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jung_0
Dream with you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잔잔히 흘러가는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노란 꽃밭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그는 누군가의 부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마주치는 눈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상대는 노란 유채꽃을 헤치며 그에게 다가왔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윽고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저 멀리서부터 그들이 있는 공간이 부서지며 흰빛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음을 직감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균열이 그들을 발밑부터 깨트렸다.
[안녕]
입 모양으로 전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들의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며 흰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 ❀
[We are make to love-]
“으음-”
침대 위의 이불 뭉치가 움찔거리더니 손만 빠져나와 핸드폰을 잡아챘다. 익숙하게 알람을 끈 샤오잔이 잠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웅크려져 있던 몸이 길게 펴지며 침대를 길게 채웠다.
“하암-”
크게 하품한 샤오잔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그 꿈을 꿨다.
몇 번째였지? 그 유채 꽃밭을 본 게?
꽤 오래전부터 샤오잔은 꿈길을 따라 유채 꽃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유채꽃 사이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처음에는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었다. 몇 번의 꿈이 더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노란 꽃밭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더 많은 밤을 지나, 꿈속의 ‘그’를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꿈에서 깼을 때 기억하는 것들도 늘어났다. 꿈속의 ‘그’는 샤오잔을 ‘쟌거’라고 부른다. 그는 바이크를 탔고, 레고와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 무서운 영화와 어두운 것을 싫어해서 밤에는 희미한 등을 켜 놓고 잔다고 했다. 그러나 꿈에서는 분명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름을 불렀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뿌옇게 안개가 낀 듯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각난 꿈속에서 겨우 건져낸 작은 기억을 모아 꿈속의 ‘그’를 상상하고 있자면 샤오잔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샤오잔의 꿈을 찾아오는 것일까, 샤오잔이 그의 꿈에 찾아가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생각 속에서 알람이 한 번 더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샤오잔이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고민은 고민이고 출근은 출근이다. 몸을 일으킨 샤오잔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
“샤오잔, 저우판이 어제 퇴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네.”
출근해 책상에 앉기 무섭게 다가온 팀장이 전하는 동료의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샤오잔의 눈이 커졌다.
“교통사고? 저우판은 괜찮아요?”
“오른팔 부러진 거 말고는 괜찮다고 하는데, 상태는 좀 봐야 할 것 같아.”
“이런….”
“한동안 카메라 들기는 힘들 것 같다는데, 다른 건 기한이 아직 남아서 괜찮은데 당장 평강 출장이 문제네….”
팀장이 말끝을 흐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가 진행하던 모든 프로젝트의 일정이 꼬여버렸다.
“평강이요?”
“응, 평강 쪽 유채 꽃밭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누굴 보내지? 당장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
…유채 꽃밭? 샤오잔의 손이 멈췄다.
“리쉬엔을 보낼까? 스케줄이 되려나?”
“제가,”
목소리가 갈라졌다. 큼, 작게 헛기침을 한 샤오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갈게요.”
“네가? 스케줄 괜찮겠어?”
“마침 프로젝트 끝나서 시간이 살짝 비어요. 크게 문제없을 것 같으니까 제가 다녀올게요.”
“그렇게 해 주면 나야 좋지. 자세한 내용은 이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참고해.”
“네.”
팀장이 자리로 돌아가고, 캘린더에 일정을 적어 넣던 샤오잔의 손이 멈췄다. 후난 평강의 유채 꽃밭, 일전에 사진으로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유채 꽃밭과 푸른 하늘, 그와 퍽 닮은 꿈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곳에 서 있던 한 남자도 함께 떠올랐다.
띠링-
상념에 빠진 샤오잔을 깨운 것은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뜬 이메일 알림이었다. 팀장이 보낸 출장 세부 자료인 것을 확인한 샤오잔이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해 첨부 자료를 열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그가 그저 제 꿈속의 사람일까 봐, 그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봐 두려웠다.
