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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nam_lian0905

Dear my savior,


지구에 첫 균열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5년 전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개최되었던 하계올림픽을 성황리에 마치고, 그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올림픽을 목적으로 방문했던 관광객들이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발생한 돌발상황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들뜬 축제 분위기였던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탈바꿈했다. 마치 뱀의 눈알처럼 길게 하늘을 찢으며 생겨난 균열은 등장만으로 사람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었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이 점점 틈이 벌어지더니, 이내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생김새의 괴생명체를 쏟아냈다. 대피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축제의 장소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른 의미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란이 절정으로 치닫던 그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인류가 각성했다. 마치 잘 짜인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미 죽어 나간 사람이 숱한 만큼 적절한 단어는 아닐지 모르나, 더 큰 피해를 막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폭발적인 파동이 도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평할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능력을 각성한 사람은 올림픽을 관람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도시를 찾았던 미국 국적의 10대 소년이었다. 예기치 못한 현상으로 인해 여행지에 발이 묶인 그는 어떻게 해서든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힘겹게 공항으로 향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어린 여동생이 공항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린 것이었다. 발이 빠른 그가 동생을 잡으러 뛰어나가던 그때였다. 텅 빈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생명체가 여동생의 발목을 낚아챘다. 등 뒤에서 겁에 질린 어머니의 비명이 울리고, 순간 눈앞이 핑 돌았으며 머리에 열이 확 오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물론 확실하진 않다는 말이 덧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직후에 도시 전체에 충격을 가할 정도로 엄청난 파동과 함께 능력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대미문의 능력을 갖춘 신인류가 탄생했다. 각성 파동 때문인지 꽤 큰 규모의 균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괴생명체 역시 순식간에 각성자의 손에 찢겨나갔다.
 
그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하루가 멀다고 전 세계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했고, 또 그만큼 많은 능력자가 각성했다.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해야 했고, 각성자들은 '에스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각성자, 그러니까 이제 에스퍼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들은 인류에게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던 탓이다.
 
균열이 발생하고 괴생명체의 위협을 받을 땐 에스퍼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때는 에스퍼를 오히려 위험분자 취급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에스퍼의 뇌파에 변화가 생기고, 능력을 한계치 이상으로 사용하게 되면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결국, 비각성자들은 에스퍼를 완전한 통제 아래에 두길 원하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을 통해 중앙 에스퍼 관리 기구가 출범하게 되었다.
 

✿

 
"샤오잔. 두통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아직 견딜 만해요."
 
하얀 실험복을 입은 센터 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샤오잔을 유심히 살폈다. 상태를 숨기려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한 모양이지만, 늘 그렇듯 큰 변화가 없는 샤오잔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요,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말해요. 가이드를 불러줄 테니까."
 
인심 쓰듯 말하는 연구원을 바라보는 샤오잔의 눈빛에는 전혀 따스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큰 눈이 반쯤 사르르 접히며 미소를 흉내 내자 연구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남의 미소를 이길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게 비록 시한폭탄처럼 여겨지는 에스퍼라 할지라도.
 
“가이드라….”
 
샤오잔은 가이딩 관리 센터에서 걸어 나오며 계속해서 가이드란 단어를 반복했다.
 
에스퍼는 가이드없이 살지 못한다. 비각성자들이 쉽게 떠들어대는 그 문장을 읊조려봤지만, 샤오잔은 딱히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통의 각성자는 저 문장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실제로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는 살기 힘드니까.
 
능력을 아무리 조절해가며 쓴다고 해도 한 번 변화된 뇌파는 자연적으로는 원상 복구되지 않기 때문에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가이딩이 꼭 필요했다. 그렇기에 상성이 맞는 매칭 가이드를 찾고자 하는 에스퍼의 집념은 감히 비각성자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샤오잔 역시 많이 봐왔다. 매칭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 그리고 그러한 에스퍼의 특성을 이용해 목숨줄을 틀어쥐고 흔드는 중앙 에스퍼 관리 기구, 통칭 CECO. 모든 에스퍼는 능력을 각성함과 동시에 등급을 부여받고, CECO의 소속이 된다. 그렇게 자유를 빼앗긴다. 혹시라도 폭주하여 민간인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명목하에.
 
