은 많이 필요가 없었어.”
게임을 하는지 핸드폰 화면을 연타하던 왕이보는 헛소리한다며 스타일리스트의 말을 일축했다. 필요가 없긴. 샤오잔이 촬영 들어간 동안 너무 더워 죽겠다며 난리 치던 게 아까다. 더우면 쿨팩을 가져다주겠다고 말해도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러려고 그랬으면서. 스타일리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왕이보의 말에 반박했다.
“웃기시네. 더워 죽겠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왕이보의 목이며 이마며 앉아만 있었는데도 땀이 흐르고 있다. 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자신 때문에 못 썼다고 하니 미안해진다.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6살이나 어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이 가끔씩 이렇게 속이 깊은 티를 팍팍 내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샤오잔은 목에 대고 있던 쿨팩을 슬그머니 왕이보의 목에 가져다 댔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래도. 왕이보는 괜히 쓸데없는 말 해서, 눈치 보지 않냐며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투덜거린다. 그러고는 정말 그런 거 아니니 편하게 쓰라며 다시 샤오잔에게 쿨팩을 돌려주었다. 이따가 촬영 들어갈 때 제대로 집중하려면 컨디션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이면서. 아무리 쥐여줘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결말이 뻔해서. 결국 샤오잔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쿨팩을 목덜미에 둘렀다.
“왕 선생,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은근 섬세해.”
“내가 한 섬세하지.”
“그러게. 여자친구 생기면 사랑받겠어.”
일등으로 질주하고 있던 왕이보의 캐릭터가 갑자기 벽으로 쾅 부딪쳤다. 뒤따르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캐릭터들이 그런 왕이보를 앞질렀다. 평소라면 불타는 승부욕을 감추지 못하고, 어떻게든 일등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다시 달렸을 텐데. 왕이보는 미련 없이 핸드폰을 내리고는 샤오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여름의 더위를 잠시 잊을 정도로 서늘한 얼굴이다. 뭔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왕이보의 기분이 상했다는 거다. 왜 저래. 샤오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왕이보를 바라보았다.
“나 여자친구 없어.”
왕이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하긴, 연애설에 조심해야 하는 연예인이다. 괜히 자신의 말을 곡해해서 들은 누군가가 기자에게 슬쩍 이상한 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하는 걸 잠시 잊었다. 샤오잔은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없는 거 알지. 그냥 나중에 생기면 말이야. 가정이지, 가정.”
하지만 옥으로 깎아놓은 듯 잘생긴 얼굴은 도무지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샤오잔은 황급히 분위기라도 풀려고 찡그린 왕이보의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이런 이야기는 조심해서 해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다행히 한결 기분이 풀렸는지, 구겨진 미간이 다시 반듯해진다. 샤오잔은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왕이보의 미간에서 손을 떼려는데, 순간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그러고는 힘주어 잡아당겼다. 덕분에 샤오잔의 몸이 왕이보의 코앞까지 쏟아졌다. 자칫 잘못하면 입술도 닿을 수도 있을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하지만 뿌리치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더위에 지쳐있었는데, 평상시에도 이기기 힘든 이 젊은 피의 힘은 넘쳐도 너무 넘쳤다. 결국 샤오잔은 몸에 힘을 빼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는 얼굴로 왕이보를 바라보았다.
“나 앞으로도 여자친구 없어.”
“그래, 알겠어. 왕 선생님 여자친구는 없어요. 됐지? 이제 좀 봐줘.”
“남편이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
“어휴…….”
“빨리 말해. ‘남망기’ 역할인 내가 여자친구가 있어야 해? 나는 남편인데?”
“…내가 잘못했어. 라오꽁. 라오포를 한 번만 용서해 줘.”
원하는 대답이었던 걸까.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손이 슬그머니 풀렸다. 서늘하던 기운도 순식간에 거두어진다.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 왕이보는 다시 게임을 플레이하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말했다가는 라오꽁이 라오포를 잡아먹겠다고 샤오잔은 중얼거리며 잡혀있던 손목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힐끔 본 왕이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많이 아팠어? 어린 맹수처럼 으르렁거릴 때는 언제고 혹시나 아팠을까 전전긍긍 눈치 보는 모습은 또 딱 귀여운 샤오펑요다. 샤오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쟤도 나처럼 만만치 않게 역할에 몰입하는구나.’ 생각하며, 왕이보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
이 바닥에서 하루 동안 데뷔하는 수보다 사라지는 수가 더 많다. 카메라와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사라져도 세상 또한 그대로고. 아무리 한 번이라도 더 카메라에 잡히고, 높은 사람들에게 눈에 띄기 위해 발악을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긴 하다. 이 바닥에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이들은 무수히도 많았고, 가공할 다이아몬드 또한 천지다. 서럽고 분해도 어쩔 수가 없다. 냉혹한 세계의 일원이 되는 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샤오잔은 일이 썩 잘 풀리는 편은 아니었다. 남들의 비해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이렇다 저렇다 내세울 수 있는 대표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돌로서 성공했다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이 바닥에서 인지도 없는 것보다, 애매하다는 게 더 나쁘다. 인지도가 없는 건 대중들에게 보일 기회가 적어 그럴 수 있지만, 애매하다는 것은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고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거라서. 씁쓸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 또한 곧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 않겠냐고 샤오잔은 판단했다. 게다가 이것저것 좋지 못한 일들이 겹치면서 샤오잔은 점점 이 바닥에서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괜히 하는 우울한 생각이 아니었다. 샤오잔은 누구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언젠가 잘되지 않겠냐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었지만, 점차 정면으로 현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만약 연예계에서 자신이 사라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계획도 했었다. 나름 디자이너로 괜찮은 커리어를 쌓았던 만큼 그쪽으로 다시 돌아갈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아볼지.