꿈과 닮은 그곳에 네가 있을까? 그곳에 넌 실재하고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 샤오잔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 ❀ ❀
이마를 간지럽히는 바람의 감각에 샤오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 멀리 노란 꽃밭과 푸른 하늘이 맞닿아있었다.
‘여긴 어디지?’
손끝에 노란 유채꽃이 걸렸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샤오잔은 곧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나? 처음 겪는 현상에 신기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래서 어떻게 깨야 하지? 아무도 없는 유채 꽃밭에서 덩그러니 서 있던 샤오잔은 뒤쪽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십 대 후반? 많이 쳐줘 봐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분명히 내 꿈인데, 저 남자는 누구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샤오잔의 질문에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 내 꿈에 나타나요?”
“…응? 여긴 내 꿈인데?”
“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남자가 샤오잔을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샤오잔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나는 ---, 당신은?”
분명 들었는데 바람에 흩어진 듯 들리지 않았다.
“샤오잔.”
그리고 꿈이 흩어졌다.
❀
“또 보네?”
한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샤오잔을 일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니 본 적 있는 유채 꽃밭과 마냥 낯설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
“기억하네?”
반쯤 잊고 있었던 꿈이었지만 그를 보는 순간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러는 너는?”
“샤오잔, 맞지?”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웃으니까 더 어려 보이네. 샤오잔이 뒤죽박죽인 머리로 멍하게 생각했다.
“당신은 대학생이야?”
“왜 그런 게 궁금해?”
“그냥.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이잖아.”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각몽을 꾸는 것도 신기한데, 같은 인물이 나오는 데다, 그도 이게 꿈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신기한 경험이 샤오잔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직장인이야.”
“…하?”
남자가 당황한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넌? 대학생?”
“응.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거야?”
“아니, 대학 졸업하고.”
“…2년제?”
“네 차례야. 몇 학년?”
“…3학년.”
남자의 말이 조금씩 작아졌다. 샤오잔의 입꼬리가 삐뚜름 올라갔다.
“너, 나보다 어리구나?”
“어… 미안, 아니, 어, 죄송합니다…?”
남자가 머쓱한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됐어. 꿈에서까지 존댓말 들어야 할 정도로 꼰대는 아니야.”
“그럼 나 쟌거라고 불러도 돼?”
“…….”
순식간에 거리감이 줄어드는 호칭에 잠시 말을 잃자 남자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 샤오잔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그냥 이름을 부르긴 그러니까.”
“…….”
“…싫어?”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게 꼭 사고 친 강아지 같아 불쑥 웃음이 튀어나왔다.
“마음대로 불러.”
“응, 쟌거.”
눈치를 보던 얼굴이 순식간에 꽃피듯 피어났다.
어쩌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또 이 꿈이다. 노란 꽃밭 한 가운데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곧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쟌거.”
“안녕, ---.”
샤오잔이 부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얼굴에 옅은 불만이 서렸다.
“그냥 --면 돼. 그렇게 불러 줘.”
“그래, --.”
그제야 만족한 듯 그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면서도 금세 전염된 웃음에 샤오잔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웃으니까 예쁘다.”
“…으응?”
“…내가 지금 소리 냈어?”
“응.”
흰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명한 반응에 샤오잔의 귓가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그,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냥 웃으니까 보기 좋아서.”
“으응, 음, 고마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흩날리는 노란 꽃잎 사이에서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 한참 동안 행복하게 웃었다.
❀
몇 번의 꿈이 더 지난 후였다.
“뭐해?”
무언가에 열중한 둥근 뒷머리에 말을 거니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혀 샤오잔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쟌거!”
아무리 봐도 강아지인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 만들고 있었어?”
“응, 근데 음….”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유채 꽃대가 얼기설기 엮여 원을 이루고 있었다.
“화환?”
“실패한 것 같아.”
