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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강

@WXdagang 

 *촬영 스케줄 등은 정확하지 않고 제가 임의로 상상한 픽션입니다. 참고해 주세요..

추락주의






“남잠, 이입이 영 안돼?”

카메라의 붉은 등이 꺼지고, 감독의 무전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텝들이 이보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파란 크로마키로 뒤덮인 세트장에서 이보가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폈다.

“음, 네.”

대답이 짧아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은 진심이었다. 세트 밑의 샤오잔에게도 분장을 고치기 위해 메이크업 담당들이 붙었다. 촬영은 클라이맥스이자 드라마의 첫 시작인 위무선이 불야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봐. 부모님이라든가, 여자친구라든가.”
“……현실성이 없잖아요.”

만약 여친한테 사고가 난대도 제가 진짜 이렇게 구해낼 수 있겠어요? 같이 떨어져 죽겠지. 이보가 꽤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제 딴엔 정말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절벽 아래서 곧장 요란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뭐야? 왜 웃어!”
“현실성이 없다니까 웃기잖아!”

눈물 때문에 지워진 파운데이션을 고치던 샤오잔이 끅끅대며 웃고 있었다. 좀 전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눈이 어느새 실실 웃고 있었다. 감독의 의도는 곧잘 따라가면서도 캐릭터에 이입하기 어려워하는 탓에 그 전에도 두 사람은 자주 이런 식으로 서로 티격태격댔다. 샤오잔은 불퉁한 표정의 왕이보에게 장난스럽게 빈정댔다.

“냉정한 왕이보 선생. 연애하기 진짜 힘들겠다.”
“형은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눈물이 바로 쏟아지는데?”
“지금 위무선이면 당연히 울고 싶지.”

샤오잔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저도 잃고,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걸!”

너무 쾌활하게 말하는 모습이 얼핏 이릉노조의 연기 톤과 비슷해 오싹하기까지 했다. 이보는 의아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거의 위무선에 동화된 것 같은 샤오잔의 연기 방식을 저에게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위무선처럼 날뛰고 화내고 깔깔대면 편할 텐데. 대사도 없고, 움직임도 적은 남망기의 감정은 어찌어찌 머리론 이해한다고 해도 그걸 눈빛이나 아주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님 네가 가진 거 중에 제일 비싼 건 뭔데?”

분장을 고치는 사이 감독이 티격대는 둘 사이를 끼어 들었다. 고민하던 이보의 대답은 짧았다.

“바이크요.”
“바이크?”
“지난 달에 다음 시즌 준비하면서 제 전용 머신을 커스텀했거든요.”

이보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럼 그 오토바이가 네가 타 보기도 전에 벼랑 밑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 봐.”
“안돼!”
“오, 지금 그 표정이면 딱 좋겠네.”

감독이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위무선을 오토바이로 생각할 거냐며 주변에 있던 샤오잔과 탁성이 깔깔 웃었다.
왕이보에게는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나 보다. 효과가 있었는지 다음 컷에서 바로 오케이가 났다. 오토바이가 답이었네, 장소를 정리하며 스탭들이 저희들끼리 장난처럼 이야기를 하며 흩어졌다. 놀림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핏자국을 내기 위한 분장들을 닦아낸 이보는 근처 나무 기둥에 대고 스트레칭 중인 샤오잔에게로 다가갔다.

“너 정말 날 오토바이라고 생각한 거야?”
“어.”
“세상에.”

샤오잔이 아연실색하며 웃었다. 위무선이 오토바이만 못하다니, 실망이다. 왕이보는 그런 샤오잔의 눈치를 살피며 팔을 뻗었다. 아까부터 계속 팔꿈치를 주무르고 있는 모습이 신경쓰였던 탓이다.

“서러운 지기에게 마사지라도 해 주는 거야?”

다행히 샤오잔은 크게 군말하지 않고 이보에게 팔을 내 주었다. 오히려 이보가 기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보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잔의 팔을 주물렀다. 살거죽 밑으로 바로 뼈가 느껴지는 걸 보니 살이 전보다 더 내린 게 분명하다. 이건 나중에 한 마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보는 주변을 살폈다. 꽤 공들였던 신이 끝난 차여서 스텝들은 간식으로 배를 채우거나 담배를 피우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른 배우들도 휴대폰을 보며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잠시 현장을 벗어나는 분위기였다. 이보는 잔의 팔을 주무르며 은근슬쩍 그를 숲 안쪽으로 이끌었다.

대충 남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싶은 곳에서 이보는 불쑥 잔의 팔을 끌어당겼다.