샤오잔도 그들의 말에 일부분은 찬성했다. 에스퍼 중에 정상적인 뇌를 가진 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민간인에게 오히려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물론 이 민간인에는 가이드를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까지가 샤오잔의 의견이다.
 
아니,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비상식적인 집념과 집착을 생각한다면 가이드야말로 위험의 최전방에 노출되어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샤오잔은 보통의 에스퍼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두어 구분했다. 가이드를 향한 그들의 집착에 공감하지 못하는 탓이 컸다. 애초에 샤오잔은 얼굴과 이름조차 모르는 상대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스퍼는 가이드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명제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적절했다.
 
"하하, 내가 다른 에스퍼를 비웃을 게 아니었네."
 
샤오잔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웃었다. 발길이 가는 대로 생각 없이 걷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눈치껏 능력도 써가며 기껏 도망친 곳이 고작 여기라니. 그가 습관처럼 발을 놀려 도착한 곳은 조금 전까지도 그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가이딩 관리 센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난간 위로 올라가 걸터앉자 아래가 조금 더 잘 내려다보였다. 생동감이 넘쳤다. 왁자지껄 시끄럽고,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마치 작은 폭죽처럼 팡팡 터져댔다. 샤오잔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소리를 점차 잦아들고, 그저 형체 없는 온기만이 일렁일렁 퍼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저 수많은 사람 중에 자신의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자 샤오잔도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래서야 가이드에 집착하는 다른 에스퍼를 욕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얼굴도, 하물며 이름조차도 모르는 제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곳을 또 찾았다니.
 
 
 
샤오잔은 처음 이곳을 찾던 날을 떠올렸다. 에스퍼의 수명을 급격하게 깎아 먹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폭주 방지를 위해 약물에 의지해야 할 만큼 샤오잔은 그 어떤 가이드와도 상성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 그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난 것은 대략 반년 전. 샤오잔은 믿지 않았다. 센터가 저를 꼬여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가이딩을 받고 나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저만의 가이드를 찾은 게 분명하단 사실을.
 
가이딩은 가이드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긴 채 진행된다. 암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만으로도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 에스퍼의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게다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없도록 가이딩 스틱을 이용해 간접적인 가이딩만 허락된다. 그래서 샤오잔은 기껏 만난 제 가이드의 이름이나 얼굴, 성별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딩 스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받는 파동인데도, 따뜻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무형의 따스함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에스퍼들이 본인의 가이드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만 제 가이드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며 잠드는 날이 늘어났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가이딩이 끝난 후, 아직 샤오잔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연구원들이 경솔하게 입을 놀렸다.
 
"저 가이드 말이야, 집안도 꽤 좋은 것 같던데 왜 굳이 가이딩을 자청하고 나섰을까?"
"집안이 좋대?"
"응. 프로필 보니까 xx대학 다니던데? 거긴 성적만 가지고는 못 들어가잖아."
 
그 뒤로도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지만, 샤오잔의 관심을 끌어내진 못했다. 정황상 저들이 말하는 가이드는 아마도 본인의 가이드인 게 확실해 보였다. xx대학이라면 센터에서 거리가 꽤 있다. 그럼 그는 매번 저를 위해 그 먼 길을 오가는 걸까? 가이딩이 막 끝나 몽롱한 상태로도 괜히 미안한 마음에 샤오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연구원들의 대화 속에 등장한 그 학교를 찾았다. 샤오잔은 꽤 어린 나이에 에스퍼로 각성하여 바로 센터에 소속되어버린 탓에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캠퍼스가 이렇게 넓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 당연했다. 사람도 많았다.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감히 찾아내기란 어려워 보였다.
 
어차피 샤오잔은 가이드를 만나고자 온 것이 아니었기에 쉽게 걸음을 돌렸다. 다만, 그 뒤로도 가끔, 아주 가끔 허무함이 제 가슴 속을 채우기 시작할 때면 저도 모르게 이 학교를 찾게 되었다.
 