그의 큰 손은 노란 꽃물과 초록 풀물로 얼룩덜룩했다. 꽃대를 엮으며 과하게 힘을 주었는지 유채꽃 일부는 조금 뭉개져 있었다.
“더 연습해야겠다.”
“줘봐.”
우물쭈물하던 그가 엉성한 화환을 건넸다. 샤오잔은 옆의 화단에서 유채 꽃대를 몇 줄기 꺾어 조금씩 화환에 엮어나갔다. 엉성하기만 했던 화환에 노란 꽃들이 더해지며 조금씩 풍성해졌다.
“자, 완성.”
그의 머리 위에 완성된 화환을 톡 얹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왜 꽃에 나비가 꼬이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진 화환을 한번 만지작한 그가 그대로 화환을 벗었다.
“아?”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화환이 샤오잔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화환을 쓴 샤오잔을 빤히 본 그가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예쁘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노란 꽃잎이 흩날렸다.
“쟌거 주고 싶어서 만든 거였어. 예쁠 것 같아서.”
처음 말실수로 얼굴을 붉혔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샤오잔을 향해 예쁘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쁘단 말이, 웃음으로 둥글게 휘어진 눈매가 마음에 자국을 냈다.
아,
이건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샤오잔의 두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
그날은 정말 우울했던 날이었다. 한 달을 밤새우며 공들였던 프로젝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뺏겼고, 다른 프로젝트 하나는 아예 엎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퇴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지같은 인생, 갈려버린 멘탈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침대에 무작정 몸을 뉘었다. 그리고 다시 이곳이었다.
“비….”
항상 맑기만 했던 유채 꽃밭은 오늘따라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회색 하늘에 무거운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쟌거.”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젖은 머리의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안녕, --야.”
웃음으로 평범을 가장하려 했지만,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샤오잔의 어색한 미소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쟌거, 괜찮아?”
“괜찮,”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던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샤오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지 않아…!”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사실은 화가 났고, 허탈했고, 슬펐다. 그러나 성인이니까, 직장이니까, 다른 사람들 앞이니까 억누르고 참아왔다. 괜찮냐고 묻는 이들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다.
“내 프로젝트인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흐,”
빗방울 사이로 조금 따뜻한 물방울이 샤오잔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한번 터져버린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 샤오잔을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안아주었다. 샤오잔이 그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샤오잔이 슬픔을 털어내고 유채 꽃밭에 다시 푸른 하늘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그저 말없이 샤오잔의 등을 토닥이며 서툰 위로를 전할 뿐이었다.
❀
눈을 뜬 그곳은 여전히 노란 유채가 만개해 있었다. 현실의 시간에는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지만 이 꿈속은 변함없는 봄의 한가운데였다. 손을 뻗어 꽃밭을 한 번 쓸어본 샤오잔이 저도 모르게 긴 꽃대 하나를 톡 꺾었다.
‘꽃다발, 만들어볼까?’
생각해보면 그가 처음 만들었던 화환 이후에는 한 번도 꽃으로 무언가를 만든 적이 없었다. 탐스러운 노란 꽃송이가 만개한 꽃대들을 골라서 꺾어 한 손에 모았다. 초록 줄기로 꽃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요령껏 고정하니 그럴싸한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흡족한 결과물에 만족한 샤오잔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자 옅은 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살짝 흐트러진 꽃송이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자리를 잡아준 샤오잔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앞을 보니 어느새 도착한 그가 서 있었다.
“--야?”
“…아,”
큰 손이 입가를 감쌌다.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희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샤오잔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
“쟌거-”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샤오잔과 눈을 맞췄다.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꽃다발로 시선을 돌렸다.
“그 꽃다발, 나 주면 안 돼?”
“꽃다발? 그래.”
샤오잔은 선선히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애초에 그에게 주려 만들었던 꽃다발이었다. 꿈에서 깨면 사라질 꽃다발이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꽃다발을 보며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고 있었다.
“고마워, 쟌거.”
그가 고개를 들어 샤오잔과 눈을 마주쳤다.