그러던 차에 만난 게 이 드라마다. 그것도 주연 자리로. 운이 좋았다. 자신을 좋게 본 캐스팅 디렉터가 오디션을 제안했고, 다행히 그들이 원하는 배역의 이미지와 잘 맞았던 탓에 함께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난 것이 왕이보였다. 그와 자신이 투톱으로 극을 이끈다는 설명을 들으며, 샤오잔과 왕이보는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때의 그는 굉장히 시니컬해 보였고, 소문대로 말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질문이 와야만 입을 열었고, 필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샤오잔은 자신이 그와 가까워지기 굉장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보다는 덜했으나, 샤오잔 또한 만만치 않게 말수가 적었다. 그나마 자신이 사회생활을 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명색에 브로맨스물을 찍는 사이치고 대화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는 지기애로 포장했으나, 원작은 남성 간의 로맨스다. 워낙 원작이 유명한 탓에 캐스팅 보도가 나가고 나서부터 대중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몰렸다. 유명한 원작은 양날의 검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느냐. 아니면 대중들의 외면을 받느냐. 이건 제작진들과 배우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샤오잔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잘 되지 못해 이 작품을 끝으로 더는 카메라 앞에 못 서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샤오잔은 대본 리딩 하는 날 왕이보에게 말했다. 우리 잘해보자고. 다행히 왕이보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날을 기점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던 것 같다. 어색하긴 해도, 먼저 말 거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왕이보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첫 만남과 달리 왕이보는 잘 웃기도 했고, 이것저것 제게 질문도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만났던 프로그램에 대한 말도 나왔다. 예전 아이돌 활동하던 시절 우연히 나간 프로그램에서 그는 MC 중 한 명이었고, 자신은 출연진이었다. 그때는 촬영을 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인연이 닿아 드라마에서 만나 몇 개월을 함께 하게 되다니. 인연이란 정말 신기했다.
왕이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꽁꽁 감춰놨던 장난기를 드러냈다. 가까워지면 한없이 자신을 오픈하는 타입인지,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왕이보가 남과 닿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데. 그 말의 신빙성이 의심될 정도로, 그는 이 무더운 여름에 껌딱지처럼 붙었다. 툭하면 소매로 엉덩이를 후려치기도 했다. 초딩도 아니고. 샤오잔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왕이보가 한 것처럼 똑같이 소매를 휘두르고 유치한 말장난을 던졌다. 샤오펑요와 함께 있으면서, 그 유치함이 물이라도 들어버린 것 같았다.
“무슨 생각 해?”
침대에 누워 첫 만남을 떠올리던 샤오잔은, 자신이랑 똑같은 바디워시 향을 폴폴 풍기며 나타난 왕이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친해지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누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인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툭하면 서로의 방에 놀러 가서 놀다가 잠이 든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늦게까지 촬영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샤오잔은 간단한 간식 하나 챙겨서 왕이보의 호텔방을 아무렇지 않게 방문했다. 그리곤 자신의 침대처럼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그걸 보고도 왕이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하게 옆자리에 앉았다. 자기 공간에 남을 절대 들이지 않을 것처럼 생겼는데. 사실 왕이보는 혼자 있는 걸 몹시도 싫어한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인 줄만 알았는데. 계속 지켜보면서 알아차린 건데, 왕이보는 외로움 많이 타는 아기 고양이 같은 녀석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
“아, 우리 샤오 선생 처음 만났을 때 대단했지. 나는 태어나서 샤오 선생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 처음 봤잖아.”
왕이보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또 시작이네. 샤오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시네. 나 봤을 때 한마디로 안 했으면서.”
“너무 예쁘니까 놀라서 그랬지. 샤오 선생 미모가 말문 막힐 정도로 뛰어나서.”
“또또, 까불지.”
“진짜인데. 그래서 형님들이 나 엄청 놀렸는데. 샤오 선생 보고 내가 멍 때리니까, 사랑에 빠진 소년이라고 맨날 볼 때마다 놀렸는걸.”
어디까지 진짜이고, 어디까지 가짜인지 모르겠다. 하도 진지한 얼굴로 장난을 잘 쳐서. 그러니 이럴 땐 같이 받아치면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나도 왕 선생 보고 놀랐잖아. 어떻게 저렇게 춤을 잘 추지. 어떻게 저렇게 얼굴이 작지.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지. 왕 선생 너무 쿨해서 멋있어.”
“웃기지 마.”
“왜 내 말은 안 믿어? 난 진심인데.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
샤오잔은 손을 뻗어 말랑말랑한 왕이보의 볼을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누가 봐도 장난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다. 아, 저리 치워. 말캉말캉 볼이 눌리는 와중에 왕이보는 샤오잔의 손을 쳐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손끝에 닿은 살이 꼭 인절미처럼 쫀득한 게 자꾸만 더 만지고 싶어져서, 샤오잔은 아예 작정하고 왕이보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왕이보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잘 걸렸다는 듯 양손을 잡아 채 단단히 결박했다.
“샤오 선생, 죽었어.”
살벌한 경고다. 6살이나 어린 녀석에게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샤오잔은 이리저리 버둥거렸다. 긴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미처 다리까지 잡지 못한 왕이보가 멈칫했고, 샤오잔은 그 틈을 타서 침대 가장 끝으로 도망쳤다.
“아, 항복. 항복. 진짜 이제 안 할게.”
“항복은 무슨.”
“쿨가이면서 항복을 왜 안 받아주는데?”
“얄미워서 싫어.”
그러고는 또 달려 들어서 그대로 엉덩이를 커다란 손으로 내리쳤다. 얼얼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손이다. 샤오잔은 고개를 돌아보며 허벅지 위에 올라타 또 다리 손바닥을 들어 올려 엉덩이를 때리는 왕이보를 노려보았다.
“그만 때려, 멍청아!”
“누가 먼저 했는데.”
“그러니까 항복한다니까!”
“안 봐줄 거야.”
“너 또 때리면 위챗 차단해 버릴 거야.”
금방이라도 다시 엉덩이를 내리칠 듯 번쩍 들어 올렸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비켜, 무거워 바보야.”
샤오잔은 제 허벅지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이보를 밀쳐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침대가 완전 엉망이 되어있다. 반쯤 다 흘러내린 이불부터 바닥을 뒹구는 베개까지. 샤오잔은 너랑 있으면 나까지 초딩이 되는 것 같다고 툴툴거리면서 떨어진 베개를 주워 다시 원래의 자리에 놓고, 이불을 바르게 폈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왕이보가, 샤오잔이 한쪽에 치워둔 간식을 집어 들자 옆에 다가와서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차단한다는 말을 해?”
“네가 날 괴롭히니까.”
“내가 언제.”
“와. 왕이보. 좀 착해질 수 없겠어?”