 
 
불과 두 달 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그때, 따스한 평화를 찢으며 한 남자가 벼락처럼 등장했다. 샤오잔은 요란스럽게 발을 구르는 소리를 조금 전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묵직한 소리로 보건대 상대가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있는 옥상이 목적지라는 것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몸을 숨기지 않은 것은 그 남자가 뿜어대는 기운이 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문을 쾅 열고 도착한 남자는 허리를 숙이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각성자도 아닌데 계단을 한참이나 뛰어 올라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자가 고개를 든 건, 샤오잔이 남자에게서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리려 할 때쯤이었다.
 
"미쳤어요?"
 
남자는 다짜고짜 샤오잔에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샤오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험한 말에 겁을 먹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 탓이었다.
 
저 남자가 확실했다. 내 가이드.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만나러 올 거면 좀 평범하게 오든가."
 
남자는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니 눈빛만큼은 감출 수 없을 만큼 따스했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자신의 에스퍼가 걱정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샤오잔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 누군가가 제 신체의 안위를 걱정해준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나와요? 연락처를 남기고 와도 연락 한 번 없더니, 다짜고짜 옥상에서 무슨 짓인데요?"
 
아마 그가 남겼던 연락처는 센터에서 가로챘을 것이다. 그들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그들의 감시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다. 에스퍼의 목줄을 확실하게 틀어쥐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알고 있는 자들의 선택다웠다.
 
"날 만나고 싶었어요? 왜?"
"왜긴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니까…, 걱정돼서 그랬죠."
 
가이드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게 결코 적대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가이드는 참 착하구나. 얼핏 보기에 싸늘해 보이는 얼굴과는 전혀 달리. 어쩌다 저런 아이가 가이드로 발현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혹시라도 센터에서 이 만남을 눈치채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왈칵 치솟았다. 센터에 최대한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주의하긴 했다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않은가.
 
다급하게 떠나려는 샤오잔을 붙잡은 건, 제 가이드의 손이었다. 하얗고 큰 손.
 
"이대로 가면 어떡해요? 번호 알려주고 가요."
 
퉁명한 목소리와 달리 귀 끝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홀린 듯이 연락처를 찍어주고 나니 샤오잔은 조금 후회가 됐다. 에스퍼와 깊게 엮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래도 마냥 웃으며 좋아하는 제 가이드를 보니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공감하지 못했던, 제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들의 마음이 단번에 이해됐다.
 
그 순간 어떠한 예감이 들었다. 아마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도 저 가이드를 놓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예감.
 

✿

 
샤오잔은 그 이후 줄곧 연락을 해대는 저의 어린 가이드, 왕이보 때문에 꽤 성가신 일상을 보내야만 했다. 각성 이후 누군가와 이렇게 일상을 공유해본 적이 없었던 탓에 굉장히 낯설고 어려워했지만, 그것이 절대로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제 가이드는 매번 묻지도 않은 일상을 조잘대느라 바빴다. 서늘하게 생긴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샤오잔은 확실히 서툴렀다. 연락을 채근해야만 답을 보내는 탓에 그가 서운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두 사람 사이의 연락은 한결 편해졌고, 쉬워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기 직전까지 자연스럽게 연락이 오갔다. 비록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가이딩실에서조차 눈을 가리고 그저 희미한 감각으로 그를 느끼는 게 전부여도, 샤오잔은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동안 균열이 새로 발생하는 일이 적었다. 기껏 발생하는 균열도 최대 등급이 E에서 F급 정도를 맴돈 탓에 샤오잔처럼 등급이 높은 에스퍼가 동원되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스퍼처럼 전천후로 이용하기 좋은 인재를 가만히 쉬게 놔둘 정부가 아니었다. 거의 하루걸러 하루, 대민지원에 동원되었다. 등급이 높은 에스퍼들은 본인들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냐고 불만을 가득 토해냈지만, 샤오잔은 늘 그런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는 쪽이었다.
 
말수가 적고 성실한 미남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시민 중 일부는 샤오잔의 팬클럽에 가입해 그의 대민지원을 열성적으로 쫓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샤오잔은 본인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다른 에스퍼들은 그런 샤오잔을 보며 더 질투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런 에스퍼들의 질투는 에스퍼의 감시 목적으로 함께 동원된 센터 직원들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다. 센터의 직원들은 샤오잔을 무척 싫어했다. 샤오잔으로서는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저 본인이 괴물인 탓이라고 여겼다. 센터 직원들은 샤오잔을 매번 괴물이라고 불렀다.
 