“정말 예쁘다.”
마주친 두 눈이 호선을 그리며 곱게 휘어졌다.
‘꽃다발을 보며 한 말일 텐데,’
햇살을 머금은 따스한 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헝클였다.
이곳은 여전히 봄이었다.
❀
회색 하늘이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어두웠다. 일전에도 한번 이곳이 이렇게 흐렸던 적이 있었다. 바쁘게 움직인 샤오잔의 시선이 곧 저 멀리 서 있는 그를 찾았다.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늘에서는 한 방울씩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샤오잔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바오바오(宝宝).”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샤오잔을 꽉 끌어안았고, 샤오잔은 언젠가의 그가 샤오잔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그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머금었던 비를 모두 쏟아낸 구름이 흔적 없이 사라져 다시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것처럼 샤오잔을 힘들게 하는 모든 슬픔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며 그는 유채 꽃밭에 파란 하늘이 돌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그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늘 눈이 왔어. 첫눈은 이미 오긴 했는데 쌓일 정도로 오니까 좋더라.”
현실의 시간은 가을을 지나 겨울의 중간에 들어섰다. 꿈이란 것이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은 서로의 시간이 맞닿음을 느끼곤 했다.
“…내가 사는 곳에도 눈이 왔어.”
그가 조금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우리 어쩌면,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지나간 몇 번의 꿈에서 그들은 같은 날짜와 시간과 날씨를 공유하고 있었다. 샤오잔의 현실에 비가 오던 날이면 그의 현실에도 비가 왔고, 샤오잔의 현실에 태풍이 불었던 날에는 그의 현실에도 태풍이 불었다.
“나, 쟌거를 만나고 싶어.”
그의 곧은 시선이 샤오잔에게 닿았지만 샤오잔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꿈에서 깨면 난 네 이름도, 얼굴도, 네가 어디 사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
“쟌거.”
“그리고 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진짜 존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내 상상인 건지 모르겠어.”
“…쟌거.”
“우리가 만날 약속을 잡고 만에 하나 꿈에서 깨도 그 약속을 기억한다면, 그래서 그곳에 나갔을 때 아무도 오지 않으면,”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면 난 못 버틸 것 같아, --야.”
샤오잔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그려냈다. 넓은 유채 꽃밭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면 내가 갈게.”
그가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날 만나러 오는 게 무서우면 내가 갈게. 내가 쟌거를 찾을게. 언젠가 꼭 당신을 만나러 갈게.”
그 말에 샤오잔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 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흰빛이 그와 유채 꽃밭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승- 희 W- 시- 항에 도- 니다. 좌석- 매주시고-,”]
저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승객 여러분, 저희 WX324편은 잠시 후 창사 황하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주시고-,”]
승무원의 안내방송에 샤오잔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베이징에서 창사까지 비행 예상 시간은 2시간 45분, 이륙 이후 기억이 없는 것을 봐선 기체가 안정되기 전에 잠든 듯싶었다. 작게 기지개를 켠 샤오잔은 좌석 벨트를 점검하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아직 잠기운이 서린 눈이 느리게 깜빡이며 조금 전까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자각몽을 꾸는 것도 흔치 않은데 이전에 꾸었던 자각몽들을 꿈으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이야.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비행기가 조금씩 하강했다. 잠시간의 덜컹거림 이후 안전히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려 이정표를 따라 수속을 밟았다. 1박 2일의 짧은 출장이라 카메라 가방과 기내용 캐리어만 들고 탔기 때문에 짐을 찾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바로 밖으로 나갔다. 공항 한편의 부스에서 예약했던 렌터카를 받아 평강으로 향했다.
꼬박 두 시간 반을 운전해 예약했던 호텔에 체크인 하고, 짐을 풀고 카메라의 상태를 점검하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서둘러 샤워하고 나온 샤오잔이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몸을 뒤로 뉘었다.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 후 급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오후 늦은 비행기를 타고 창사로 날아와 장거리 운전까지. 비행기에서 조금 눈을 붙였지만, 여전히 쌓인 피로에 샤오잔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오늘 꿈에서는 널 볼 수 있을까?