방금까지 네가 때린 엉덩이 아직도 얼얼하거든. 샤오잔은 정말 아직도 홧홧한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왕이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눈빛으로 엉덩이를 때릴 작정인 건지, 아주 집요한 시선이었다. 어쩐지 영 부담스러운 느낌이라, 샤오잔이 손을 뻗어 왕이보의 눈을 가렸다. 그만 봐. 닳아. 뿌리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왕이보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대신 위챗을 차단하겠다는 말이 그렇게도 걸렸는지, 왕이보는 단호하게 말했다.
“차단하지 마.”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어. 그니까 차단하지 마. 차단하면 깨물어 버릴 거야.”
진짜 샤오펑요도 아니고. 샤오잔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빨리. 대답해 줘.”
왕이보는 급한 사람처럼 대답을 종용했다. 흐음. 샤오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눈이 가려진 채 얌전히 제 대답을 기다리는 왕이보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누굴 놀리고, 안달 나게 하는 취미는 없었는데. 참 이상하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놀리고 싶어진다.
“봐서.”
“뭐어?”
“너 하는 거 봐서. 계속 착하게 굴면 안 할게.”
손을 떼고 말하니, 왕이보가 씨근덕거리는 표정이 너무 잘 보였다. 샤오잔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였나 보다. 이렇게 반응할 거라는 걸 알아서 놀리고 싶었나 보다. 샤오잔은 다시금 차단 안 하겠다고 빨리 말해달라고 달려드는 왕이보의 등을 토닥토닥거리면서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모두의 스케줄을 겨우 맞추고 맞춰서 찍는 단체신이었다. 극의 특성상 투톱으로 이끄는 드라마라 거의 모든 배우가 한 번에 다 모여서 찍는 신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몇몇 부분은 모두가 나와야 하는 신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촬영하는 장면 또한 그 신 중의 하나다.
원래라면 극의 후반대에나 나올 장면이지만, 수많은 배우들의 스케줄을 한 번에 통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들 쉽게 극에 몰입했다. 이미 앞에서 쌓아둔 서사는 충분했고, 극에 몰입에는 전혀 방해될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람 수가 많아지고 엑스트라가 많은 액션신을 찍다 보니, 끊고 가야 하는 부분도 늘어나고 준비하고 신경 쓸 부분도 많아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게다가 한 컷을 찍고 난 뒤, 타이트 샷부터 측면 샷까지 한 장면을 다양한 각도로 찍어야 해서 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금세 지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속이라 그늘이 많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그만큼 벌레가 많다는 거였고. 왕이보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얼굴 주변으로 날아드는 벌레는 내쫓으며 한국에서 쓰는 욕을 내뱉었다. 샤오잔은 키득거리면서,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왕이보가 욕한다며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그러자 왕이보는 조용히 하라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검으로 엉덩이를 툭 쳤다.
한참 이어지던 촬영이 잠시 중단됐다. 와이어 액션신을 앞두고 지친 출연자들이 점심 식사도 할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한창 다이어트 중인 샤오잔은 점심은 거른 채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충분히 괜찮은 사이즈라고 하나, 고장극 특성상 여러 겹 껴입다 보니 실제 체형보다 더 오버사이즈로 보이는 탓에 샤오잔은 조금 더 타이트하게 자신을 몰아세우기로 했다.
“오늘도 안 먹어?”
마르다 못해, 점점 볼우물이 푹 파이기 시작하는 샤오잔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왕이보는 물었다. 샤오잔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초록색으로 가득한 식단인데, 그것마저 줄이게 되는 극한의 사항에 한동안 내내 우울해 있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진 탓인지 별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왕이보는 그게 불만스러운지, 샤오잔의 말에 심기 불편한 티를 팍팍 냈다.
“이미 괜찮은데 왜 자꾸 굶는 거야. 나랑 훈툰 먹어.”
“안 먹을래.”
“아 왜. 같이 먹어.”
“아까 먹었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마. 너 안 먹었잖아. 훈툰 먹겠다고 해. 안 먹으면 깨물어 버릴 거야.”
왕이보는 정말이라도 당장 깨물 것처럼 마른 샤오잔의 팔을 붙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저번에는 실수로 얼굴을 가격했더니, 미안하면 훈툰을 두 그릇 먹어달라며 살살 달래서 기어이 먹게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안 먹으려고 하니까 방법을 바꿨나 보다. 아, 정말. 이 샤오펑요. 어떡하면 좋지? 샤오잔은 초등학생처럼 훈툰 같이 먹자고 말하는 왕이보를 애써 무시하며, 붙잡힌 손을 탈탈 털었다.
“살 그만 빼도 될 거 같은데, 라오꽁 외롭게 하지 말고 같이 먹어줘. 라오포 아니면 누가 라오꽁이랑 먹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흐트러진 머리랑 메이크업을 수정하면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러자 왕이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누구랑 먹어. 샤오잔은 어이없다는 듯 왕이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 없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랑 훠거 먹으러 간 것도 알고 있는데, 혼자 못 먹는 척은. 하지만 왕이보는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찰싹 붙어서 같이 먹어달라고 칭얼거렸다. 지치지도 않은지, 아주 한참 동안이나 그랬다. 그 사이 옆에서 슬쩍 거드는 스타일리스트부터, 아무렇지 않게 또 둘이 붙어 있냐고 한소리 하는 스태프들까지. 결국 샤오잔은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왕이보는 승리했다.
기어이 왕이보가 원하는 대로 훈툰 한 그릇까지 해치우고, 양치까지 하고 돌아오니 촬영이 다시 재개되었다. 와이드 액션을 해야 하는 왕이보는 몸에 장치를 착용했고, 샤오잔은 자신의 촬영 소품인 ‘수편’을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시금 대사를 숙지했다.
모두가 또다시 자신을 비난하는 장면.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 편으로 찍었던 장면과 달리 제 곁에는 한 사람이 남는다. 왕이보가 맡은 그 역할. 샤오잔은 장난스럽게 왕이보의 팔을 수편으로 툭 치면서 말했다.
“너는 여기서 날 보호해야 해. 알지?”
“생각해 볼게.”
“뭐어? 생각해 보겠다고? 이게 생각할 일이야?”