샤오잔처럼 각성 이후 지속해서 능력치가 상승하는 에스퍼는 지금껏 없었던 탓이었다. 처음 각성할 당시에도 S급 판정을 받았던 샤오잔은 급기야 1년 전부터는 등급 측정 불가 판정을 받았다. 현재 과학 기술로는 샤오잔의 능력치를 감히 측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센터 사람들은 샤오잔을 시한폭탄 취급했다. 높은 등급의 균열이 발생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현장에 샤오잔을 밀어 넣으면서도 고마운 줄을 몰랐다. 게다가 꽤 오랜 시간 매칭 가이드를 찾지 못한 탓에 샤오잔을 둘러싼 불안감이 커지기도 했다. 저렇게 능력을 펑펑 써대다 어느 순간 뻥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만연했다.
 
가이드를 통한 가이딩과 약물을 이용한 것에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한 후 요동치는 뇌파를 약물로 잠재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샤오잔은 가끔 컨트롤에 실패해 가이딩실을 박살 낸 적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저를 향한 공포와 혐오가 가득한 시선을 의연하게 마주하는 게 샤오잔에겐 절대 쉽지 않았다.
 
샤오잔의 능력을 가장 싫어하는 건 누구보다도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래서 샤오잔은 타인의 태도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각성한 이후 센터에 상주하면서 지속해서 폭언과 세뇌를 당해온 탓도 컸다. 저를 향하는 질투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 샤오잔에게는 더 크게 작용을 해왔다.
 
매번 감정 없는 병기처럼 다뤄지면서도 샤오잔은 늘 최선을 다했다.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수 있으니까, 조금 다치고 아프더라도 힘을 가진 자신이 앞장서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어렵게 만난 자신의 가이드, 이보를 만나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보는 늘 샤오잔을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처럼 여겼다. CECO의 직원들처럼 샤오잔을 위험 종자로 여기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샤오잔도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아플 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샤오잔은 에스퍼로의 발현 이후, 자신을 이렇게 애지중지 여겨주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제 가이드의 이런 극진한 보살핌을 몹시 어색해했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반복해야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것은 속이 잔뜩 상했음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불퉁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따져 대는 왕이보의 목소리에 샤오잔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저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잔뜩 화가 난 음성인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에 애정과 걱정이 가득해서 그저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도 버림받은 존재였다. 아마도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주 위험한 존재니까,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왔는데 고작 얼마 전에 알게 된 자신의 가이드가 그 모든 생각을 다 뒤집고 흔들기 시작했다.
 
가끔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걱정과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다가도 정말로 그가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지기도 했다. 이런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탓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요즘의 샤오잔은 그저 왕이보의 연락만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에스퍼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균열 진압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S급 균열이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균열 발생 위치가 도심 한복판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문제이기도 했다. S급 균열인 만큼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대거 동원되어야 하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이동이 여의치 않았다. 순간이동 능력 보유 에스퍼는 그 수가 극히 적어서 샤오잔을 포함한 고등급 에스퍼를 우선 선발하여 파견해야 했다.
 