“잔거어.”
“왜,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또⎼”

재잘대는 잔의 입술 위로 촉, 부드러운 입술이 맞부딪쳤다.

“너, 너!”

방심하고 있던 잔이 그를 밀어냈지만 이보는 황급히 제 입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주변을 재빨리 스캔하느라 커다란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보는 잔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는 걸 깨닫곤 다시 대범하게 입술을 맞부딪쳤다. 다행히 잔도 저희들이 촬영장에서 꽤 멀어졌단 걸 깨달았는지, 이번엔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진다. 요새 대사가 잘 외워지지 않는다며 도통 잠을 자지 못한 샤오잔의 거친 입술과 달리 이보는 조금 전까지 클로즈업 신에 대비해서 립글로스까지 덧발라 아주 촉촉한 상태였다. 젤리처럼 말캉한 입술에 저도 모르게 잔은 이보를 끌어당겼다. 짧은 시간 동안 감질나게 입술과 혀를 맛 본 잔이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어쩐지 머쓱한 표정이었다.

“미리 말이라도 하든가.......”
“아까부터 하고 싶었단 말야. 눈 앞에 계속 보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이입은 못하고?”
“키스하고 싶은데, 슬픈 생각을 하라고 하니까 그렇지.”

샤오잔이 질색하며 그를 뒤로 밀쳤다. 이런 반응 쯤이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이보는 무섭지도 않았다. 먼저 잔을 꼬드긴 것이 무색하게 이보는 먼저 풀썩 멀어져 갔다.

“누가 찾겠다. 저녁 같이 먹자.”

매번 남들이 찾는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하고는 했던 잔을 따라하는 말투였다. 함광군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이보를 보며 잔이 멀뚱히 나무 옆으로 나와 섰다. 이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지. 아직 남자애의 온기가 묻은 입술을 괜히 깨물면서 샤오잔은 괜스레 팔을 공중에서 휘젓곤 간이 벤치로 돌아갔다.

“잔, 여기 핸드폰.”
“고마워요, 누나.”

잔의 메이크업 담당이 핸드폰과 선풍기를 건넸다. 목 아래 선풍기를 가져다 대며 핸드폰 잠금을 풀자, 웬일로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미안, 오늘 출발하려고 했는데 XXX 스케줄 때문에. 내일 아침에 비행기 탈 것 같아. 곧장 갈게.]

이젠 매니저의 미안하다는 첫 마디가 익숙했다. 얼마 전에 소속사에서 잡아 준 비행기 티켓을 멋대로 바꿨을 때 탐탁지 않아 했으니, 어쩌면 그 보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잔은 애써 요즘 매니저가 바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저 외에 다른 멤버들도 각자 개인활동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사활을 걸었다. 이런 산골에서 몇 달째 같은 드라마를 찍고 있는 잔에게 나누어 줄 신경은 모자랄 것이다. 그나마 드라마를 두 개나 잡은 저는 운이 좋은 편이다. 조연들과 촬영 팀과도 빨리 친해져서 버스를 얻어타고 숙소에서 촬영지까지 들어오는 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 있기만 해도 더운 숨이 뿜어져 나오는 산 속에서 몇 겹이나 되는 긴팔의 고장극 의상을 입은 채로 뛰고 소리치노라면 그런 익숙함에도 진절머리가 나곤 했다. 다만 더 이상 그 짜증을 텍스트나 메시지로 옮길만큼의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샤오잔은 평소라면 ‘알겠어.’라고 한 마디 덧붙였을 메시지도 그냥 읽음 표시만 남긴 채로 껐다.

“쟌쟌, 저녁시킬 건데 어떻게 할래?”

자리를 정리하던 감독이 물었다. 잔은 핸드폰 화면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 전 들어가서 좀 잘게요.”
“컨디션은 괜찮은 거지?”
“그럼, 그럼. 걱정 마요.”

감독은 잔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응시했지만, 마음대로 하라고 그를 놓아 주었다. 해가 지기 전 들어온 호텔은 특별히 왕이보와 따로 잡은 곳이었다. 지난 번 촬영 때 수다를 떨다가 왕이보가 커플 끼리 같은 숙소를 써야하니 어쩌니 하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녀석이 결제까지 끝마치는 걸 그대로 내버려둔 결과였다. 평소 잔이 묵던 숙소보다 더 높은 등급의 객실은 확실히 더 편하고 아늑했다. 정작 이렇게 훌륭한 숙소를 잡아놓고 왕이보는 밤늦게까지 촬영팀과 노는 것을 좋아해서 둘이 제대로 숙소에서 마주친 적은 아직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이 아까 촬영 내내 굴러다녔던 곳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멍하니 누워 있는데 위챗 메시지가 왔다. 왕이보였다.