곧 방 안에 고른 숨소리만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
꿈조차 꾸지 않은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 이르게 울리는 알람에 눈을 뜬 샤오잔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다섯 시 반을 넘기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 창밖은 어둑어둑했지만 사람 없는 유채 꽃밭을 찍어야 하는 샤오잔에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뒷머리를 헝클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으니 딱 여섯 시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끄고 카메라 가방과 차 키를 챙긴 샤오잔이 호텔 방을 나섰다.
호텔에서 차로 30분이 걸려 도착한 유채 꽃밭은 옅게 깔린 안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공기를 들이마신 샤오잔이 카메라를 꺼내 조정했다. 찰칵, 짧은 셔터음 후에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
주변의 풍경을 둘러본 샤오잔이 프로젝트 내용을 떠올리며 촬영을 시작했다. 유채 꽃밭의 외곽을 따라 유채 꽃밭과 뒤쪽 산의 전체적인 풍경을 담아내며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란 꽃밭 한 가운데서 수십 번 셔터를 누르던 샤오잔의 손이 문득 멈췄다. 카메라를 내리며 뷰파인더가 아닌 맨눈으로 눈 앞에 펼쳐진 유채 꽃밭을 담았다.
샤오잔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은 넓은 유채 꽃밭, 푸른 하늘, 그리고 그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샤오잔. 사실 자신은 아직 호텔 방에 잠들어있고, 또 그 자각몽을 꾸는 게 아닐까?
“하… 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저은 샤오잔이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아침은 꽤 괜찮은 사진을 많이 건진 듯하니 조금만 더 찍으면 될 것 같았다. 짧게 숨을 들이쉰 샤오잔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 너머로 유채 꽃밭을 보았다.
“아,”
샤오잔이 다시 카메라를 내렸다. 뷰파인더에서 노란 꽃밭 사이로 보이던 것이 카메라를 내리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샤오잔은 무언가에 홀린 듯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샤오잔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윽고 가방끈을 부여잡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기, 저기 있었는데,
“헉!”
격자무늬의 유채 꽃밭에서 모서리를 도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가 샤오잔의 팔을 잡아 세웠다. 갑자기 멈춰진 샤오잔이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쟌거.”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이, 보야.”
꿈에서 깨면 잊었던 그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잊은 게 무색하리만큼 선명하게 그곳에 있었다.
❀ ❀ ❀
왕이보는 자주 꿈을 꿨다. 꿈의 시작은 노란 유채 꽃밭이었다. 왕이보는 그곳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를 만났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의 나이를 알았다. 자신보다 어리거나 동갑일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꽤나 형인 것을 알고 호칭을 바꿨다. 그다음에 그는 왕이보의 이름을 부르며 더없이 예쁘게 웃었다. 돌이켜보면 아마 그 웃음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왕이보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의 웃음이 좋았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화환 만드는 법’을 검색해 얼기설기 끈을 엮으며 연습했다. 꿈속에 그들에게 있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유채꽃과 풀, 그리고 흙뿐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실전은 상상처럼 쉽지 않았고, 그가 처음 엮은 화환은 그저 풀 뭉치 같은 못난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엉망인 풀 뭉치를 예쁜 화환으로 만들어냈고, 꽃처럼 예쁘게 웃으며 그 화환을 왕이보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왕이보는 제 머리에 얹어진 화환을 그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첫사랑이 이미 시작했음을.