사건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균열 진압 작전에 파견된 에스퍼들은 등급과 횟수에 따라 연금을 지급 받았다. 발생 빈도가 그리 높지 않은 S급 균열 진압에 파견되면 당연히 고액의 연금을 보장받았다. 에스퍼 자녀를 둔 고위직 인사들의 에스퍼 밀어 넣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현장에 파견될 수 없었을 C급 이하의 에스퍼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게다가 현장에 즉시 투입되어야 마땅한 A급 이상 에스퍼 보다도 먼저 도착한 이들이 많았다. 연금 욕심에 눈이 멀어 최소한의 자격도 안 되는 에스퍼들이 마구잡이로 현장으로 밀어 넣어졌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고등급 에스퍼들이 난색을 보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지원 없이 A급 이상만 싸우는 게 낫겠다는 소리마저 나왔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평소에 현장에서 별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샤오잔도 드물게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저런 낮은 등급의 에스퍼가 현장에 많을수록 고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저들은 좋은 전력보다는 오히려 지켜줘야 하는 존재에 가까운 탓이었다. 민간인과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을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고서 싸우라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에스퍼들과 함께 파견된 센터 직원들도 우려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불만을 토로할 시간에 한시라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샤오잔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에스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다행스럽게도 에스퍼들은 현장에서만큼은 샤오잔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편이었다. 샤오잔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빠른 상황판단과 전투력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등급이 높은 균열에서 파생되어 나온 괴생명체치고는 파괴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추가 투입을 기다리지 않고 현장에 있는 에스퍼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급하게 밀어 넣어졌던 에스퍼들이 돌발행동만 하지 않았더라면.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은 현장에 투입되는 일이 극히 드물어서 괴생명체를 직접 상대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고작해야 훈련에 사용되는 홀로그램 영상으로나 봤을까. 그런 그들이 S급 이상의 균열이 토해내는 괴생명체의 기에 눌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샤오잔을 비롯한 에스퍼들 역시 이미 예상한 바였다.
 
문제는 그들이 기본적인 균열 현장 투입 가이드라인까지 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했다. 에스퍼는 균열 현장에서 괴생명체가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향하지 않도록 활동 반경을 제한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다. 아무리 등급이 낮은 에스퍼라 할지라도 기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사항이기에 그것을 어기는 에스퍼가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겁을 먹은 몇 에스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도망가버리자 자극을 받은 괴생명체가 방향을 바꿔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전투 대형이 깨진 고등급 에스퍼들이 괴생명체를 쫓기 시작했으나, 미처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이 있어서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흥분한 에스퍼들이 도망을 치다 못해 마구잡이로 능력을 남발하면서 더 큰 소란이 일었다.
 
아무리 등급이 낮다고는 해도 에스퍼는 에스퍼다. 그들이 능력을 함부로, 그것도 민간인이 있는 구역에서 무분별하게 써대면 인명피해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고등급 에스퍼들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행동하기 시작했다. 절반은 괴생명체를 커버하고, 나머지 인원은 민간인을 대피시키기 위해 나섰다.
 
샤오잔은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는 덕분에 당연히 전자에 속했다.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싸움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게다가 샤오잔은 타인의 피해에 민감하게 굴었다. 제 앞에서 다른 사람이 다치고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다치고 마는 편을 택했다. 민간인과 도움이 되지 않는 에스퍼가 지천으로 깔린 지금, 샤오잔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평소라면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을 샤오잔도 꽤 심한 상처를 입었다. 피를 흘리고, 왼쪽 다리의 뼈가 부러진 듯했다.
 
물론 비각성자에 비해 외상 회복력이 빠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스퍼가 고통을 아예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다치면 아프고, 피를 많이 흘리면 눈앞이 핑 돌았다. 그래도 샤오잔은 견뎠다. 싸우고, 이기고, 사람들을 지키는 것만이 본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준다고 여겼기에.
 
이까짓 상처나 부상쯤은 별것 아니지 않으냐고, 어차피 조금만 참으면 다 나을 텐데 뭐 그렇게 몸을 사리느냐고…. 타인에게 들었던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샤오잔을 만들었다. 이젠 저에게도 자신의 고통에 아파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몸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말이 그에겐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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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땐, 엉엉 우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샤오잔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던 탓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현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흐릿했다. A급 에스퍼의 일격을 받은 괴생명체 하나가 민가를 향해 추락했다. 하필이면 그 궤적이 민간인이 모인 임시 대피소 방향이었다. 순간이동 능력은 없지만, 단시간 비행은 가능한 전천후 능력자인 샤오잔이 가장 먼저 내달리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괴생명체는 이미 속도가 상당하게 붙어서 금방이라도 대피소를 덮칠 것처럼 보였다. 샤오잔은 고민도 없이 제 온몸을 던져 괴생명체를 받아냈다. 몸이 으스러지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제 몸이야 어차피 부서져도 금방 회복할 테니 거리낄 것 없이 던질 수 있었다. 속도가 충분히 느려진 이후, 다른 에스퍼들이 다급하게 근처로 접근했다. 그걸 보고서야 샤오잔은 정신을 놓았다.
 