[잔형, 벌써 숙소라며. 저녁은?]
        [안 먹을래.]
[왜? 나랑 같이 먹기로 했잖아!]
        [아, 미안. 근데 나 다이어트 해야 돼.]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고… 저절로 탄식이 새 나왔다. 받을 때까지 걸려올 게 분명하다. 잔은 편하게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잔이 전화를 받자마자 이보가 빠르게 쏘아 붙였다.

⎼다이어트는 무슨 다이어트야?
“너랑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얼굴이 더 붓는 거 같아.”
⎼붓긴. 감독도 너 요즘 너무 말랐다고 말한 거 못들었어?

아까 거죽밖에 없던데? 왕이보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생각이 없어.”
⎼굶는다고 다 빠지는 줄 알아? 운동을 해야지.
“운동 하고 있거든…….”

잔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주에 도착한 뒤로는 제대로 운동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왕이보는 거기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다른 제안이 이어졌다.

⎼살 빼야 되면 나랑 같이 유산소하자.
“유산소?”
⎼우리 아침마다 달리자고 했잖아.
“아, 그거……

샤오잔은 숙소를 예약하면서 왕이보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길이 잘 되어 있네, 아침마다 뛰어도 되겠다. 대학 때부터 늘 밤샘이 일상이었던 샤오잔은 촬영을 하면서도 본격적인 촬영 전 배우들이 다 같이 아침 일찍 무술 훈련을 받던 때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왕이보가 매번 조르는 아침운동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차라리 24시 짐에서 일과가 끝난 뒤 새벽 운동을 하는 편이었다. 그 마저도 제대로 할 때는 별로 없지만. 그래서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넘겼었는데, 그걸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할래? 굶기만 한다고 빠지는 거 아냐. 내가 깨워 줄게.
“…….”
⎼같이 가는 거다?

조용한 침묵에 샤오잔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은 왕이보가 다시 밀어붙였다.

“알겠어.”
⎼야호!

아주 떨떠름하고 자신 없는 목소리였는데도 왕이보는 신나서 소리쳤다. 전화를 끊은 잔은 스케줄을 살폈다. 오전 촬영 전 운동을 하고 오려면 적어도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은 일찍일어나야 했다.

‘역시 무리 아닐까.’

그가 생각하는데 띠리리- 잔의 룸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
“왕이보?”

샤오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을 열었다.

“뭐야, 근처였어?”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어, 먹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너처럼 무책임한 줄 알아?”

왕이보는 자연스럽게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 봉지를 본 샤오잔이 얼굴을 굳혔다.

“난 안먹는다고……”
“걱정 마, 그래서 살 안찌는 걸로 사왔어.”

왕이보는 제 룸과 똑같은 구조의 방 안으로 익숙하게 들어와 테이블에 비닐 봉지를 내려 두었다. 닭가슴살과 샐러드, 과일, 홍차 따위가 봉투 안에서 차례차례 나왔다.

“아무튼 손 정말 많이 가.”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건 네가 처음일 걸…….”

일회용 포크까지 포장을 벗겨 자리에 내려 두는 왕이보 탓에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잔은 괜히 콧잔등을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막상 눈 앞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니 허기가 돌았다. 생각해 보니 점심 도시락도 반 정도밖에 먹지 않았고, 이후로 먹은 거라곤 녹차 뿐이었다. 샤오잔은 오이와 당근을 집어 먹으며 의자 위로 발을 올렸다.

“꼭 숙소에서 연습할 때 같다.”
“그래?”

멤버들을 떠올리며 웃는 잔에 왕이보의 입 꼬리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그러나 눈치를 채지 못한 잔은 포크를 들고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종알댔다. 내내 액체만 들이키던 입 안에 씹히는 것이 들어가니 입이 터진 것처럼 참을 수 없었다.

“컴백 전에 이런 거 주워먹으면서 고기라고 자기 암시 걸고. 너네도 그랬지?”
“어, 비슷하지.”
“난 아예 차만 마셨는데. 그래도 너같이 이렇게 날 먹이겠다고 열정 넘치는 동생들은 없었어.”
“그래?”
“어, 우리 애들은 큰 형을 정말 배려해 주는 거였네, 싶다니까.”
“그래도 그 동생들하고 키스하고 몸 붙이진 않았지?”