샤오잔은 왕이보의 대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으로 물었다. 극에 몰입할 때로 몰입한 샤오잔은 왕이보의 말에 진심으로 서운해진 탓이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극에서 함께 고난과 역경을 해치는 네가 그래서는 안 됐다. 정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샤오잔은 들고 있던 수편으로 왕이보의 가슴팍을 툭 쳤다. 힘은 담지 않았으나, 서운함은 한껏 담은 터치였다. 하지만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한 왕이보가 지금 날 친 거냐며 장난스럽게 달려들었다. 아니야, 이 바보야! 나는 장난칠 기분이 아니란 말이야. 샤오잔은 자신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고 벽으로 밀치는 왕이보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출연자들과 스태프들이 외쳤다. 그래, 마도를 배우는 이는 혼이 나봐야 해! 남잠, 그를 혼쭐 내줘! ‘위무선’이라는 인물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극 속의 한 장면처럼 모두가 장난을 쳤다. 하지만 샤오잔은 이 모든 게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서운해졌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반대편에 왕이보가 서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졌다. 그냥 무작정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속으로 몇 번으로 되묻고 또 되물었다. 썩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가 자꾸만 묻어 나왔다.
“…왕 선생, 정말로 나를 보호하지 않을 셈이야?”
“보호해야 해?”
“너는, 그래도 너는 해야지.”
“보호 안 할 건데.”
“와.”
슛이 들어가면 배역에 몰입해서 16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애지중지하기 바쁘면서, 촬영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인데 이렇게 사람이 다를 수가 있을까. 배역을 향했던 그 다정하고 뜨거운 애정이 묻어난 시선을 기억하는 샤오잔은 서운하다 못해, 왕이보가 너무 미워서 몸을 떨었다. 온 오프가 무작정 한결같으라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너는 나처럼 이 배역에 흠뻑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샤오잔은 자꾸만 장난이라지만, 자신의 반대편에 서려는 왕이보가 얄미워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 세게는 차지 못하고, 그냥 툭. 그러자 왕이보가 온갖 오버를 하면서 아프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날 발로 차?”
“저리 가. 미워 죽겠으니까.”
“화났어? 장난이야.”
“위챗 차단할 거야.”
샤오잔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스태프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아 정말로 위챗에서 왕이보를 차단했다. 그제야 왕이보는 샤오잔이 진심으로 서운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정말 장난이었다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엉겨 붙었다. 하지만 샤오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배신했으니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샤오 선생.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다급해진 왕이보는 온 힘을 다해서 샤오잔을 끌어안았다. 샤오잔은 이리저리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봤으나, 일부러 키 차이를 만들기 위해,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은 왕이보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샤오잔의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샤오잔은 정말 서운했고, 그날 촬영이 끝나지 전까지 차단을 풀어달라는 왕이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샤오잔의 마음을 풀게 하려면 한동안 왕이보는 꽤나 고생해야 할 것 같다고 둘의 투닥거림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촬영이 끝나고, 왕이보가 한껏 풀이 죽은 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호텔로 돌아가는 모습을 모두가 목격하게 되었다.
*
샤오 선생이 날 차단했어. 이제 나를 더는 예뻐하지 않는 거야.
웃긴다. 왕 선생. 너야말로 나를 더는 아끼지 않잖아.
샤오 선생이 내 전화도 무시했어.
무시한 적 없어. 거짓말하지 마, 왕 선생.
언제 다시 추가해줄 거야.
몰라. 너 하는 거 봐서 해줄 거야.
나 좀 예쁘게 봐줘.
와. 자꾸 불쌍한 척해. 오히려 날 속상하게 했으면서. 왕 선생은 나랑 밥도 같이 먹고 싶어 하지도 않아 했잖아. 들어봐. 내가 베이징에 다시 돌아가서 밥 같이 먹자고 말했는데, 그가 싫다고 말했어. 왕 선생은 내가 자길 예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가 날 예뻐하지 않는 거야.
와. 루머 퍼트리지 마. 난 샤오잔은 계속 예뻐하고 사랑하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이제 그만 찍어요. 왕 선생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해요.
빨리 위챗에 날 다시 추가한다고 말해.
알았어. 알았어.
지금 추가해. 빨리.
하아. 내 핸드폰 좀 주세요. 다시 추가 안 하면 왕 선생이 날 잡아먹겠어요.
*
더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다.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고, 촬영이 시작되면 조명까지 더해지니 꼭 온몸이 불판 위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익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촬영이 끝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녹초가 돼서 호텔로 돌아갔다. 특히 더위에 취약한 샤오잔은 촬영 내내 더위를 먹어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채 헐떡 거리기도 했고, 현기증이 나서 촬영 도중에 크게 휘청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찍고 있는 이 작품 말고도, 먼저 계약한 드라마 촬영과 같은 이런저런 스케줄이 늘어났다. 일거리가 늘어난 건 좋은 일이지만, 촬영 도중 잠시 붕 뜬 시간을 틈타 다른 촬영을 하러 가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더위 속에서 일을 하는 샤오잔의 체력은 당연히 남아나지 않았다. 그건 왕이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장난도 열심히 치던 왕이보 또한 더위에 지쳐버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녹아내린 슬라임처럼 축 늘어진 채 매니저의 손에 끌려 차에 올라타 스케줄을 하러 가거나 호텔로 향했다. 그나마 쉴 시간이라고는 촬영을 위한 분장 받는 시간뿐이다. 그러다 보니 분장을 받는 왕이보며, 샤오잔이며 초반과 달리 두 사람 모두 지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마냥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겠지만 모두가 함께하니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다. 더위야 어쩔 수가 없어도, 촬영 스태프들은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다른 배우들 또한 서로를 응원하고 조언을 해주는 등 배울 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상대 배우인 왕이보 덕에 샤오잔은 좋은 시너지를 많이 받았다. 6살이나 어린, 이제 막 성인이 됐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굉장히 성숙했다. 늘 제게 자신의 정신적 나이가 서른이라고 말하던 게 꽤나 믿음직한 이야기였다. 비록 장난도 많이 치고, 자신을 이리저리 휘두르긴 하지만. 그래도 왕이보는 꽤 많이 의지할 수 있는 배우였다.