하루는 비가 내리는 꿈속에 그 혼자 서 있었다. 왕이보를 발견하고 애써 웃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종래에는 울음을 터트리는 그를 안아주었다. 비와 눈물이 섞여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들어갔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그였지만, 그럼에도 이 시간만큼은 그가 자신에게 온전히 기대 위안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왕이보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그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몇 번의 꿈이 더 지났을 때였다. 눈을 떴을 때 그는 그를 꼭 닮은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름을 가져버린 감정은 순식간에 튀어나와 왕이보의 마음을 잠식했다. 오롯이 자신만을 눈에 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문득 욕심이 났다. 꿈에서 깨면 없어질 꽃다발, 꿈에서 깨면 사라질 그의 얼굴과 목소리였지만 그 한 조각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왕이보는 그에게 꽃다발을 달라고 했다. 꽃다발은 예뻤고, 그것을 주는 이는 더 예뻤다. 그가 왕이보의 ‘예쁘다’라는 말이 꽃다발만을 향한 게 아닌 것을 아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쐐기를 박은 것은 왕이보가 유달리도 우울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왕이보는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가 그의 뒷담화를 하며, 그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보았다. 친구였던 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도 보았다. 왕이보는 그에게 화를 내지도,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여느 때처럼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냥 자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흐린 유채 꽃밭에서 눈을 떴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곧 나타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왕이보를 ‘바오바오(宝宝)’라고 부르며 양팔을 벌렸다. 왕이보는 그의 가는 몸을 꽉 끌어안았고, 그는 왕이보를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왕이보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품속에서 왕이보는 생각했다. ‘당신을 평생 놓을 수 없겠구나.’ 하고.
만나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조금은 충동이었다. 조금 더 조심히 말하고 싶었지만 불쑥 튀어나와 버린 진심에 그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고 왕이보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가진 우려는 왕이보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왕이보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는 다정히 웃고, 때로는 아이처럼 행복해하고, 때로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서럽게 울던 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들은 꿈에서 깨어나도 왕이보의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알면서도 왕이보는 그에게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그곳에 존재한다면, 왕이보는 평생을 다 바쳐 그에게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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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창사 황허 공항까지 가는 WX324편입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
평일 오후 비행기는 조금 한산했다. 좌석 벨트를 착용한 왕이보는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변경하고 창문가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 여행은 상당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를 찾겠다고 결심했지만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막막하던 찰나 눈에 띈 것이 평강의 유채 꽃밭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한참동안 보던 왕이보는 검색창을 열어 평강까지의 길을 검색했다. 평강의 유채 꽃밭에서 그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꿈속과 퍽 닮은 그곳에 서 있으면 그에 대한 작은 기억 하나 떠올릴지 모를까 하는 작은 희망이 그를 움직였다.
사람이 적어도 비행기의 통로는 언제나 붐볐다. 조금씩 빠지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비행기에서 내린 왕이보는 수속을 밟고 바로 렌터카를 찾으러 갔다. 데스크 앞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다른 사람을 안내하러 간 직원을 잠시 기다렸다가 돌아온 그의 안내를 받아 차로 향했다. 하루치 간단한 짐이 든 배낭을 조수석에 던져 넣은 왕이보가 운전대를 잡았다. 호텔까지는 두 시간 반이 걸렸고, 슬슬 눈이 피곤해질 때쯤 호텔에 주차를 완료했다. 작게 하품을 한 왕이보가 배낭을 손에 쥐고 차에서 내렸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올라가 배낭을 대충 던져놓은 왕이보는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물에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쓰고 나온 왕이보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긴 여정으로 피곤했던 몸이 무거웠다.
오늘은 당신을 볼 수 있을까?
곧 방에는 고른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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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쏟아지는 햇살에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쉬며 잠에서 깬 왕이보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7시 30분, 알람도 맞추지 못하고 잠든 것치고는 다행히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유가 있는 건 아니어서 분주히 나갈 준비를 했다. 체크아웃하고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어제 옆에 주차됐던 차가 이미 사라진 것에 괜히 마음이 급해진 왕이보가 서둘러 유채 꽃밭을 향해 출발했다.