쿨럭, 체할 것 하나 없는 메뉴를 먹던 잔이 쿨럭거렸다. 옆에 있던 홍차를 건네준 이보가 물었다.

“걔네들보다 내가 체력도 더 좋을 걸?”

노골적인 말에 잔은 그제야 이보의 눈치를 살폈다. 좀 전까지 짤막하게 대답하며 웃는 건 마지막 예의였던 모양이다. 어느새 입술이 불퉁하게 나와 있었다.

“날 걔네랑 똑같은 동생 취급하는 거 짜증나.”
“와, 왕이보, 너…….”
“왜?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그거야……”

제 식기를 정리한 왕이보가 일어나 잔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 먹었어?”
“거의⎼, 읍……..”

보는 눈이 없다고 곧장 입술을 막아오는 것에 샤오잔은 한숨을 내 쉬었다. 먹던 거라곤 풀 데기 뿐이지만 입 안이 텁텁해 민망했다. 왕이보는 아랑곳 않고 잔의 등 뒤로 의자 머리를 쥐며 더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데도 기분이 좋아서 문제다. 잔은 이보의 등에 팔을 감으며 생각했다. 원래도 연애할 때 스킨십을 좋아하고, 쾌감에 약한 편이기는 했다. 동성애에도 편견이 없었으니 드라마를 하기로 했던 거고, 그렇지만 나 역시도 남자를 상대로 꽤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촬영 초반 슬슬 어색함을 풀어가던 왕이보와 대본을 보며 이야기 하다가 얘기가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자끼리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자긴 잘 모르겠다며, 꽤 진지하게⎼ 그렇지만 영 싫지는 않은 투로 말하길래 장난처럼 건드려 봤는데 그게 이 남자애의 불길을 확 당기는 기폭 장치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키스는 똑같네, 아래는 남자끼리라 더 알기 쉬워서 좋고, 가슴은 조금 의외? 뻔뻔하게 굴더니 이젠 촬영장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저에게 들러붙을 눈치를 본다. 촬영 중반부터는 뻔뻔하게 제가 남편이라는 위치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보의 탓만을 하기엔 샤오잔의 6년 더 오래된 양심이 따끔거렸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말랑하고 기분 좋은 입술은 여태 없었는 걸. 거기다 왕이보가 성급하게 굴 때면 잔의 안에서도 경쟁심에 불이 붙어, 저도 모르게 생각보다 뜨겁게 몸을 맞붙이게 되곤 했다.

“이제, 그, 그만.”
“이렇게 됐는데……?”
“내일 조깅하자며.”
“아…….”
“네가 먼저 말한 거잖아.”

잠시 고민하던 이보는 알겠어, 하곤 불퉁한 표정으로 몸을 뗐다. 이미 입술은 잔뜩 불어터졌지만 내일이면 나아질 거다.
그럼 게임이라도 하자는 왕이보를 잔은 억지로 돌려보냈다. 호텔은 맞은 편 방과 유리창이 마주 보는 프라이버시라곤 없는 기묘한 형태였다. 제 방에 들어가서도 창문 너머로 내일 늦지 말라며 핸드폰을 흔드는 녀석에게 애써 오케이 핸드 사인을 보내곤 샤오잔은 커튼을 쳤다. 침대에 누운 샤오잔은 대본을 들었다. 귀주에서의 촬영은 온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그리고 고소수학 신이 대부분이었다. 위무선의 생에서 극과 극인 두 부분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가 아팠다. 특히 최근 잔은 온통 이릉노조의 삶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불행한 삶을 따라가면 어느 샌가,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그룹 멤버들의 단체 채팅방은 그룹으로 함께 참여하는 스케줄이 뜸해진 이후로 거의 소식이 없었다. 잔이 드라마를 들어가며 다들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 뒤로 잔이 일상적인 안부를 먼저 남기지 않으면 멤버들이 먼저 운을 떼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축하해! 지금까지 고마웠어.”

촬영이 끝난 후 남망기의 옷을 벗은 이보가 잔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잔은 반갑게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품에 와닿는 이보의 몸이 차가웠다.

“이제 돌아가야지.”

화려한 차림의 이보가 말하며 잔을 놓아 주었다. 잔은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이릉노조의 모습이었다. 등을 돌리고 한거를 비롯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보를 보며, 잔도 등을 돌렸다. 맞아, 돌아가야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버텼는데! 그러나 등을 돌려 잔이 발을 내딛는 순간, 공허한 밑바닥 속으로 몸이 푹 꺼져 들어갔다.