능력을 제법 많이 썼으니 아마 가이딩이 필요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이 울음소리의 주인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내 가이드, 이보. 평소의 따뜻하고 부드럽던 파장과는 전혀 다른 파장이 샤오잔의 몸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것 같은 파장이 조금 서글프기까지 했다.
 
울고 있는 제 가이드를 달래주고 싶어서 샤오잔은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다고, 그런데 죽지 않았으니 된 것 아니냐고 실없이 웃으며 이보를 달랬다. 그 말에 그가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가버릴 줄은 몰랐다.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샤오잔은 혼자 남겨진 병실 안에서 똑같은 후회를 백번 넘게 반복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 빠져 하염없이 가라앉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밥부터 먹어요.”
“아, 나는….”
“안 먹겠다고 말할 거라면 차라리 대답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 아직 화 안 풀렸으니까.”
 
단호한 말에 샤오잔이 입을 다물었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어떻게 제 속을 꿰뚫어 보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왕이보는 아직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뜨끈한 식사를 뚝딱 차려냈다. 바깥에 나갔던 건 이걸 사오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은 샤오잔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샤오잔은 아주 느리지만,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혼자보다는 둘이 함께 먹고 싶었지만, 아직도 차게 얼어붙은 왕이보의 얼굴이 낯설어서 말 한마디 꺼내보지 못했다. 식사를 다 마친 이후에도 왕이보는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가이딩이 필요한 몸 상태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샤오잔으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말에 왕이보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보였다.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심정지가 두 번이나 있었어요. 호흡은 너무 약하고, 체온은 자꾸 떨어져만 갔어요. 당신, 더는 삶에 의지가 없는 사람 같았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샤오잔은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절박하게 말하는 제 가이드의 말을 도저히 끊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는 그런 무서운 기다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이랑 아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갈 거니까. 당신도 절대로 당신을 쉽게 놔버리지 마.”
 
가이드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무겁게 선고되었다. 약간의 웃음기도 없는 단어 하나하나가 샤오잔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아주 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처음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부상을 다 회복한 이후에는 에스퍼 전용 숙소에 돌아가야 했다. 병원에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왕이보를 만날 수 없어진 샤오잔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전처럼 몰래 연락을 주고받긴 했다. 하지만 이미 그와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알아버렸다. 고작 연락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워졌단 뜻이다.
 
게다가 요즘 샤오잔은 그의 가이드와 연락할 때면 심장 부근이 몹시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어졌다. 제 상태를 살핀 의사와 연구원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런 증상은 처음인지라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 가이드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고, 돌아온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되묻기도 했다. 영상통화를 하는 탓에 그의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그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크게 웃어댔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데도 진지하게 들어주기는커녕 신이 나서 웃는 꼴이 보기 싫어져서 샤오잔은 충동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기분 나빠진 이보가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물이 엎질러진 후였다. 다시 전화가 걸려올까 봐 핸드폰을 꼭 쥔 채 내려놓지도 못했다. 하지만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메시지를 하나 받기는 했다.
 
'우리 만나요. 전화로는 너무 부족해요.'
 
샤오잔은 피식 웃었다. 저만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줄 알았는데, 상대가 먼저 이렇게 말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왕이보는 센터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비밀리에 만날 계획까지 꼼꼼하게 작성해 보내왔다.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샤오잔 역시 알았다고 답했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괜히 떨려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해, 이건 정말 이상해…. 샤오잔은 계속해서 되뇌었다. 이건 역시 정상적이지 않은 감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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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한 규모의 유리온실을 앞에 두고 샤오잔은 조금 놀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균열이 지구를 공격하게 된 이후, 인류는 이런 큰 규모의 건축물을 새로 짓지 않게 되었다. 건축에 많은 돈을 들여봤자, 균열이 생기고 괴생명체에 습격이라도 당하게 되면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아야 하는 탓이었다. 물론 주로 시외의 균열 진압에 자주 동원되었던 샤오잔은 수도권 도심의 상황에는 어두운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큰 규모의 건축물이 새로 생겼다는 것도 모를 정도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내부에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가 그를 반기는 듯했다. 이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유리온실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샤오잔은 과연 이런 곳이라면 누군가 저를 찾아 따라오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헤매고서야 샤오잔은 그를 찾아냈다. 꽃에 정신이 팔려있던 가이드는 제 에스퍼를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고, 샤오잔 역시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눈앞에는 노란 꽃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다른 식물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이곳만큼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황홀한 풍경이었다.
 