그래서일까. 사적으로 왕이보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동안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긴 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정해놓은 영역 안에는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었는데 왕이보는 그 경계선에서 거슬리지 않게 잘 머무르다 어느 순간 자신이 눈치채기도 전에 쑥 들어왔다. 왕이보가 넘어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이미 밀어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샤오잔은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처럼 마음이 잘 맞는 동료를 만나서일까. 극에 몰입을 해서 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샤오잔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촬영이 잠시 멈추기만 하면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는 왕이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독하게도 더운 이 무더운 여름 속, 마치 탄산수 마냥 청량하고 싱그러운 젊음을 가진 왕이보는, 극중 본인이 맡은 배역의 외모처럼 옥으로 깎은 듯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예쁘다. 혹시 이 얼굴에 홀려 경계선이 뚫린 것도 몰랐던 걸까. 내가 얼빠였던가. 하긴, 왕이보 얼굴은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기도 했다. 그래. 어쩌면 이 얼굴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샤오잔은 자신의 생각에 수긍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선풍기를 얼굴에 가져다 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왕이보가 고개를 돌렸다. 왕이보의 얼굴을 몰래 관찰하며, 시답지 않은 의문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있던 샤오잔은 덕분에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왕이보 때문에 깜짝 놀란 탓이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너무 놀라는 샤오잔을 본 왕이보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마치 무슨 짓을 하려고 했냐는 듯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혼자 괜히 찔린 샤오잔은 이상한 표정으로 삐걱삐걱 왕이보의 시선을 피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덕분에 분명 누가 봐도 샤오잔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다. 하지만 왕이보는 의문을 품는 대신, 그냥 샤오잔의 어깨에 얼굴을 툭 기대었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고 선풍기 바람을 쐬기 시작했다.
쿵쿵쿵. 어찌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지. 심장 소리가 요란하다 못해 귀에 시끄럽게 들릴 정도다. 샤오잔은 혹시나 이 소리를 왕이보가 들을까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러면서 또다시 시답지 않은 새 의문을 품었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이유는 뭘까. 왕이보 너는 이 소리를 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이 의문을 왜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걸까. 왜. 왜.
*
뒤로 갈수록 무거워지는 내용이다 보니 촬영 초중반까지는 늘 웃고 장난치느라 촬영이 어렵지는 않았다. 컷 소리만 나면 너나 할 거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투닥거리기 바빴고 다른 배우와 촬영도 늘 좋았다. 환경적으로 덥고 힘든 부분들이 많긴 했지만, 비슷한 또래들과 모여있다 보니 서로와 더 끈끈해지고 빠르게 가까워졌다. 왕이보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초반에 서로 낯가린 게 무색하게 이제는 툭하면 서로를 놀리기 바빴고, 그 모습에 스태프들은 또 시작이라며 혀를 차기 일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촬영이 후반부로 갈수록 배역과 감정의 동기화는 점점 더욱 깊어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배역에 몰입도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몹시 높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나 더 심했다. 초반에는 그래도 컷 소리가 나면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컷 소리만 나면 달려들었던 게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샤오잔은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나섰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호텔방을 매일 같이 방문하던 것도 멈추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샤오잔 혼자 일방적으로 멈췄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왕이보도 자연스럽게 방문이 뜸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신 중 한 부분을 찍고 나니, 쏟아지는 눈물 멈추기가 너무 어려워서 샤오잔은 휴지를 꾹 쥐고서 한참을 훌쩍거렸다. 이 모든 게 작품의 일부분이고,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배역과 스스로를 분리시키지 못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큰일이었다. 누군가는 배역에 몰입하는 건 좋은 거라며, 그럴 수 있다고 다독이지만, 샤오잔은 이게 정말 큰 문제임을 시간이 지날수록 직감했다. 언젠가는 이 촬영의 끝이 찾아올 텐데. 이걸 벗어나기 위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지금도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데. 지기애로 포장한 드라마를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큰코다치고 말았다. 정말 스스로가 작품의 인물이 된 것처럼 같이 극을 이끄는 상대인 왕이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벙벙 뛰고, 그가 뒤돌아서면 괜히 아쉽고, 극에서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대립하는 관계를 찍게 되면 그날 하루 종일은 우울해진다. 몰입을 해도 너무 몰입한 탓이었다. 그래서 샤오잔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괜찮아?”
눈에 띄게 첫 촬영 때보다 더 마른 왕이보가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영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샤오잔이 걱정되는지,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샤오잔은 그 얼굴에 또 가슴이 벙벙 뛰는 걸 느꼈다. 샤오잔은 황급히 두 손으로 두 눈을 꾹 눌렀다. 이건 왕이보가 맡은 배역이, 자신이 맡은 배역을 걱정하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요즘 도통 배역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탓에 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진짜인 척하는 가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꾸만 의문은 늘어나고, 정답은 얻지 못한다. 샤오잔은 그게 너무 벅찼다.
“봐봐. 눈 얼마나 부었는지 봐줄게.”
그리고 제일 문제인 것은 왕이보의 태도다. 툭하면 자신을 찾고, 부르고, 말하고, 만지고. 그렇게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구는 왕이보는 지금 자신에게 너무 유해했다. 드라마를 찍을 때마다 점점 배역에 푹 빠진 자신 때문에, 왕이보의 행동 하나하나를 크게 확대해석하게 된다. 그저 왕이보는 상대 배우와 잘 지내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겠지만, 비의도적으로 왕이보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강에 돌을 던져 더 큰 파장을 만들게 만든다.
샤오잔은 왕이보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왕이보는 밀리고 싶지 않은 듯 힘주어 버텼지만, 재차 다시 밀어내는 샤오잔의 손에 마지못해 조금 떨어졌다. 그리곤 샤오잔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자신의 가슴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마치 왕이보는 자신이 왜 밀려나야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한 얼굴이다.
“…혼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
“걱정하지 마. 그냥 감정 주체가 안 돼서 그래.”
샤오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그래도 왕이보의 얼굴에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샤오잔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혼자 있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어릴 때부터 겁이 나면 일단 회피부터 하고 보는 이 못된 버릇은 고쳐지지 못하고 또다시 나와버렸다.