30시간 같은 30분이 걸려 도착한 유채 꽃밭 인근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데 어딘가 낯익은 차가 보였다. 어젯밤 호텔 주차장에서 봤던 차와 같은 차 같았다. 착각인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급한 것은 저 차가 어제 호텔 주차장에서 봤던 차인지가 아니라 이 유채 꽃밭에서 꿈속의 ‘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지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왕이보가 유채 꽃밭에 발을 디뎠다.
세상이 온통 노랬다. 꿈속의 그곳처럼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유채꽃뿐이었고,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있었다. 이렇게 넓은 유채 꽃밭 안을 걷는 건 처음이라서인지 유채 꽃밭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치 꿈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을 부를 것 같았고, 돌아서면 그가 보일 것 같았다.
마치 저 멀리,
“…!”
설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왕이보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분명 저기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잊었던 그 얼굴이 저기 있었다. 두 번 골목을 꺾으니 저 멀리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시 다리에 힘을 준 왕이보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멀리만 있던 그가 조금씩 가까워졌고, 그가 모퉁이를 돌 때 그의 팔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 안개가 걷힌 듯 지워졌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얼굴을, 이 이름을 어떻게 잊었던 걸까.
“쟌거.”
“이, 보야,”
그리고 그가 왕이보의 이름을 불렀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中 -
❀
“약속, 지켰어.”
왕이보는 약속을 지켰다. 샤오잔을 찾겠다는, 그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샤오잔이 고개를 숙여 왕이보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그의 팔목을 잡았다. 손끝으로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분명 그는 이곳에 있었다.
“쟌거.”
왕이보가 샤오잔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샤오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샤오잔은 여전히 왕이보의 어깨에 기댄 채 그에게 답했다.
“나도.”
그의 답은 왕이보가 그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유채 꽃밭에서 빠져나왔다. 주차장에 도착해 샤오잔이 차 키를 누르니 한쪽 구석에서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쟌거 차야?”
“응? 응, 내가 렌트한 차야. 왜?”
신호음이 울린 차는 오늘 아침 주차를 하고 낯이 익어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던 차였다.
“혹시 어제 SZ 호텔에서 묵었어?”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도 어제 거기서 잤어… 하-.”
그리고 그 차는 어젯밤 호텔 주차장에서 보았던 차와 같은 차가 맞았다.
“우리 조금 더 일찍 만날 수도 있었는데….”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에 설핏 웃은 샤오잔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잖아.”
“그렇지만….”
하루가 뭐라고 이렇게 아쉬운 것일까.
“나 체크아웃해야 해서 일단 호텔로 돌아가야 해. SZ 호텔, 거기 주차장에서 만나자.”
“아, 쟌거! 출발하기 전에 전화번호!”
왕이보가 다급히 샤오잔의 팔을 잡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톡톡톡, 전화번호를 입력한 샤오잔이 그대로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 됐다.”
“있잖아, 우리 통화 하면서 가면 안 될까?”
차가 두 대였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의 차를 운전해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30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문득 불안함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혹시라도 그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혹시라도 이게 그냥 꿈이면 어쩌지? 혹시라도 그를 다시 잊어버리면 어쩌지? 그것은 샤오잔도 마찬가지였다.
“응, 그러자.”
샤오잔이 왕이보의 팔뚝을 한번 꽉 잡았다가 놨다. 분명 그는 현실에 존재하고,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 샤오잔이 통화가 연결된 전화기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차로 향했다.
30분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통화 중인 핸드폰에서 들리는 작은 숨소리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호텔에 도착해 서둘러 체크아웃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 앉아 처음으로 함께 식사했다. 언젠가 꿈에서 이야기했던 데로 차우쇼우를 배부르게 먹은 둘은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샤오잔의 차가 앞서가고, 왕이보의 뒤가 바로 뒤를 따랐다. 샤오잔은 수시로 백미러를 보았고, 왕이보는 앞서가는 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채 꽃밭에서 호텔로 올 때처럼 공항으로 갈 때도 두 사람의 핸드폰은 계속 통화 중이었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현실을 함께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
“난 베이징행 3시 10분 비행기인데, 넌?”