기분 나쁜 충격과 함께 잔이 눈을 떴을 때는 가슴 위에서 여덟시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원래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일어나지 못하면 왕이보가 방문을 뜯고 들어올 것 같아 핸드폰을 아예 가슴 위에 올리고 잠든 것이다. 평소라면 공복으로 잠들어 아침에 눈을 뜨면 거의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어 있었는데, 그나마 속은 편안했다. 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마지막의 추락감이 기분 나빠 가슴이 울렁거렸다. 잔은 아무렇게나 후드를 주워 입고 이보의 방문을 두드린 다음, 먼저 밖으로 나왔다.



“안 깨워도 일찍 일어났네.”

샤오잔이 호텔 밖에서 이른 아침의 풍경을 찍고 있을 때 이보가 물 두 병을 들고 걸어 나왔다.

“응… 너 얼굴 엄청 부었다. 어제 뭐 먹지도 않았는데.”
“촬영 전에 아메리카노 왕창 마실 거야.”
“너 그렇게 많이 마시면 속에 안좋아.”
“샤오 선생은 내 나이 때 더 많이 마셨을 거잖아.”
“어휴, 왕 선생 정말 한 마디를 안지네.”


곧장 경주하듯 뛰어나갈 줄 알았더니 왕이보는 잔과 나란히 마주 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연습 때나 들었던 구령에 피식피식 웃으며 몸을 풀다 보니 막 일어났을 때의 불쾌감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 여름이라 여덟 시인데도 선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길 위로 늘어선 나무의 키가 커서 해가 들지 않고 이슬이 내려 숲의 풀냄새가 가득이었다. 거의 1시간을 뛰다 걷다 하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샤오잔은 기진맥진이었다. 이보가 잔의 속도를 맞추어 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10분 정도는 절대 걷는 걸 용납하질 않아 거의 혓바닥을 빼물고 헥헥댔다.

“왕선생, 아침부터 진짜…….”
“봐, 내가 체력이 얼마나 좋은데.”

제 몫의 물은 다 마신 탓에 잔이 이보의 물을 뺏어 마저 목을 축이고 있노라니, 뻔뻔스러운 자랑이 이어진다. 잔은 한숨 돌리고 나서 쏘아붙였다.

“날 제대로 안지도 못했으면서.”
“아니, 그때는 타이밍이 안좋았다니까!”

얼마 전 촬영에서 감독 앞에서 공주님 안기를 했던 때의 이야기였다. 잔이 이보에게 안겨 다리 한 쪽을 들어 올리자마자 왕이보의 무릎이 그대로 꺾여 실패. 몇 번이나 더 시도해 봤지만 잔의 키도 있는 탓에 도통 괜찮은 그림이 나오지 않아 결국 이보에게 업히는 걸로 장면을 바꿨다. 원작에 있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도 바로 기각 당했던 얘기를 하니 아주 잔을 잡아 먹을 기세였다.

“됐으니까 조식 먹자. 배고파 죽겠어.”
“와, 매일 뛰자고 해야겠다. 쟌선생님이 먼저 밥을 먹자고 하다니.”

둘은 키득대며 호텔로 돌아 갔다. 조식을 많이 먹느라 촬영에 살짝 지각하긴 했지만 내내 촬영도 순조로웠다.

“내일부턴 고소 수학 장면을 찍을 거니까 오늘 필요한 것들 미리 챙겨 두고요.”

감독의 정리에 네, 스텝과 배우들이 대답했다. 오늘 촬영 이후로 빠지는 보조 스텝이나 배우들도 많았다. 내일 이른 아침에 떠나거나, 현장에 합류하기로 한 사람들도 있어 내일부터는 촬영장 분위기가 꽤 달라질 듯했다.
덕분에 모처럼 늦은 시간까지 마시고 떠든 잔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쟌형, 촬영은 잘 하고 있어?]

한참 전에 온 멤버 A의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다.
잔은 그대로 잠들고 싶은 정신을 붙들고 답장했다. 다행히 A도 깨어 있었는지 메시지는 빠르게 이어졌다.

        [지금 막 종료! 넌 요즘 어때?]
[와! 늦게 끝났네. 수고했어.]
[거기 벌레 많다며. 우리 형 어떻게 해?]
        [그래도 여기선 다른 사람들한테 더 꼬여서 난 생각보다 많이 안물려.]

늘 왕이보한테 몰리는 모기를 생각하며 샤오잔은 키득키득 웃었다.