*
며칠 전 배역에 심취해 혼자 감정이 격해져 왕이보를 밀어낸 후, 뒤늦게 정신 차리고 보니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하나 샤오잔은 내내 걱정했었다. 왕이보 입장에서 생각하면 위로하러 왔더니, 자신 쪽에서 혼자 벽을 세운 황당한 일이니까. 그런데 걱정과 달리 다음 날 촬영장에서 왕이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대했다. 늘 그랬듯이 장난을 쳤고, 농담을 던졌으며, 자신이 하는 게임을 함께 하자고 권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6살이나 더 많은 자신이 성숙하게 굴지 못한 것이 창피해 촬영장에 오는 동안 내내 고민했는데. 왕이보는 아주 쉽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샤오잔도 다시 편하게 왕이보를 대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혼란이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니다. 여전히 샤오잔은 온 오프를 확실하게 하지 못했고, 촬영에 상관없이 왕이보를 볼 때마다 크게 변하는 감정에 여전히 적응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샤오잔은 무작정 왕이보에게 벽을 치는 대신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정리할 것도 없다. 그냥 이 이상한 혼란을 모른 척하면 된다. 이게 다 자신이 배역에 너무 몰입한 탓이니, 드라마 촬영이 끝이 나면 언젠가는 사라질 증상이다. 그리고 이것도 경험이 되어 다음 촬영에도 또 똑같은 현상이 생기면 이때를 떠올리며 의연하게 대처해나갈 것이다. 그러니 이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만, 왕이보를 향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면 된다고 샤오잔은 생각했다. 하지만 왕이보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툭하면 자신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는 촬영지에서 언제나 자신의 ‘라오꽁’이 되길 자처했고, 남들이 유난이라고 말해도 자신을 챙겼으며, 그가 맡은 배역 ‘남망기’가 할법한 말들을 평상시에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너희 집에서 금지되지 않은 게 뭐야?’
‘…너.’
샤오잔은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
알람이 이른 시간부터 울렸다. 침대 옆 테이블을 눈도 뜨지 않고 더듬거리던 샤오잔은 요란하게 난리 치는 핸드폰을 쥐고서 황급히 알람을 껐다. 그래도 알람이 울리면 한 번에 일어난 편이었는데. 요 며칠 스케줄이 너무 극한이었던 탓일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샤오잔은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꾸무적거리면서 반쯤 벗겨진 이불도 다시 뒤집어썼다. 아 그냥 다음에 하자고 할까. 순간 샤오잔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 이내 이불 속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이렇게 한번 미루면 다음에도 미루고, 또 다음도 미룰 것이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한번 하고 나면 다음이 쉽다는 걸 아는 샤오잔은, 뒤집어쓴 이불을 다시 내리고 머리에 까치집을 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샤오잔이 이른 시간부터 일찍 일어난 건 왕이보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며칠 전부터 어디서 들었는지, 왕이보는 폭포 근처 조깅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며 함께 하자고 졸랐다. 솔직히 말해, 꽤나 귀찮은 제안이었으나 샤오잔은 큰 고민 없이 수락했다. 얼마 전 그를 밀어냈던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모자를 쓰고 나오니,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지 왕이보가 핸드폰을 보며 서있었다. 얼굴 중 제일 먼저 코가 붓는다더니. 왕이보는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건지 코가 부어있었다. 입술도 평소보다 더 통통하게 올라와 있었고. 꼭 물만두처럼 귀여웠다. 그 와중에 피부는 또 너무 좋아서 꼭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하고, 잘생긴 건 그대로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촬영 때보다 더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식하고 가까이서 보니까 솜털도 뽀송하니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샤오잔은 그의 나이를 새삼 다시 상기했다. 맞다. 얘 이제 막 스물이었지. 자신도 어린 나이지만, 왕이보의 나이에 비할 바는 못된다. 6살 차이는 생각보다 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솜털 하나하나 관찰이라도 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왕이보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좀 몰래 볼 생각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너무 집요하게 바라보았나 보다.
“아니, 그건 아니고.”
“왜?”
“그냥. 잘생겼구나 싶어서.”
“…뭔. 그런 말을 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왕이보가 화악 달아오른 얼굴을 휙 돌리며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기다렸다는 듯 ‘샤오 선생 얼굴이 더 극락이지.’라며 제가 했던 말보다 더 낯 뜨거운 소리를 내뱉었을 텐데. 잠이 덜 깬 아침부터 칭찬을 받으니 민망한 듯싶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샤오잔은 왕이보의 손을 붙잡아 잘생겼다는 소리 들으니, 부끄러운 거냐며 키득거렸다.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손이 잡힌 채, 거의 터질 듯한 귀를 하고서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온몸으로 티를 내고 있었다는 걸 본인 또한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왕이보의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차 원래대로 하얀 피부로 돌아올 무렵.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앞으로 남은 촬영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그 사이 껴있는 스케줄에 관해서도 말했다. 촬영지가 아니라서 그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이보를 볼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 때문에 벅차하던 것이 무색하게, 숲길을 따라 걸으며 대화를 하는 동안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심장이 크게 요동치지도 않았고, 그냥 평소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역시 배역에 너무 몰입한 탓이구나. 불쑥 불쑥 튀어나오던 자신 게 아닌 것 같은 그 감정들이 정말로 진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던 마음 한구석이 편해진다. 그래서일까.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나누는 대화는 무수히도 많은 나무숲을 지나, 폭포 근처에 가서도 끊기지 않았다. 조깅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속도로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폭포에 도착했냐고 놀랐을 정도로 대화는 흥미진진했고, 또 즐거웠다.
“쟌거는 그런 적 있어? 같이 드라마 찍다가 상대한테 가슴 뛰어본 적.”
완전히 걸음을 멈춰 선 채 폭포를 바라보던 중, 왕이보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분명히 평화로웠다.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고, ‘동료’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순간까지 심장은 평소처럼 일정하게 잘 뛰었다. 그런데 왕이보가 던지는 이 질문에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시끄러울 정도로 심장은 뛰었고,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턱하니 숨이 막혔다. 그걸 느끼지 못한 왕이보는 마치 선수라도 치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난 있어.
꼭 찔리라고 하는 말처럼 왕이보가 자신이 하고 있던 고민과 똑같은 소리를 하자, 가뜩이나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은 이제는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더욱더 날뛰었다. 제 귀에는 심장소리가 폭포 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뭔지. 그냥 편한 동료로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너도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건지. 샤오잔은 왜 갑자기 사람 마음을 또다시 복잡하게 만드는 거냐고 왕이보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게 왕이보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왕이보의 말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실 나 너한테 가슴 뛰어본 적이 있다고 말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 입은 뭐로 막아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하는지.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어서 그런지, 머리가 정신이 없어 방법은 빠르게 떠올리진 못했다. 그 틈을 타 왕이보는 계속 말을 했다.
“처음에는 너무 작품에 몰입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그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거든.”