같은 부스에서 렌터카를 반납한 두 사람이 공항 로비에 나란히 섰다.
“…나도 같은 비행기야.”
계속해서 겹치는 우연에 샤오잔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곧 둥글게 휘었다.
“다행이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이 예쁜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왕이보의 얼굴에도 다정한 미소가 피어났다.
카운터에서 발권을 진행하며 나란히 붙은 좌석을 받았다. 바로 체크인하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3시 10분, WX905편, 베이징행. 전광판에서 게이트 번호를 확인한 두 사람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순조롭게 게이트를 지나 비행기에 탑승해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샤오잔이 고개를 기울여 왕이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느낌이 너무 이상해. 아직 꿈을 꾸는 것 같아.”
“나도 그래.”
왕이보가 손을 펴자 샤오잔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둘의 손가락이 빈틈없이 얽혔다.
“신기해. 항상 꿈에서만 만나던 쟌거를 이렇게 현실에서 마주하고,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거기다 집도 멀지 않고.”
꿈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렴풋이 예상했던 데로 둘은 같은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차로 10분 정도의 꽤 가까운 거리였다.
“어쩌면 우리 오며 가며 만났을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우리는 그렇게 스치진 않았을 것 같아.”
“왜?”
“내가 쟌거를 봤었으면, 그냥 지나갔을 리가 없으니까. 저 넓은 유채 꽃밭에서 쟌거의 얼굴을 보고 한눈에 알아봤던 것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쟌거를 알아보고 잡았을 거야.”
하루에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은 스쳐 지나칠 수 없다. 왕이보에게 샤오잔은 그런 존재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그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었어도?”
“응. 우리가 꿈에서 만나지 않았어도 난 쟌거를 잡았을 거야. 왜냐하면-”
궁금해진 샤오잔이 머리를 들었고, 동시에 왕이보가 샤오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꿈에서 우리가 처음 봤던 날 기억해? 그날 유채꽃 사이에 혼자 서 있는 쟌거를 봤을 때. 그리고 그다음 꿈에서 쟌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을 때. 나는 그때가 시작이었어.”
“아-”
“쟌거,”
왕이보가 다시 그를 불렀다. 코가 스칠 듯 얼굴이 가까워졌지만 샤오잔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랑해.”
유채 꽃밭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고백이 샤오잔에게 날아들었다. 샤오잔이 몸을 조금 기울였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의 안내방송에 두 사람이 자세를 바로 했다. 승무원이 진행하는 비상구 안내를 확인할 때도,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해 이륙할 때도, 두 사람의 손은 여전히 굳게 얽혀있는 채였다.
❀
왕이보와 샤오잔은 더는 꿈속의 유채 꽃밭에서 함께 걷지 않았다.
왕이보와 샤오잔은 이제 현실에서 함께 걸었다.
왕이보와 샤오잔은 더 이상 이것이 현실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샤오잔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샤오잔의 회사 앞에서 만났고, 나란히 보도블록이 깔린 길을 걸어 저녁을 먹으러 간다. 자주 서로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고,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함께 아침을 맞고, 함께 저녁을 보내고, 함께 휴일을 보내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행복하고. 함께 하는 것들에 점점 더 익숙해졌다.
시간은 흘러 다시 봄. 넓디넓은 평원이 다시 노랗게 물들 무렵, 그들은 함께 그들의 시작과 닮은 유채 꽃밭으로 향했다. 그리고 깍지 낀 그들의 왼손 중지에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Fin.
안녕하세요, 덕중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로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키우고, 결국 그 인연이 현실로 이어지는 소재는 오랫동안 써보고 싶었던 소재라 이번 합작을 기회로 도전했는데 능력이 부족해 잘 전달이 되었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실 본체가 다해서 할게 없었습니다. 후기 쓰다 지각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다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