[ㅋㅋㅋ]
[우리랑 있을 땐 형이 모기밥이었잖아.]
        [응, 나 여기 계속 있을래.]

잔이 우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덧붙이는데, 상대가 메시지를 쓰고 있다는 말풍선이 느리게 멈췄다 이어졌다. 뭐지? 별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에 비해 짧은 메시지가 이어서 도착한다.

[나 올해에 다른 길을 못찾으면, 오디션 프로그램을 나가볼까 하고.]
        [오디션?]
[내년에 또 비슷한 서바이벌 무대를 한다고 해서.]
[나는 아무래도 무대에 서고 싶거든.]

바쁘게 움직이던 잔의 손가락도 멈췄다. 잘 생각했어, 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 그룹을 두고 그럴 수 있냐고 힐난해야 할까? 하지만 잔이 생각하기에도 저희들이 새로운 앨범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거기다 최근엔 잔도 줄곧 개인활동 뿐이었으니 탓할 수도 없었다. 마치 잔의 생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A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형도 전에 유학을 갈까 고민된다고 했잖아.]
[난 그래도 형이랑, 우리가 잘됐으면 좋겠어.]

잔은 고민하다가 답장했다.
        [응, 나도 그래.]


대화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 내내 잠을 설쳤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는데 하필 오늘부터의 촬영은 고소 수학이었다. 불야천 촬영이 없던 선로가 뒤늦게 합류하며 낮에는 모처럼 운몽 강씨들끼리 서로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러면서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어제의 여파는 계속이었다. 우선 다른 오디션을 몇 개를 준비 중이라는 A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이게 맞는 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지니 그대로 식욕이 굳어 아무 것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는 일부러 선로의 옆에 앉았다. 불야천 장면을 찍는 동안 너무 고생한 것 아니냐며 선로가 반찬을 내밀었지만 내내 두 그릇씩 먹었다며 밀어냈다.


“너 나 왜 피해?”

그러나 오후 촬영에서 왕이보를 맞닥뜨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내가 널 왜 피해…….”

잔은 피곤하게 웃었다. 이보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그런 식으로 웃잖아, 지금.”
“그냥 좀 피곤해서.”

잔의 예상대로였다. 제가 불편해 하는 기색은 귀신 같이 알아내는 애였다.

“걱정 있어?”

도리도리, 잔이 고개를 저었지만 이보는 여전히 거짓말이라는 걸 굳게 믿고 있는 표정이다. 그 와중에 슛이 들어갔다. 남망기와 위무선이 거의 처음 만나는 장면이라, 이보의 화난 표정은 오히려 효과가 좋았다. 문제는 샤오잔이었다. 몇 번이나 대사를 씹어 NG를 낸 다음엔, 결국 감독이 나서서 쉬자는 말을 꺼냈다. 잔이 멍하니 운심부지처의 앞 마당에 앉아 있는데, 이보가 다가왔다.

“어제 들어가서 못 잤지?”
“어?”

이 녀석 눈에 띄면 안되는데. 잔이 깨달았을 땐 이미 도망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면 정말 모양이 이상해진다. 잔은 괜히 인터넷 창을 껐다 켰다. 그런 잔을 보며 이보가 욱해서 말했다.

“대사만 못하는 게 아니고, 너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불안해. 어제 헤어질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이상하잖아.”
“아, 미안…….”

이보의 독촉에 잔이 고개를 숙였다. 그냥 게임하느라 못잤다고 해야겠다, 잔이 생각할 때였다.

“형.”

이보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낮은 소리로 잔을 불렀다. 그를 올려다 보는 남자애의 얼굴이 정말 걱정스러워서 잔은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변명을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한텐 걱정 있으면 다 말하라고 했으면서 왜 말을 안해 줘?”
“그게 아니고…….”
“내가 못미더울 순 있겠는데……. 그래도 네가 말했잖아. 우린 여기서 서로 누구보다 가까워야 된다고.”

혼자 있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크랭크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좀처럼 정을 못 붙이는 이보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보는 중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활동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고, 샤오잔 역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컸다. 본인의 앞만 보느라 처음엔 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 과거의 제가 했던 말을 이보를 통해 다시 들으니 낯설었다. 내가 저렇게 기특한 소리를 했었다니, 난 그냥 아직도 똑같이 방황 중인데. 문득 잔의 눈에 이보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진 흑백의 대비로 복장부터 그와 멀었지만, 오늘 같은 흰 고소수학 복장을 입고 있으니 부쩍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냥 멤버들하고 연락하다가.”
“응.”
“이 촬영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지금이야 즐겁지만……”

아직 제 안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누구에게 털어 놓으려니 영 어색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지난 번에 감독하고 말했었는데, 원작 소설에서 위무선 독백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있거든.”
“뭔데?”