“…….”
“쟌거는?”
안 돼. 있다고 대답하지 마. 없다고 해. 나는 그런 적 한 번도 없다고. 너만 그런 거라고. 그리고 너 작품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거라고 빨리 충고해. 이성이 샤오잔을 재촉한다. 하지만 정작 샤오잔은 어금니를 꾹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시키는 것과 달리 입을 벌리는 순간 정작 나와야 하는 말은 안 나오고, 다른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도 모르고 왕이보는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줘, 샤오잔.”
“…….”
“너도 그랬어?”
왕이보는 점차 샤오잔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분명히 왕이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묻기만 했는데, 자꾸만 몰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주변은 뻥 뚫려 있고 아무것도 자신을 막고 있는 건 없는데 말이다. 그냥 왕이보의 질문 자체가 자신을 몰아세우는 기분이 들어서인 것 같다. 마치 그의 질문은 다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배역에 몰입해서라는 말로 방패 삼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샤오잔은 정말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졌고, 자신도 모르게 실제로 도망치고 말았다.
느릿하게 걸어왔던 길과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아니 도망치는 길은, 정말로 빨랐다.
*
왕이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그날 이후부터, 촬영장에 내내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결국 보다 못한 스태프 중 한 명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와 무슨 일이라고 있는 거야?’
혹시라도 자신의 질문이 무례하게 느껴질까 스태프는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공적인 자리에 사적인 일을 끌고 오는 건 프로 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 때문에 스태프들 모두가 불편해하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샤오잔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그 대답에도 스태프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완전히 거두어지지는 못했다. 이미 그들은 왕이보와 샤오잔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확신을 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두 사람이 촬영장에서 뭘 한 것은 아니었다. 인상을 쓰고 있다던가,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다던가 그런 적은 없었으니까. 촬영에도 늘 열심이었고, 그렇다고 서로를 피하거나 그렇지도 않았다. 촬영에 필요한 합도 곧잘 맞췄고, 대본 연습 또한 같이 했다. 다만 두 사람은 촬영 말고는 다른 말을 일절 주고받지 않았을 뿐이었다. 촬영에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말도 말이다.
나름 두 사람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생각과 달리 크랭크인 후부터 계속 지켜본 모두에게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 이상하게 보일 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만 마주치면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툭하면 꼭 붙어서 핸드폰도 같이 보며 장난치기 바빴으면서. 무려 삼일을 장난은커녕 일상적인 대화도 잘 나누지 않으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왕이보와 샤오잔은 촬영장에서 도통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쪽이 스케줄 때문에 없을 경우에는, 평소보다 텐션이 배는 낮아진 채로 있을 정도니. 샤오잔은 그제야 텅 빈 자신의 옆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봐왔듯이 늘 왕이보로 채워져 있던 옆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갑자기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너는 그래도 내 옆자리를 찾아와야지. 또다시 어른스럽지 못한 심술과 이기심이 크기를 키웠다.
정작 도망친 건 자신이면서.
왕이보가 다시 전처럼 말을 걸면 샤오잔 또한 다시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그날 아침 우리가 뭘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왕이보가 던진 질문 또한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다. 촬영하다가 상대에게 두근거려 본적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비록 왕이보는 촬영에 몰입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긴 했지만, 그건 착각이라고 제가 다시 말해줄 수도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우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샤오잔은 생각했다. 하지만 왕이보는 야속하게도 정말 촬영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의 식사를 신경 써주지도 않았고, 더위에 지친 자신을 위해 쿨팩을 빼놓지도 않았으며, 수시로 던지던 장난스러운 플러팅도 전부 하지 않았다. 같이 피할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그게 다 보여서. 샤오잔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에게는 인사를 하고, 제게는 인사도 없이 먼저 호텔로 떠나는 왕이보를 보며 서운함이 그득그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호텔로 돌아간 건 충동이었다. 내일 촬영 있다고 말하는 매니저의 말에도 고집스럽게 샤오잔은 맥주를 챙겼다. 취할 때까지 먹겠다는 건 아니었다. 혼자 먹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러니까 이건, 핑계였다. 왕이보의 호텔 방문을 두드릴 핑계.
“…웬일이야?”
언제는 맨날 자기 방에 와달라고 했으면서. 막 씻었는지 왕이보는 젖은 머리를 하고서 무심하게도 물었다. 또다시 서운함은 적립되고, 이런 기분을 자신만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해졌다. 그냥 내 방으로 가버릴까. 샤오잔은 아주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돌아가면 진짜로 더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 같아서. 샤오잔은 그냥 지르기로 결심했다.
“맥주 먹자고.”
“갑자기?”
“싫어? 싫으면 먹지 마. 나만 먹을게.”
그러니까 나 빨리 들여보내줘. 꼭 샤오잔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거 같다. 왕이보는 샤오잔이 들고 있는 봉투를 한번, 그리고 다시 샤오잔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이내 비켜섰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샤오잔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샤오잔에게서 봉투를 받아든 왕이보는 안주는 없고 맥주캔만 가득한 걸 보며 혀를 찼다. 맞다. 안주. 생각 없이 맥주만 담은 탓에 그건 또 잊어버렸다.
“뭐라도 사 올까?”
“아냐. 초콜릿이라도 먹자.”
맥주랑 초콜릿의 합이라.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샤오잔은 수긍하며 맥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오픈해 그대로 꼴깍꼴깍 들이켰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냅다 맥주부터 마시는 샤오잔의 모습에 왕이보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마셔? 샤오잔은 왕이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한 캔을 다 마신 후, 두 번째 캔도 집어 들었다.
“내일 촬영인 거 잊었어?”
“오후니까 괜찮아. 무리해서 먹을 생각도 아니고.”
“무리야. 술도 약하면서 무슨.”
“그렇게 약하진 않아.”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이렇게 냅다 술만 마실 생각으로 온 거 아니잖아.”
눈치도 빠르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듯 구는 왕이보의 태도에 그러면 너 왜 촬영장에서 내가 기다리는 거 알면서 왜 말을 안 걸었냐고 따지고 싶어진다. 근데 싸우러 온 건 아니니까. 모두가 촬영장에서 불편해하니까 우리 다시 예전처럼 지내자고 말하러 온 거니까. 샤오잔은 한번 꾹 참았다.
“넌 안 마실 거야?”