샤오잔은 멀지 않은 과거에 대화의 주제로 삼았던 유채꽃밭을 떠올렸다. 나중에 에스퍼 생활을 정리한 이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바로 그 유채꽃밭 말이다. 왕이보는 그렇게 말하는 샤오잔과 눈을 맞추며 굳이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고 다정하게 말했었다. 샤오잔은 그 말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에스퍼는 CECO의 허가 없이는 도시의 경계조차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만간 보러 가자던 말도 그저 가볍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만발한 노란 꽃밭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유리온실 어때요? 당신을 위해 지은 건데.”
 
이어지는 뜻 모를 소리에 샤오잔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고작 2년 전에 가이드로 발현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사랑하는 막내의 발현을 숨기고자 하셨죠. 위험하게 살게 둘 수는 없다면서요. 나도 그런 부모님의 애정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어요. 당신을 보기 전까지는.”
 
그의 가이드에게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아마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가이드라는 걸 밝혔어요. 당신 곁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서. 그런데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너무 높았어요. 가끔은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지만, 샤오잔 당신이 날 먼저 찾아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선물로 주고 싶었어요.”
 
그 뒤로는 샤오잔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이어졌다. 수많은 과학자를 동원해 만들어냈다는 이 유리온실은 CECO의 감시하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임시방편일 뿐일 테니, 당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곧 선물해주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샤오잔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나는 그냥 네가 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자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위험한 짓은 하지 마.”
 
그 말을 들은 왕이보는 순식간에 달려와 샤오잔을 끌어안았다.
 
"당신도 날 좋아하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러고는 가슴 벅차다는 듯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샤오잔의 머리가 멈춰버렸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의아한 듯 묻자, 샤오잔의 어린 가이드는 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여전히 비웃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샤오잔의 기분 역시 상하지 않았다. 그저 이 대화의 흐름이 조금 의아할 뿐이었다.
 
"날 떠올리면 심장이 막 간지럽다면서요. 내 연락이 뜸하면 궁금하고 걱정되고, 게다가 보고 싶기까지 했다며."
 
샤오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가이드가 하는 말이 다 맞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뭐 어쨌다고? 그것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나를 만나러 나올 생각을 하면서 무슨 기분을 느꼈어요?"
"……."
 
기분을 딱히 떠올려본 적이 없던 탓에 샤오잔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심장이 막 쿵쿵 뛰었죠? 약속 시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시계를 수십 번쯤 확인했을 테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샤오잔은 내심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건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 중 일부…."
"그래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럼 한 번 상상해봐요. 내게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샤오잔은 굳이 그런 상상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제 가이드가 말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 싶어서 그의 말을 굳이 끊지 않았다.
 
"계속 당신의 가이드로 지내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당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긴 거죠. 당신을 바라보던 눈빛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거고, 나에게 소중한 시간은 모두 그 사람의 차지가 되겠죠. 물론, 나는 약속한 것처럼 당신의 가이드로서는 최선을 다할 테지만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어요?"
 
순간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유리로 지어진 커다란 온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고작 상상일 뿐인데도 어찌나 화가 났는지, 능력을 제어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깜짝 놀랄 법도 한데, 샤오잔의 어린 가이드, 왕이보는 그저 발그레 물든 광대가 봉긋 솟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
 
"거봐요. 당신도 날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샤오잔도 이제는 제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졌다. 앞으로의 일은 잠시 미뤄두고, 그저 제 가이드를 따라 활짝 웃었다. 저를 품에 안은, 그리고 제 품에 안긴 체온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샤오잔을 충만하게 채웠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수난과 역경이 이 구원자를 만나기 위함이었다면, 그리고 이 사람의 손을 잡은 대가로 앞으로 남은 길 역시 순탄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샤오잔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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