잔은 기억을 더듬어 입을 열었다.

“위무선은 추락이 두렵지 않았고, 여러 번 추락을 경험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지면 분명 아플 것이었다.”
“……..”
“난 위무선만큼 강하지 않아서 추락이 두렵거든. 그런 생각 중이었어.”
“이 다음이 무서워?”
“응.”

왕이보는 끝까지 담담하게 샤오잔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중간에 장난처럼 넘어가거나, 과하게 제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였다. 이보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진득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잔의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조언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말주변도 없는 녀석이 자신을 위해 말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뺨이 달아올랐다. 잔은 허리를 펴며 손으로 화끈대는 얼굴을 부채질했다.

“와아, 이거 말하고 나니까 부끄럽다. 나 너한테 되게 쪽팔린 소리를 했었네.”
“뭐가 쪽팔려, 완전 쿨했는데.”
“그거 왕선생식 칭찬이지? 들어 줘서 고마워.”

진지하게 답을 고민하던 이보는 어색하게 분위기를 돌리는 샤오잔을 의아하게 올려다 봤다. 벌떡 일어난 잔은 이보가 저를 붙잡을 새라 감독에게로 달려갔다. 감독님, 저 다 외웠어요! 할 수 있어요! 잔은 수편을 흔들며 경망스럽게 달려갔다. 내심 샤오잔의 컨디션을 신경쓰고 있던 스텝들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거봐, 역시 완전 위무선이라니까. 식사 직후라 컨디션이 안 좋았나 보지. 그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빠지는 건 왕이보의 몫이었다.

***


마지막 신의 촬영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비가 아니라 폭우였다. 궁기도에서 이렇게 비가 내렸다면 살수차를 부를 일도 없었을 거라고 누군가 농담을 던졌다가 곧 빗소리에 먹혀 들었다. 이보와 잔이 미리 2층 별채에 올라가 카메라 앵글을 잡으려는 순간 귀신같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칠 수도 있으니 대기하라는 말에 두 사람 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빗줄기는 거세지기만 할 뿐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거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하네…….”

워낙 빗줄기가 거세 뛰어내려가더라도 금방 의상과 머리가 다 젖을 게 분명했다. 그 뒤로도 계속 촬영이 이어졌지만 다시 둘만 남으니 낮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이후 이보는 샤오잔의 눈치를 살피며 내내 조용하게 굴었다. 그 덕에 침묵을 혼자서 메워야만 하는 잔은 괜히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위무선의 대사를 읊으며 좁은 마루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처마를 따라 떨어지는 빗줄기를 향해 우묵하게 구부린 손을 뻗으니 순식간에 손바닥 안에 물웅덩이가 고였다. 계속 이렇게 내리려나, 아득해 지는데 뒤에서 어색하게 의상을 만지작대던 이보가 잔의 옆으로 슬쩍 다가와 섰다.

“쟌형.”
“응?”
“마침 우리 뿐이니까. 아까 내가 대답을 제대로 못한 거 같아서.”
“아, 괜찮은데…….”

잔은 멋쩍게 코를 긁었다.

“쭉 생각해 봤는데, 나는 한 번 좋아하게 된 건 계속 좋아하거든.”
“어?”
“네가 무서울 때마다 나를 불러.”
“……촬영이 끝나도?”
“응, 내가 잡아 줄게.”

이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이 감동하려는 찰나, 아, 하더니 갑자기 이보가 덧붙였다.

“그 물리적으론 실패했지만⎼ 그건 내가 하체 더 할 테니까…….”

물리적? 하체? 샤오잔은 흐름을 알 수 없는 운동 화제에 당황하다가 그게 공주님 안기를 실패했던 것에 대한 해명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풉, 푸하하! 왕이보. 너 네가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 알겠어?”

샤오잔이 웃음을 터뜨리자 이보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마구 쓸었다.  

“하, 아니……. 미안, 나 지금 완전 헛소리 했지.”

지금까지 퍽 저와 맞먹는다고 생각했던 남자애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지 않으면 저보다 키가 조금 작고, 희고, 숙인 턱선이 날카롭고, 자기보다 좀 더 단단한 몸을 가진, 뜨겁게 몸을 부딪쳐 오다가 중요한 순간엔 횡설수설하고 마는 남자애.

“감독님!”