샤오잔은 맥주를 내밀면서 물었다. 왕이보는 말없이 맥주를 받아 만지작거렸다. 먹어도 될지, 안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샤오잔은 두 번째 캔을 비워냈다. 냉장고 안에 시원하게 들어있던 거지만, 오는 동안 더위에 미적지근해져 있어 썩 좋은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앞으로 나눌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반쯤 취한 게 좋을 것 같아 자꾸만 마시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이 끝났는지, 결국 왕이보도 캔을 따 샤오잔이 그랬듯 벌컥벌컥 마셨다. 유난히 툭 튀어나온 울대는 맥주가 넘어갈 때마다 요란스럽게도 움직였다.
시간이 갈수록 구겨진 맥주캔이 늘어났다. 분명 계획은 마시면서 대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긴장한 탓에 처음부터 냅다 들이킨 탓인지 대화를 하기도 전에 남은 맥주 캔보다 비어버린 맥주캔이 더 많아졌다. 왕이보 또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급하게 마시는 샤오잔 만큼이나, 왕이보도 무슨 물 마시듯 맥주를 마시는 탓에 결국 두 사람 다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굴부터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일 엄청 얼굴 붓겠다.”
한참 술 마시다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이제 와 얼굴 보고 말하기는 좀 민망해서 괜히 쥐고 있는 맥주캔이나 바라보면서 말하는데, 옆에서 왕이보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쟌거 음료 뺏어 먹어야겠네.”
왕이보가 말하는 음료는 자신이 부기 빼는 용으로 녹차랑 레몬 넣어서 만든 차인데, 마실 때마다 꼭 기다렸다는 듯 왕이보는 마치 제것인냥 뺏어 먹던 것이다. 하나 더 타준다고 해도 한사코 자신이 먹던 걸 뺏어 먹는 게 더 좋다고 말하면서. 샤오잔은 수편으로 얻어맞으면서도 맛있다고 달려들어 뺏어 먹던 왕이보의 모습을 떠올리며 같이 키득거렸다. 그리곤 선심 쓰듯 말했다. 그래, 너 줄게. 너 다 줄게. 왕이보는 좋다고 대답하며 또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나니 딱히 또 오가는 말은 없다. 미묘한 정적은 우리가 어색하다는 걸 너무 티 내는 것 같아 샤오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폭포 앞에서 미처 다 못 나눈 대화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그날, 내가 했던 말.”
그리고 그 고민을 날려버리듯 왕이보가 먼저 내질렀다.
“그거 나 괜히 한 말 아니야. 착각도 아니고.”
그것도 올라오는 것 같은 술기운도 도망갈 정도로 아주 직구로 던진다. 덕분에 정통으로 퍽 하고 맞은 가슴만 괜히 난리 났다.
“나 쟌거 보면 떨려. 쟌거 보면 설레고, 좋아. 같이 있으면 행복해. 내가 남망기라서가 아니야. 배역에 몰입해서 혼자 앞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난,”
“그리고 내가 그렇다는 거 사실 알고 있었잖아.”
피하기도 전에 또 직구다. 그리고 스트라이크로 또다시 맞고.
내가 알고 있었다고? 네가 나를 보면서 떨려 하는걸? 내가? 정말로? 샤오잔은 왕이보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아닌데. 나는 너 보면서 떨려 하는 날 외면하기도 바빴는데. 내가 네 마음 알면서 모르는 척했을 리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로, 은연중에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쟌거도 나 보면서 떨리는 거 알아.”
“나는…….”
“…….”
“난, 이게 아직도 헷갈려. 내가 너를 보는 건지. 네가 맡은 배역을 보는 건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기어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너와 같다는걸.
우리가 지금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사실은 우린 좋은 동료이자 친구고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너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왕이보 때문에 주절주절 인정하고 말았다. 나도 너한테 떨리고 있다고. 술기운을 빌려서.
“헷갈리면 키스해 볼래.”
“어?”
몰랐는데,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왕이보랑 눈이 마주친 채다. 분명히 일부러 안 보면서 말하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왕이보를 바라보게 되었나 보다. 그리고 왕이보는 맨정신에는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성큼 다가왔다. 생각은 왕이보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이상하게 손은 뜨거운 목덜미를 감았다.
“눈 감고 키스하면서 생각해 보면 돼. 내 눈앞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고 키스를 한 건지.”
“…….”
“쟌거가 떠올린 게 정답이야.”
정말 그게 정답일까. 이 키스로 나는 정답을 알 수 있을까.
샤오잔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맞닿은 입술을 가르고 젖은 혀가 침범했다. 그리고 술 냄새와 체향이 뒤엉킨 마음만 조급한 이 키스가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샤오잔은 알게 됐다. 나는, 네게 나를 묻히고 싶었구나. 그리고 네 유일한 오점이 될까 봐 나는 무서웠구나.
나는 너를…….
아이고 마감 절대 못해서 펑크내고 싸불 당하는 엔딩이 될까봐 넘 긴장했는데, 결국에는 해냈다는 것에 뿌듯합니다 하하 근데 문제는 글 쓰는 것 보다 후기 쓰는게 더 떨리네요 생각나는 게 그냥 마감 했다는 생각에 신나서 내가 해냄^.^ 이런 것 밖에 안 떠오르는데...다른 분들 멋있게 후기글 쓰셨겠죠? 하ㅠ
글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보자면 왕샤오 입덕하고 한번쯤은 꼭 써보고 싶었던게 리얼물이었어요. 근데 본체가 픽션보다 더 심하게 연애질해서 쉽사리 손이 가지 못했는데, 합작 덕에 써볼 수 있게 되었네요. 최대한 썸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라붐] Hwi Hwi 들으면서 썼는데, 썸처럼 보였는지 궁금하네요ㅠㅠ
키갈 한 이후 아마 두 사람에게는 여러 일이 있을 거예요. 겁이 많은 샤오잔이 일본으로 가기도 할 거고, 왕이보는 샤오잔이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걸 묵묵히 기다릴 수도, 아니면 노빠꾸로 돌격할수도 있고. 그건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결말은 우리가 모두 아는 그런 엔딩일테니까요.
우리 모두가 그리워 하는 그 해 여름날, 누구보다 뜨겁게 썸을 탔을 두사람을 상상하며. 모두들에게 그 해 여름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는 글이었길 바라요.
부족하지만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