잔은 빗소리를 뚫고 반대편의 스텝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추운데, 잠깐 들어가 있을게요!”

서로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잔의 손짓발짓을 알아들은 감독이 머리 위로 커다랗게 동그라미 사인을 그려 보였다. 샤오잔은 이보의 손을 끌고 작은 별채의 문을 열었다. 주변에 조명을 잔뜩 설치해둔 덕분에 창호지를 뚫고 어렴풋하게 빛이 들어와 간신히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 마자 샤오잔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정말 계속 날 받아줄 거야?”
“응.”
“그럼 지금 받아 줘.”

이보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로 샤오잔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촬영장에서 잔이 먼저 이보에게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은 천과 긴 머리가 거치적거렸지만 잔은 아랑곳 않고 이보의 어깨를 쥐었다. 맞닿은 입술이 커다랗게 벌어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혀를 옭아 맸다. 비를 맞아 체온이 내려가 있었던 탓에 입안이 뜨거웠다. 키스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혀의 넓은 부분을 쓰다듬고 입술이 깨물릴 때마다 새롭게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순간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잔의 몸을 받아낸 이보는, 잔을 꼭 끌어 안고 바닥에 앉았다.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으니 한층 안정감있는 자세에 입맞춤은 더 대범해졌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벗길 수도 없어, 이보는 옷 안을 파고드는 대신 잔의 목덜미를 지분댔다. 목 위에 닿는 이 남자애의 크고 거친 손길 하나하나가 생생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 뜨거운 이보의 열기가 잔과 맞닿은 부분부터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무서워, 그래도 이보가 있으면…….’

아…….
그 어느때보다 이보와 진솔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깨달은 순간, 샤오잔은 위무선이 남망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 역시 지금 샤오잔과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스텝들이 우산을 들고 두 사람을 데리러 2층 별채로 올라왔다. 촬영은 내일 저녁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모두가 촬영 장비를 철수한 다음에야 비가 뚝 그쳤다.

“좀 쉬고 싶었나 본데.”

누군가 세트장을 보며 장난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미 땅이 젖어 다시 촬영을 재개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너도 내일 밤까지 휴가야.”

감독은 콕 찝어 샤오잔에게 말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여태의 불안을 모두 들킨 듯한 느낌에 잔은 머쓱하게 목을 문질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옆에서 같이 게임을 하자는 둥, 운동을 하자는 둥 떠들어 대는 이보는 내내 잔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잔은 이른 아침 이 길을 나설 때의 걱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가슴이 충만해졌다. 위무선이 꿈으로 가득하던 시절, 바라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던 시절의 저에게도 그의 호승심이 흘러 들어 오는 것 같았다.

“날짜에 맞춰서 주려고 했는데 안되겠다.”

샤오잔의 방 앞에서 헤어지기 아쉽다며 내일 아침 알람을 얘기하는 이보에게 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가 날 든든하게 해 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보답을 줘야지.”

멀뚱한 표정의 이보를 방으로 이끈 잔은 캐리어를 넣어 둔 붙박이장에서 제 몸 만한 상자를 꺼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보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별채에서 내려 온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다.

“이게 뭐야?”
“생일 선물.”
“와, 샤오잔이 준비했다고?”

잔은 제대로 꺼내서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그제야 정신이 든 이보가 다급하게 선물 상자를 뺏어 들었다.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상자를 내려놓고 어린 애들처럼 포장을 뜯었다. 단순한 포장지는 금방 뜯겨져 나갔다. 화려한 색깔의 헬멧이었다. 상상도 못했는지 이보는 놀란 표정으로 잔을 올려다 봤다.
잔은 이보와 마찬가지로 눈높이를 맞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음, 나도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어서.”

어쩌다 보니 아까의 대답처럼 됐네. 잔이 머쓱하게 웃었다. 헬멧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보가 입을 열었다. 그건 잔에게 전하는 말 같기도 하고, 스스로 되 뇌이는 다짐 같기도 했다.

“그럼 우리 서로를 지켜주는 거야.”
“응. 잘 부탁해.”

헬멧이 든 상자를 다리 사이에 끼고 앉은 이보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창 너머에는 비가 갠 하늘 가득 별이 쏟아질 것처럼 떠 있어 한낮처럼 밝았다.

너와 함께라면 어둠으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남들에겐 도통 보여주지 않는 수줍은 미소를 보여 주는 남자 아이 덕분에 샤오잔은 이 풍경을 아주 오래오래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END


합작에 참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어쩐지 314보다 이보 생일에 어울리는 글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왕샤 러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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